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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5월(비젼없는 대중 외교)

 

 

우면산의 5월 (비젼없는 대중 외교)

 

 

 

 

 

경제발전 좀 했다고... 졸부같은 생각을 버려야... 

 

중국의 과거 정권 명나라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여 일본군을 몰아냈다. 이와 같이 중국의 명나라는 내부 반란과 조정의 무능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원 요청에 우여곡절 끝에 지원군을 보내 꺼져가던 조선을 구원하였다. 이처럼 중국 땅의 역대 정권은 한반도가 외세로부터 위협을 받게되면 그 다음은 자신들이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며 지정학적으로도 한반도는 중국 정권의 안위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조선 말엽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민비의 요청으로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일제와 지배권 타툼을 벌이다가 결국은 청일전쟁으로 비화되어 패전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해방 후 북조선 김일성은 남한을 적화시키기 위해 한국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통일전략을 수립하였다. 북한은 미군정에 의해 정치적인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고 무기력한 남한을 침공하여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하였으나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유엔군이 38선을 넘게 되자 한국전 개입을 기정 사실화 하고 한만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추진 배치하여 전쟁개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은 북한 전역이 유엔군 수중에 떨어지기 전에 중공군을 북한지역 산악 깊숙히 침투시켜 유엔군을 포위 섬멸작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면서 철수를 강요하여 서울이 다시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등 휴전선 일대에서 장기간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휴전에 이르게 되었다. 중국은 붕괴 직전의 북한 정권을 구원하였고 북한 입장에서는 재조지은이며 영원한 혈맹 관계를 져버릴 수가 없다.

 

중국 또한 북한 지역이 미국의 수중으로 들어간다면 미군과 국경을 맞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한반도의 미군 기지로 부터 근거리의 북경과 중국 본토는 미사일 사정권에 들게 되며 이러한 리스크를 중국은 절대로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중국과 북한의 혈맹관계를 깨고 중국을 우리의 우방으로 끌어안지 않는 한 북에 대한 어떠한 무력도발이나 자위권 행사는 물론이거니와, 북의 급변사태시 북한 지역 진주 및 접수, 그리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중국의 지원이 보장되지 않는 한 기대하기는 어려운 입장인 것은 자명할 것이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중국과 경제적 동반자 관계를 아무리 구축하고 무역 교류가 1위 국가라 하지만 중국은 경제적인 면에서 실리만 취할 것일 뿐 북에 대한 혈맹의 관계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외교부는 김정일 군사위원장의 중국 방문에 대해서 장썬선 주한 중국 대사를 불러 '중국의 책임있는 태도'를 촉구하면서 불쾌감을 표출한 것으로 보도되었고, 중국 언론 중 한 언론의 인터넷판에 지난 6일 게제된 기사는 '한국 정부와 언론이 천안함 사건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중을 연계시켜 중국을 비판'하는 것을 반박하는 기사를 실었다. 또 중국의 외교부 정위 대변인은 '김정일 군사위원장의 중국 방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엄연히 내정간섭'이라며 불쾌감을 표출하였다. '어떤 국가의 지도자를 받아 들이는 것은 중국 내부 문제이며 주권의 범위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어떤 중국인 학자는 '한국이 중국에 대해 천안함 사건의 심판 역활을 기대한 것은 유치한 발상이며 한국이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자신의 관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또 중국은 '천안함 북 배후설은 언론 추측'이라며 북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이에 청와대는 한.중간의 이상기류를 잠재우려 애쓰는 가운데 한국의 언론과 여당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당의 정몽준 대표는 동북아 안정에 대한 중국측의 태도에 불만썩인 발언을 내놓았고, 황준하 의원은 '천안함 해결전 6자회담은 없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이는 한마디로 대중외교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전략이 부재하고 근시안적이며 경제적인 동반자만 구축되면 모두 우리쪽으로 끌여 즐일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안이한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미국이 한국에 미군을 배치하고 있는 자체가 불쾌하고 불안할 것이며 미국의 미사일 사정거리안에 위치한 북경의 리스크는 중국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사안일 것이다. 미국도 이러한 중국의 속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며 중국의 심장부를 근거리에서 겨눌 수 있는 지정학적 잇점이 있는 한국과 일본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고민은 북한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 자신들의 발전을 따라주지 못하고 잇다는 점이며 최근 미사일 및 핵개발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북한이 쉽게 자신들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한을 그들의 위성국가로 완충지대를 둠으로써 외세의 침략에 북한을 이용하려는 점이다. 

