우면산 새벽 16(구제역과 설 물가)
구제역과 설 물가
구제역이 발생한 지 벌써 석달째다. 넋 놓고 손도 못쓴 채 묻은 소와 돼지가 어느새 200만 마리를 넘어섰다. 죽기 직전까지 새끼에게 젖을 물린 어미 소의 모정에도 눈 질끈 감고, 자식처럼 키워온 소가 "살려 달라"는 애소를 담은 큰 눈망울을 껌벅여도 매몰차게 몰아, 구덩이에 묻어버린 산목숨이 200만이란 얘기다. 닭과 오리 등 날것까지 합치면 500만에 육박한다.
모두 살처분당해 텅 빈 축사
이름조차 생경한 '살처분' 현장은 TV화면으로만 보아도 역겹다. 동물 시체가 썩으며 나오는 가스를 배출하려 박아놓은 파이프들은 음울한 나치의 살인공장을 연상시킨다. 농민들은 살처분 구덩이 쪽을 쳐다보는 것조차 두려워 고개를 젓는다. 당장 사람이 살아갈 방도야 다음 문제고 죄 없는 생명을 산채로 묻어버린 죄책감과 공포심에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구제역이 나라를 휘저은 지 50일 만에 대통령은 현장을 찾았다. 그 역시 아프고 쓰린 마음이야 피해농민들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구제역이 한창인데도 뮤지컬이나 감상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대통령의 속마음 역시 타들어가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란 얘기다.
그래서 "'구정'(설날을 지칭한다. 지금은 그런 일제잔재 표현을 안 한다.) 전에 방역 성과가 나와 국민들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국민이 설 명절을 편히 쇨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터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의지일 뿐 실현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당장 명절 대이동을 통한 구제역 바이러스의 전파·창궐을 우려한 농민들이 설날 고향에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꺼린다. 동물 질병이 발생한 곳이든 아니든 지방자치단체들 역시 친척 친지의 고향방문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
이러니 박두진의 시처럼 '마을마다, 웅기중기, 떠들썩하던' 명절날 시골풍경은 기대 자체가 난망이다. 모두 살처분당해 텅 빈 축사, 찬바람만 도는 외양간도 모자라 명절날 사람이 나다니는 것조차 꺼리는 시골이 됐으니 이게 보통 문젠가. 거기다 앞으로 날이 풀리면 살처분 현장에서 침출수가 쏟아지고 상상조차 어려운 질병이 나돌 것이란 경고도 나돈다. 푸근하게 안아주고 감싸던 고향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시골이 이처럼 황폐화해간다면 도시는 물가폭탄에 비틀거리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식료품 가격 앞에 정부는 거의 손을 놓다시피 허둥대기만 한다. 명절물가를 잡겠다고 뻔질나게 회의는 하지만 시장에 나간 주부들은 장바구니에 한숨만 가득 담아온다. 시골의 부모, 도시의 자식들이 모두 고개 숙인 명절을 맞으려 한다.
물가폭탄에 장바구니엔 한숨만
정말 이렇게 설을 쇠어야 하는 걸까. 상황이 이쯤 됐으면 누군가 잘못을 뉘우치고 국민에게 사과할 법도 하건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없다. 누구보다 국민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야 할 집권여당은 그 대신 개헌논의를 한판 벌여보겠다는 얘기를 버젓이 내놓고 있다. '떨며 울고, 눈물짓고, 엎드려 곡하는' 모습이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부패 공무원과 도박
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들의 도박행위가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2~3일에 한번 꼴로 강원랜드 카지노를 들락거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팅금액이 100억원대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감사원이 19일 공개한 공직자 도박실태에서 밝혀진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공직자들이 자기의 직무를 얼마나 성실하게 이행했을 것이며 그많은 도박자금은 어떻게 마련했을까. 감사원 발표를 보며 우리가 단순한 도박중독증 걱정의 차원을 넘어 깊은 우려와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 닿아있다.
감사원은 지난 2007년 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의 강원랜드 기록을 점검, 과도하게 출입을 일삼은 공무원과 공기업 직원 370여명을 적발했다. 대부분 중하위직이었지만 차관보급 1명을 포함해 5급 이상 고위 공직자가 7~8명, 공공기관 임직원 10명 내외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적발된 사람들은 조사기간인 46개월 동안 평일에 60차례 이상 드나든 경우다. 모 공기업의 간부는 조사기간 중 무려 402차례나 강원랜드를 입장해 사흘에 한번 꼴로 찾았고 한 지방국립대 교수는 주말을 포함해 무려 626차례나 이곳을 출입했다고 하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감사원이 적발된 사람들의 근무기록과 강원랜드 출입기록을 대조해 본 결과 50여명은 무단으로 결근하거나 정당한 이유없이 외출해 강원랜드를 찾았다. 심지어 상급자에게 허위출장서를 내고 카지노에 간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하기야 이렇게 하지 않고서야 평일에 외진 강원도 정선까지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이들의 도박자금 규모를 보면 입이 더 벌어진다. 한 공공기관의 본부장급 인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이 인사는 게임실적에 따라 1%가 마일리지로 적립되는 이른바 '콤프'가 1억원이나 됐는데 이를 실제 베팅액으로 환산해보면 100억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콤프가 1천300만원 이상인 공직자도 50여명에 달했다. 이들은 강원랜드에서 각자 13억원 이상을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3천만원 이상을 현금으로 지니고 있어야 입장할 수 있는 VIP룸을 드나든 공직자도 1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공직자들이 이처럼 거액의 현금을 들고 다니며 수십억원 또는 100억원 규모의 도박을 했다니 이들을 신뢰하고 공직을 맡긴 국민으로서는 허탈해지고 기가 찰 뿐이다.
감사원은 이번에 적발된 370여명 중 출입횟수나 베팅금액 등에서 특히 정도가 심한 70여명에 대한 조사를 이달 말까지 마치고 나머지 300명 중 절반 가량을 선별해 다음달에 추가조사할 예정이라고 한다. 도박자금의 규모와 출처 등을 철저히 밝혀내야 할 것이다. 고액 베팅자들은 적은 종잣돈으로 돈을 따 게임을 했다든가 자기 집 등 부동산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든가 하는 이유를 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를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적발된 사람들의 직책과 직위 등에 비추어볼 때 도박자금의 출처가 충분히 의심스럽다 하겠다. 수도권내 중앙행정기관의 직원이 수억원의 공금을 유용해 도박자금으로 사용해오다 적발돼 지난해 파면된 실제 사례도 있다. 감사원은 이들이 업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 공금횡령이나 업무 관련자로부터의 금품수수는 없었는지 한치의 의문도 없이 파헤쳐 공직기강을 다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해당 개인은 물론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상급자나 기관에 대한 문책도 빼먹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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