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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6월은 당신들로 인해 행복했었다.

 

 

 

 

 

 

 

6월은 당신들로 인해 행복했었다~~

 

6월은 당신들로 인해 행복했었다.

답답하고 암울한 이나라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 기쁨을 선사해 준 당신들이었기에 우리들은 잠시나마 행복했었다. 당신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우리들에게 밝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진정으로 당신들은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당신들과 같이 국민 모두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같이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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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팀, 8강 좌절

 

한국 축구대표팀이 26일 밤(한국 시간) 포트 엘리자베스의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전에서 1-2로 석패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8년 만에 16강에 진출한 한국은 8강을 바라보고 열심히 싸웠지만 선제골을 내주며 주도권을 뺏긴 끝에 패배를 면치 못했다.

 

한국의 출발은 좋았다. 전반 4분 박지성이 아크 왼쪽까지 파고들다 막시 페레이라의 파울로 프리킥을 얻었다. 박주영이 키커로 나서 오른발로 감아찼고 볼은 너무나 아쉽게 왼쪽 포스트에 맞고 나갔다. 그래도 첫 공격 시도치고는 상당히 괜찮았다.

우루과이는
디에고 포를란을 중심으로 공격을 풀어 5분 첫 슈팅을 시작으로 한국을 공략했다.

8분, 한국 수비진이 잠시 멈칫 하는 사이 선제골을 내줬다. 포를란이 왼쪽 측면에서 플랫4 수비라인 뒷공간으로 낮게 패스한 것을 루이스 수아레스가 페널티지역 오른쪽으로 달려들어 오른발로 가볍게 골망을 흔들었다.

위기는 계속됐다. 실점하며 흔들린 한국은 26분 이정수가 어설프게 볼 처리를 하는 사이 가로채기를 당했지만 다행히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아 추가골을 내줄 위기를 모면했다.

30분이 지나서야 안정감을 찾은 한국은 김정우의 슈팅을 시작으로 박주영, 기성용 등이 다양한 위치에서 우루과이의 골문을 위협했다. 애석하게도 정확도가 떨어지면서 골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44분에는 박지성이 파울을 유도하며 프리킥을 얻어 키커로 다시 박주영이 나섰지만 수비벽에 맞고 나오며 동점골 없이 전반을 마쳤다.

 

 

후반, 우루과이는 중앙 수비수 디에고 고딘이 빠지고 마우리시오 빅토리노를 투입하며 전방으로의 연결에 중점을 뒀다.

파상공세로 나선 한국은 4분 김재성, 5분 박주영이 좋은 찬스를 놓치면서 쉽게 골과의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은 한국은 공격의 강약을 조절하며 완벽한 공격 장면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패스를 잘 연결했지만 마무리가 되지 않자 허정무 감독은 15분 이동국을 투입해 제공권 싸움에 승부수를 던졌다.

이동국의 투입으로 높이가 확보가 된 한국은 23분 이청용이 동점골을 터뜨렸다. 기성용이 왼쪽 측면에서 연결한 프리킥이 빅토리노의 머리에 맞고 옆으로 흐르자 이청용이 정확한 위치 선정 후 과감하게 머리를 던져 헤딩 동점골을 터뜨렸다. 아르헨티나전 만회골에 이어 이청용의 이번 월드컵 개인 2호 골이다.

당황한 우루과이는 29분 발이 빠른
니콜라스 로데이로를 교체 투입해 총공세에 나서며 다시 공격 주도권을 잡아갔다. 34분 수아레스가 페널티지역 좌측에서 밖으로 돌아나가며 오른발로 슈팅, 볼은 오른쪽 포스트에 맞고 안으로 꺾이며 골로 연결됐다.