 

이번 천안함 사건이나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방중에 대해 한국 정부와 여당, 언론들이 왈가왈부 하는 자체가 그들의 주권 침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대통령이 후진다오 주석을 만나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한국, 졸부가 어느날 갑자기 부자가 되어 큰소리치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여 안타까운 마음이다. 우리는 대중 전략이 이처럼 근시안적이고 지혜롭지도 못하며 원대한 미래전략을 구상하여 추진할 수 있는 머리도 없고 혜안도 없는 나라인 것인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자.

  

중국의 대한반도 전략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

북한군의 남한 침공 이틀후, 그리고 중공군 개입 3개월 전인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으로부터 대만을 보호하기 위해 대만해협으로 미해군 제7함대를 급파하였고, 같은 해 8월 4일, 마오쩌둥은 소련 정치국에 중화인민의용군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보고하였다. 8월 20일 주언라이 총리는 UN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나라이므로...중국인은 한반도 상황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으며 중립국 외교관을 통하여 "중국의 안전을 위하여 UN의 한국전 개입을 방해할 것"이라 미국에도 통보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UN을 협박하기 위한 뻔한 시도"로 결말을 내렸다. 1950년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다음날, 소련 정치국은 중공군 개입을 승인하였고 후에 중공군은 미군 폭격기가 북한을 향하던중 중공의 영공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라 주장하였다.

 

9월 모스크바에서 주언라이 총리는 외교와 개인적 노선을 동원해 스탈린에게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지체함에 따라 마오쩌둥도 예정을 변경하여 한국전 개입을 1950년 10월 13일에서 19일로 연기하였다. 소련군은 또한 공중엄호를 서방공군과의 전쟁경험을 위한 전선에서 100km 이상의 거리에서만 허용하였으나 이용된 미그-15s기는 UN의 제공권에 큰 위협을 가하였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군 다음 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중공인민의용군의 야간진군과 오전 5시30분 이전까지 전개된 대공위장술, 그리고 이어진 주간진군팀의 다음 야영지 수색은 미 항공수색의 의용군 포착을 어렵게 하였다. 주간진군동안 항공기가 포착되면 사라질 때까지 병사들은 미동을 정지한 채 있도록 하였고 그러한 전략은 3사단을 만주의 안퉁에서 한국전쟁지역까지 460km를 19일동안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고 반면 산악지대를 행군로로 선택한 다른 사단은 18일동안 29km를 행군하는데 그쳤다.

 

그 동안, 1950년 10월 10일, 제 89전차대대는 제1기갑사단에 포함되는 등 UN군은 기갑을 강화하고 있었다. 10월 15일, 비교적 약한 북한인민군의 저항에 맞서 제7 기갑연대와 제 70전차대대는 남천잠을 획득하였고, 10월 17일 평양으로 가는 주로의 우측측면으로 우회하여 황주를 공략하였다. 이틀 후, 제1기갑사단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1950년 10월 19일, UN군은 북조선 공략에 성공하였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가능성이 적다고 의사를 밝혔고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운산전투 

