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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시대의 흐름

연초엔 사장님, 지금은 실직 채무자 신세...

 

 

연초엔 사장님, 지금은 실직 채무자 신세

기사입력 2008-12-30 18:33 |최종수정2008-12-30 23:29 기사원문보기


ㆍ경기침체 직격탄… 어느 중산층 가정의 몰락

최모씨(45)는 자신의 삶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이토록 바뀔지는 상상도 못했다. 섬유수출을 하는 소규모 업체를 운영하던 그는 그럭저럭 살 형편은 되었다. 집도 가졌고, 재테크를 할 정도의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올해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그에 따른 경기침체는 그의 삶을 한순간에 바꿔놓았다. 사업은 더 이상 끌어갈 수 없게 됐고, 믿었던 펀드는 빚만 남겼다. 빚을 갚으려고 내놓은 아파트는 팔리지도 않는다.

지금 그는 ‘사장’이 아니라 ‘실직한 채무자’로 전락했다.

불과 3개월 전만 해도 최씨는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으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시골에서 상경해 고생도 했지만 조그맣게나마 사업을 일으키고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그가 집에 주는 한 달 생활비는 300만원 정도. 이 중 사교육비로만 200만원가량을 쓸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다. 두 아이 모두 아토피가 심해 유기농 식품만 사먹였지만 부담은 크지 않았다. 미래의 꿈은 외국어에 소질 있는 아이들을 위해 해외로 투자이민을 가는 것이었다.

1년쯤 전부터 중국산 저가섬유에 밀려 해외 거래처가 줄어들었지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신혼 때 산 집 105㎡짜리 아파트값은 하루가 다르게 상승해 7억원까지 올랐다. 중국 등에 투자하는 펀드는 원금의 두 배 가까이로 불어났다. 내친김에 중국은 물론 러시아, 브라질 등 원자재 펀드와 국내 우량기업, ‘인사이트 펀드’에까지 대출을 받아 2억원을 투자했다. 사업이 부진한 것을 여기서 만회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신기루처럼 한꺼번에 사라져버렸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140달러를 넘보던 올 상반기 그는 사업을 접어야 했다. 원료값은 오르는데 경기가 나빠지면서 판로가 막혀 이익을 남길 방법이 없어졌다. 펀드에서 돈을 찾아 집에 줄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했지만 ‘반 토막’ 펀드로는 은행 빚도 갚을 수 없었다. 결국 지난 9월 아내에게 “은행 대출이자도 갚기 힘든 상황이다”라고 고백했다.

다행히 아내는 “집을 팔아 빚을 갚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를 위로했다.

그는 생각했다. ‘집값이 7억원까지 나갔으니 팔아서 아파트 담보대출과 주식대출 이자 등을 합해 3억5000만원을 갚고 나면 3억원은 남겠지. 서울 변두리에 1억5000만원 정도 하는 집을 사고, 나머지 돈으로 뭐든 해봐야지.’

그런데 현실은 전혀 딴판이 돼 있었다. 7억원 하던 집이 4억5000만원에 내놔도 팔리지 않았다. 지금 그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가지고 있는 카드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

최씨는 한 달 전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구립 어린이집에 3~4시간씩 시간제 보육을 신청했다. 사교육도 모두 끊고 동사무소나 도서관 등에서 여는 1000~5000원짜리 강좌를 골라 듣게 하고 있다. 전에는 아이들에게 1인분에 6000원 하는 ‘남산 돈가스’를 사먹였지만, 지금은 할인점에서 4인분에 5800원 하는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는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못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주식으로 망한다는 얘기를 들어봤지만 제가 피해자가 될 줄은 몰랐지요”라고 말했다.

최씨의 아내는 3개월 전부터 보습학원 강사로 나가 한 달에 80만원씩을 생활비로 보태고 있다. 최씨도 얼마 전 부동산중개사 시험에 합격한 뒤 인근 부동산중개소에서 ‘월급 없이’ 일하면서 업무를 배우고 있다. 그는 “하루빨리 경기가 풀려 내년에는 빚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했다.

<정유미기자 youm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