총공세로 나선 한국은 41분 이동국과 박주영이 연이어 위협적인 슈팅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후 우루과이가 볼을 돌리며 시간을 적절히 소비했고 반전 없이 경기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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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남아공월드컵 16강전 대한민국 대 우루과이의 경기가 열린 27일 새벽 서울 영동대로에서 대한민국이 2대1로 패하자 거리응원을 나온 한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감독도 선수도 울었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 허정무 감독은 27일 새벽 12시 50분(한국시간) 종료된 우루과이와의 16강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충혈된 눈으로 “찬스를 살리지 못한 게 아쉽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기 직후 그라운드에 나가 선수들을 격려한 뒤 돌아서서 얼굴을 훔쳤다. 중계 카메라가 고개 숙인 그의 뒷모습을 비췄다. 굵은 빗줄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경기를 우리가 지배했는데도 찬스를 못 잡은 게 아쉽다”라고 말하면서 잠시 울먹였다. 이어 “우리가 찬스에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그런 완전한 찬스가 오기 힘든데 못 넣은 게 아쉽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우리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다는 얘기를 해 주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밤늦게 응원해주신 국민 여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이청용 선수도 경기 직후 믹스트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며 결국 눈물을 보였다. 후반 22분 헤딩슛을 성공시키며 분위기를 살렸던 그는 8강 진출이 좌절된 것이 못내 안타까운듯 고개를 떨궜다.

한편 현지에서 경기를 중계하던 배성재 캐스터와 차범근 해설위원도 경기를 마무리하며 애써 눈물을 참는 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차범금 위원은 충혈된 눈으로 “우리 선수들 너무 잘 싸워줬다”고 말했다. 배성재 캐스터도 눈과 코가 빨개진 채 “성원해 주신 국민들께 감사드린다”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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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팀 정말 잘 싸웠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다. 한국 감독이 원정 경기에서 16강 진출을 축하하며 내친김에 8강까지 갈 것으로 온 국민들이 기대를 하였지만 우루과이의 벽을 넘지를 못하였다. 우리 축국의 미래를 전망해 본다.
 

우루과이에 막힌 8강의 꿈

한국 축구대표팀은 2002년 한·일월드컵 멤버와 20대 초반의 신예들이 조화를 이뤘다. 신예들이 충분한 경험을 쌓았고, 10대 후반의 유망주들이 성장하고 있다. 비록 8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한국 축구의 미래는 밝다. 더반(남아공)=이호형 기자
세계를 향한 한국 축구의 유쾌한 도전은 7월의 문턱에서 멈추었다. 원정 16강을 넘어 8강을, 2002년의 기적을 재현하겠다는 축구대표팀의 야심은 월드컵 원년 챔피언 우루과이의 벽 앞에서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한국 축구의 꿈은 진행형이다. 태극전사들은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남아공을 떠나도 좋다.

16강전을 앞두고 한국 축구는 8강전 상대까지 눈여겨 봐뒀다. 미국이든 가나든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미국은 슬로베니아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랜던 도노번이 결승골을 터뜨리기 직전까지 탈락 위기에 빠졌던 팀이다. 상대가 가나라면 조별리그에서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예방접종을 한 한국이 유리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 놀라운 투지와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국 축구는 2000년대의 첫 10년을 화려하게 보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첫 승리와 16강-8강-4강 진출의 위업을 이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원정 첫 승리를 기록했다. 16강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대회 준우승팀 프랑스와 비겼고 1승1무1패로 승점 4점을 따냈다. 그리고 남아공에서는 월드컵 참가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의 목표를 이뤘다.

지나간 10년은 한국 축구를 바꾸어 놓았다. 아시아에서 골목 대장 노릇을 하던 호랑이는 이제 막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넘었다. 한번 넘은 벽은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벽을 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줄기찬 도움닫기의 결과다. 7회 연속 본선 진출의 의미가 여기 있다. 한국의 축구팬들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당연한 일로 여기듯 조별리그 통과를 당연하게 여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21세기 첫 10년 동안 눈부신 발전
2002년의 성과를 두고 축구 전문가들은 ‘홈 어드밴티지를 업고 이뤄낸 일회적 사건’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하지만 이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뒤 국제축구연맹(FIFA)이 산출한 성적표에서 32개국 중 17위에 올랐다. 16강에서 딱 한 계단 부족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국내파 감독을 기용해 조별리그를 돌파했다. 최근 열린 세 번의 대회에서 두 번이나 16강에 올라갔다.

