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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칼럼, 봉준호의 <괴물>

[김정란 칼럼] 봉준호의 지우개 <괴물>, 치밀어오른 분노 또는 짜증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6-08-19 10:12]    
▲ 영화 <괴물>의 포스터 
영화 <괴물>이 1천만 관객을 향해 가파르게 상승중이다. 이제 한국 관객은 1천만이라는 숫자에 그닥 놀라지 않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1천만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괴물처럼 무시무시하다. 거기에 여름이라는 공포영화 성수기에 맞추어 개봉된 장르영화(또는 그렇게 분류할 수 있는)라는 점, 동시에 600개 이상의 상영관을 확보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괴물>은 아마도 식은 죽 먹듯 1천만 명의 혼을 후루룩 빨아먹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센세이셔널한 신문이 “봉준호가 봉을 잡았다”고 표현한 이 영화는, 영화제작자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감독 자신에게는 ‘봉’이 아니라 ‘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로서는 이 영화에 걸었던 기대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더욱 실망이 컸다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괴물>은 내가 기대하던 영화는 아니었다.

한달이면 영화를 수십 편 정도 보는 것 같다.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개는 비디오나 DVD, 또는 PMP의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이 고작이지만 말이다. 그 수많은 영화 중에서 만족스러운 영화는 지극히 드물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괴물>을 특별히 기다렸다. 영화 시사회에서 서구 비평가들에게서 받았다는 호평, 그리고 <살인의 추억>에서 확인했던 감독의 역량 등이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나를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려 놓았었다. 나는 영화가 개봉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살인의 추억>에서 확인한 감독의 천재성에 대한 경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나는 너무나 힘들어서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재미있어 하며 쿡쿡 웃으며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뒷모습이 편안해 보이는만큼 더더욱 힘들었다. 마음속에서 분노같기도 하고 짜증같기도 한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하기는 비슷한 감정을 <살인의 추억>에서도 조금 느끼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글쎄, 모르겠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감독이 어떤 근원적 모순(그런데 정말 근원적인가?)의 상황을 철학적 아포리아로 깔끔하게 포장했기 때문일까?

나는 사실은 오랫동안 <살인의 추억>을 보지 않았었다. 그것이 화성연쇄살인을 다루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영화에서 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신뢰를 잃었기때문에 폭력을 주제로 한 한국영화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한국 영화에서 폭력은 화면 밖으로 줄줄 흘러나온다. 그것은, 아마도 폭력이 우리에게는 가까운 역사적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신화적/근원적 폭력이 될 수 없다.

<친절한 금자씨>의 종교적 설정이 얼마나 어설프게 느껴졌는지 생각해 보라. 모든 폭력은 무지막지하게 정치적으로 있었고, 지금도 있다. <친구>에서도 너무나 질려 버렸었다. 여성과 관련이 되면 더더욱 힘들었다. 한국영화에서 폭력은 아주 종종 정치적 맥락 안에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폭력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정리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인 것 같다.

4·19와 5·18의 발포자들은 역사적으로 단죄받았다, 그러나 실제적 힘은 여전히 그들의 손 안에 있다. 그들은 때만 되면 ‘정통성’을 들먹이며 손가락질을 해댄다. 박정희의 폭력이 ‘정통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정치적 알레고리와 분리되지 않은 채 범벅으로 난무하는 폭력은 견디기 힘들다. 모든 발길질이 허공을 차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피는 공연히 괜히 흘러내린다. <공공의 적>처럼 맥락을 명쾌하게 정리한 경우에는 그나마 조금 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뒤늦게,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다잡고 DVD로 <살인의 추억>을 보았다. 그리고 아낌없는 경의를 보냈다. 그 작품은 내 생각에는 한국의 10대 영화 안에 꼽힐만큼 우수한 영화였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그 불면은 불쾌하지는 않았다. 무수한 아포리아들로 파이는 내면. 그러나, 견딜 수 있었다. 그것은 투명한 성찰의 회로로 나를 안내해 가는 영화였다.

그러나 <괴물>의 봉준호는 비겁하다. 그는 지우개를 들고 정신없이 지워댄다. 그러다가 또, 혹시 자신의 진면목을 관객이 못알아챌까 봐 전전긍긍, 정치적으로 명확한 알레고리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또 정신없이 지운다. 안돼, 이 사회의 자본을 장악하고 있는 보수세력에게 운동권 편든다고 찍히면 안돼. 정치적으로 편들었다고 비난당하면 끝이야. 무릇 모든 세련된 예술적 입장이란 비정치적인 거야. 오 하느님.