두 번의 작은 충돌 후, 1950년 11월 1일 북한진영 깊숙이에서 첫 번째 대규모 미-중 전투가 벌어졌다. 수천의 인민의용군이 곳곳에 산재한 UN지휘부대를 북쪽, 북서쪽, 서쪽 3개 방향에서 삼지창 전법으로 포위, 공격하여 방어태세의 측면을 괴멸시켰다. (운산전투). 11월말, 서부진영 청천강 유역에서 인민의용군은 몇몇 한국군 사단과 남아있던 UN군의 측면을 괴멸시켰고 UN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터키여단이 중국국경의 군우리에서 방어에 성공함에 따라 미8군은 퇴각로를 확보하였고 중화인민의용군의 진격을 4일간 늦출수 있었다. 동부진영의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삼지창 전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미 제7보병사단의 연대전투단(3000명)과 미 제1해병사단이 5군단의 지원사격하에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는 10배에 달하던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으로 미군측이 15,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초창기의 전방 인민의용군은 중화기나 승무원 탑승의 경기갑이 전혀 없었으나 빠르게 그들의 이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전법은 50명 규모의 소대에서 200명 규모의 중대등 작은 규모의 부대를 침투시켜 여러 분대로 나눈 후, 한 분대가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사이 남은 분대는 전방과 측면을 합동공격하는 것이었다. 방어세력이 결국 패하여 후퇴할 때까지 전방위 공격을 줄기차게 한 후 중공군은 다음 소대위치의 측면으로 몰래 이동하여 같은 전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대공세 국면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경보병이 박격포 이상의 중장비의 도움 없이 공격을 주도하였고 이들 중공군은 수십 년 동안 중일전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을 통해 잘 훈련된 모습을 보였으며 야간기습에 특히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군사위장에 능통하였다. 순찰대는 UN군의 위치추적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들 부대의 후면으로 이동, 퇴각로를 차단 한 후 삼지창 전법으로 전방위 대공세를 가하는데 뛰어났다. 또한 하치 시키라 불리는 전법도 구사하였는데 이는 V자 진형을 구축하여 적군을 진형 가운데로 끌어들인 후, V자의 입구를 막아 퇴각로를 차단, V자 좌우측면이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법이었다. 이러한 전법은 온정, 운산 그리고 초산 전투에서 큰 성공을 보였다.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1 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 이 후퇴작전이 1.4후퇴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국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유엔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국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국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국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11월 말, 인민의용군은 UN지휘본부를 북동부 북한에서 38선 이남까지 밀어내었다. 북한으로의 진격때보다 빠르게 퇴각한 UN군은 북한 동부해안에 위치한 흥남시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구조를 기다렸다. 1050년 12월, 193척 분량의 UN군과 물자(군인 105,000명, 민간인 98,000명, 차량 17,500대, 물자 350,000톤)이 탈출하여 부산에 정박하였고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성명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서울함락

1950년 12월 장진호와 같은 곳에서 벌어진 공산진영의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격에 부딪친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12월 4일에 평양을 철수하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흥남철수라고 한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국 1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흥남에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1·4 후퇴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참전에 따라 연합군이 대규모로 퇴각한 사건으로 1951년 1월 4일은 서울을 공산진영에 빼앗긴 날이다.

 

인민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이승만 대통령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은 제 3단계 공세(중공군 동계 대공세)에 들어가 UN군을 비밀리에 포위, 공격하는 야간전술을 펼쳤다. 공격에는 요란한 나팔과 징이 동원되어 작전전달과 적군을 혼란시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전법을 처음 목격한 UN군은 중공군 동계작전에 압도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게다가 미8군의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 군의 사기저하를 불러오게 되고 이러한 차질에 맥아더 장군은 중국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이로 인해 발생한 방사선 낙진지역을 중공군의 보급로 차단에 이용할 것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곧 워커장군의 대체로 투입된 카리스마적인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후속 사령관으로 임명된후 유혈이 낭자했던 미8군은 곧 다시 회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에 중국 공산당이 투입한 군사는 92만6천명이나 되어 UN군과 한국군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였다.

 

서울 재수복

1월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인민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소모전을 전개하다가 휴전으로 이어졌다.