이번 대표팀의 특징은 ‘크로스오버(crossover)’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크로스오버란 이질적인 두 요소가 합쳐져 새로운 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남아공 월드컵팀은 2002년 월드컵 세대와 ‘젊은 피’가 크로스오버돼 좋은 하모니를 이루었다. 신구의 조화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월드컵 팀 선수 23명 가운데 골키퍼 이운재, 수비수 이영표·차두리, 미드필더 박지성·김남일, 공격수 안정환 등 6명은 2002년 월드컵을 경험했다. 반면 기성용·이청용·이승렬·김보경 등은 갓 스물을 넘긴 월드컵 새내기들이다. 2010년 남아공에서 한국 축구는 성실하고 우직하면서도 발랄했다. 선수들은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지만, 강팀과의 대결이라고 해서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이운재는 정성룡에게 자연스럽게 자리를 넘기고 선배로서 돕고 있다. 주로 후반에 교체선수로 기용되는 김남일은 경기나 훈련 전후로 기성용과 김정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귀를 열고 선후배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독특한 리더십의 주장 박지성은 성공적인 세대 교체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

어린 나이에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한 신세대 4인방은 다음 대회 때는 팀의 중진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원활한 세대 교체는 미래를 위한 저축인 셈이다. 기성용·이청용이 월드컵 무대를 누비는 모습을 지켜본 또래의 축구 선수와 후배들에게는 ‘나도 하고 싶다’는 경쟁심과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것이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본선 진출의 물꼬를 다시 튼 이후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1986년 이후 태어난 선수들은 지금껏 한국이 출전하지 못한 월드컵을 본 적이 없다. 월드컵은 한국이 줄곧 나가는 대회일 뿐이다. 월드컵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6강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16강에 도전장을 던질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10년간 한국 축구는 더 눈부신 위업을 이룰 수 있다.

다음 동작 생각하는 창조적 축구 익혀
지난해 맨체스터를 방문해 박지성을 인터뷰했다. 여러 질문 가운데 ‘가장 무서웠던 지도자는 누구였는가’라는 질문도 있었다. 박지성의 대답은 “초등학교 때 감독님”이었다. 이유를 묻자 “많이 맞아서”라고 설명했다.

박지성은 스승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는 소박하고 성실한 성격이다. 그런 박지성도 그 시절, 그 시스템 속에서는 얼마간 맞으면서 축구를 배웠다. 축구 선수 대부분이 박지성과 같은 경험을 했다. 그 윗세대는 더 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감독님’은 박지성의 마음속에 축구를 가르쳐준 고마운 스승인 동시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만일 박지성이 어린 시절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축구를 배웠다면 지금과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혹시 좀 더 창의적이고 발랄한 축구를 구사하지는 않았을까. 그 해답을 보여주는 선수가 바로 대한민국의 젊은 피들이다.

기성용과 이청용은 기존 한국 축구와 다른 문법으로 공을 찬다. 기성용은 공을 받은 후 움직임이 한 박자 빠르고 부드럽다. 민첩성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다음 동작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을 차는 게 쉽고 편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각하면서 스스로 상황을 타개해 나간다.

개인기 부족은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꼽힌다. 유럽과 남미는 물론 중동 선수와 경쟁해도 뒤진다. 어려서부터 이기는 축구만 추구하다 보니 개인기를 부리면 감독에게 혼쭐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청용은 예외다. 이청용이 스피드와 날렵한 발놀림으로 상대 수비를 따돌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청용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40m가 넘는 폭발적인 드리블로 상대 문전을 파고들어 놀라움을 샀다. 이승렬과 김보경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더 이상 상대 선수보다 개인기에서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이 선배들과는 다른 축구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성용은 중학교 1학년부터 4년 반 동안 호주에서 유학하며 공을 찼다. 정규 수업을 모두 듣고 방과 후에 축구를 즐겼다. 기성용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매일같이 죽어라 훈련하는데 나는 이렇게 조금만 공을 차도 좋을까 걱정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공을 더 차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기성용의 아버지 기영옥씨는 금호고에서 고종수, 윤정환 등 뛰어난 미드필더를 길러낸 지도자다. 그런 지도자가 자신의 아들을 축구와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축구 유학을 보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청용은 일찌감치 프로행을 택했다. 도봉중 3학년 때 FC서울에 입단했다. 병역 면제라는 혜택을 받았지만 학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학업 포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는 “가끔 남들처럼 고등학교·대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후회하고 걱정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축구가 아니면 할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프로 선수가 된 이청용은 흙먼지가 일고 자갈이 섞여 있는 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융단 같은 초록 잔디 위에서 훈련하며 기량을 키웠다. 고교에 진학했다면 우승을 하기 위해 먼 장래에 도움이 될 개인기 연마 등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프로구단 FC서울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3~4년 후에 완성될 선수 이청용을 가꿔왔다.

이승렬과 김보경은 용인축구센터 출신이다. 학원 축구의 틀에서 벗어나 유럽 방식으로 유소년을 지도하겠다고 나선 축구 학교다. 지난 2001년 허정무 감독은 히딩크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건네고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승렬과 김보경은 그때 제자들이다. 허 감독도 그때 뿌린 씨앗들이 자라고 자라 자신이 지휘하는 대표팀에서 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렬과 김보경 또래 중에는 이들을 능가할 만한 선수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승렬은 지난해 이집트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서는 벤치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설움을 겪기도 했다. 네덜란드 명문구단 아약스에서 활약하는 석현준(19) 등 축구팬들에게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재목들이 곳곳에서 커 나가고 있다.

박지성, 한국 축구의 도전과 성취 상징
박지성은 21세기에 열린 세 차례 월드컵에 모두 출전했다. 그리고 매 대회 골을 터트렸다. 2002년 한·일 대회에서는 포르투갈과 조별리그 최종전에 결승골을 넣었다. 2006년 독일 대회 때는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 천금 같은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그리스와의 첫 경기에서 쐐기골을 넣었다. 2002년에는 팀의 막내였다. 2006년에는 팀의 중진이었고, 이번 대회에서는 주장 완장을 찼다.

박지성은 99년 허정무 감독에 의해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박지성은 2000년 무대를 일본으로 옮겨 J-리그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히딩크를 따라 네덜란드로 갔다. 그리고 2005년에는 마침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성했다.

박지성의 강점은 한국 축구의 강점과 매우 흡사하다. 그는 남들보다 많이 뛴다. 꾀를 부릴 줄 모른다. 나보다는 팀 전체를 먼저 생각한다. 체격은 작지만 먼저, 재빨리 움직여 약점을 극복한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변신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박지성의 강점은 한국인 전체의 일반적인 장점과도 흡사하다.

박지성은 이런 장점을 바탕으로 일본에서도, 네덜란드에서도,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이 같은 박지성의 성장사는 곧 한국 축구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박지성의 뒤를 따라 이영표, 설기현, 김두현, 이동국, 조원희 등이 잉글랜드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박지성이 가는 길을 따라 한국 축구도 아시아의 수준을 넘어 세계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싸구려의 대명사였던 건 20년 전 이야기다. 이제 ‘메이드 인 코리아’는 믿을 만한 상품의 대명사다. 박지성이, 한국 축구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 그걸 증명했다. 물론 세상이 또 어떤 방향으로 변할 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또 아는가. 10년 후에는 ‘메이드인 차이나’가 세계 축구를 호령하고 있을지. 이곳엔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 한국 축구도 쉬지 않고 달려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