 

한국은 아직 평화시대가 아닌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전략이 없는 대중 외교

 

북한 김정일 군사위원장의 중국방문

김정일의 중국방문이 천안함 사건의 긴장이 확산되어 중국에까지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한 중국의 긴급 요청으로 이루어 졌다고 열린북한방송이 3일 북한 고위급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방송은 “김정일 역시 천안함 침몰 사고가 북한의 소행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어 국제 사회의 압박이 심해질 것을 우려해 북중 공조를 강화하기 위해에 방중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중국 방문 첫 기착지 다렌에서 차에 오르려는 김정일 ⓒ 연합뉴스

소식통은 “지난 3월말 예정되었던 김정일의 방중 목적은 후계자와 핵문제, 6자회담, 경제문제 등 중장기적인 문제들이 주된 의제였다”면서 그러나 천안함 사건으로 김정일 방중 의제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중국이 천안함 사고 이후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어 중국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김정일의 방중을 전격적으로 요청했다는 것. 즉 중국은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어 중국이 북경올림픽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하이 엑스포의 성패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김정일 방중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소식통은 또 김정일이 중국의 방중 요청을 수용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석이조를 노렸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일 입장에서 방중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두 가지”라며 “중국의 상하이 엑스포 기간 동안 서해에서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과 천안함 사태가 북한 소행으로 결론이 나려고 하는 상황에서 북한 고립이 심화될 것을 우려하여 북중 공조 강화를 통해 고립을 돌파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식통은 “천안함 문제가 김정일이 방중시기에 중국과 논의할 사안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 문제가 김정일의 전격적인 방중의 결정적 동기로 작용했다”며 “방중 기간은 6박 7일 이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정일이 묵은 다렌의 푸리화 호텔 ⓒ 연합뉴스

  

한국의 대중외교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중관계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라는 수사에도 불구,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북한 및 미국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한국과 중국이 서로를 의식하고 했던 행위를 시간 순으로 돌아보면 흡사 냉전 때를 방불케하는 것도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한국과의 교역 1위 국가인 중국과의 관계보다 미국과의 군사동맹 복원에 주력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대통령은 2008년 5월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을 방문해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전략적 군사동맹 강화에 합의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과의 친밀감을 과시하며 한·미관계를 '복원'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 건설적으로 개입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 21세기 동맹의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한국은 이 회담에서 미국으로부터 북대서양조양기구(NATO)에 준하는 최신형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권리도 얻었다. 중국으로선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중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한·미 군사동맹은 냉전에서 비롯된 역사적 산물"이라고 논평했다.

2009년 5월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한 뒤 중국 역시 한국과 미국의 북한 제재 움직임에 큰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중국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해선 한·미와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달 뒤 이 대통령과 버락 오마마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고 '한·미동맹 미래비전'을 발표하면서 '핵확장 억지력'(확대된 핵우산 개념)을 명문화하자 중국의 대응이 달라졌다. 핵실험을 한 북한을 경제적으로도 봉쇄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다이빙궈 외교담당 국무위원, 원자바오 총리를 잇달아 북한에 보내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한국과 미국이 북한의 붕괴에 대비한 계획을 마련하고 있다는 설이 흘러나왔다. 중국은 양광례 국방부장을 북한에 보내 북·중 간 군사협력 강화를 천명했다.

최근에는 지난달 11일 이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촉구하며 "중국이 군사·경제 면에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니 한·미 FTA 비준은 중국 변수를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제안으로 해석될 소지가 농후했다. 그로부터 4주 뒤 중국은 천안함 침몰 사고에 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바람'을 거슬러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문을 수용했다.

이처럼 양측이 무언가 어긋나 보이는 행동을 주고받았을 때에 그 뒤엔 어김없이 미국 변수와 동북아 안보 이슈가 자리했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중국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대북 및 외교 정책 기조가 중국의 국익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판단했을 때에 불거졌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아직 우리는 중국이 한국에 대해 갖는 비중에 비해 중국을 잘 모르는 편"이라며 "앞으로 대중관계에 더 많은 외교 역량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