<괴물>은 감독이 부정하지 않고 있듯이 ‘반미’ 코드를 전면에 부상시킨다. 처음부터 끝까지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현서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미선과 효순의 알레고리이다. ㅎ과 ㅅ의 결합, 거기에 ㄴ받침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괴물>은 미군이 한강에 흘려보낸 독극물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해진다. 그리고 진실을 외면하는 사팔눈의 미군 책임자. 거기에 바이러스의 문제는 명확하게 이라크 전의 맥락을 암시한다. 감독은 혹시 관객들이 못 알아챌까봐 이라크 상황을 편집 처리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미선과 효순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현서와 함께 괴물 속으로 끌려들어갔다가 그녀의 부활한 생명처럼 살아남은 어린이는 소년으로 대체되어 있다. 두 소녀를 괴물 속으로 집어넣는 것은 지나치게 직접적인 정치적 암시라고 여겨졌을까? ‘새로운 세대’를 암시하는 어린 존재는 왜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어야만 하는가? 미선/효순의 직접적 알레고리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바이러스 문제는 한국의 민주화 상황과 연계된 미국의 문제를 흐릿하게 지워버리기 위한 영화적 기만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괴물과 대치하는 젊은 영웅은 “민주화를 위해 몸바친” 사회적 부적응아로 묘사된다. 과연 무엇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싸가지’가 없다. 그는 타인을 배려할 줄도 모르며, 무식한 형을 타박하기만 한다. 그 운동권의 싸가지 없음은 “데모만 하다가” 이제는 돈맛을 알아버린 이동통신사 사원인 민주화동료가 젊은 영웅을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장면에서 그 절정을 보여준다. 이 명백하게 정치적인 영화에서 봉준호는 왜 하필 운동권을 중심에 등장시켰고, 그리고 허겁지겁 지우개로 지우는 것일까? 그는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괴물을 퇴치하는 가난한 가족(박정희의 이른 바 ‘한강의 기적’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연명하고 있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괴물 위에 석유를 들이부어 괴물의 멸망의 직접적 단초를 제공하는 노숙자는 이 투쟁의 민중적 성격을 분명하게 설정한다. 화염병의 등장도 이 괴물과 대치하는, 5·18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메아리이다(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감독의 지우개는 여지없이 한번 더 지울 준비를 하고 있다. 젊은 영웅의 화염병은 엉뚱한 곳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주워서 마무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비정치적이라고 선언되는 스포츠에 의해서이다. 게다가 여자 양궁선수이다. 여성의 근원적 비정치성? 글쎄, 그녀가 늘상 시간을 놓치는 평소의 악습을 극복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을까? 우리의 근대사는 늘 시간을 놓쳐온 역사이므로? 그러나 반전은 한번 더 준비되어 있다. 정말로, 결정적으로, 괴물을 죽인 것은 노랑머리에서 검은 머리로 변신하는 가난한 가장의 쇠파이프이다. 어쨌든, 문제를 해결한 상징은 화염병과 쇠파이프이다. 그것이 시위현장의 대명사인 것을 누가 모르랴.

그리고 매캐한 매캐한 빨간 바이러스의 산포(아마도 진중권의 용어에서 힌트를 얻었을지도 모르는)를 배경으로 괴물은 비틀거린다. 그리고 ‘빨간’ 인형은 자연의 바람을 받아 신나게 춤을 추어댄다. 그것을 레드 컴플렉스에 걸린 이 땅의 퍼랭이들에게 보내는 정치적 야유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가?

처음에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의 가난한 가장은 반쯤 노랗게 물들인 머리를 하고 있다. 그가 미처 가리지 못한 꺼먼 머리 뿌리는 흉물스럽게 솟아나와 있다. 게다가 그는 늘 술에 취해서 얼굴이 벌겋다. 그는 늘 자기 바깥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자발적인 자기 소외 상황. 자신을 미국의 이등 시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이 땅의 무수한 그 누구누구들. 그는 영화의 말미에서 자신의 본래의 까만 머리카락을 되찾으며, 얼굴의 홍조도 사라진다. 그는 괴물과 마주섬으로써 드디어 그 자신이 된 것이다. 나날의 밥벌이에 열중하는, 내 새끼를 알뜰히 걷어먹이는. 그는 ‘바이러스’의 근거없음을 발표하는 미국 당국자의 회견이 방송되는 티비 화면을 “엿먹어라” 하는 식으로 발가락으로 꺼버린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의 변두리에 조용히 내리는 눈. 우주와의 대면 안에서 근원적으로 추구될 새로운 존재.

한국의 젊은 감독들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해석을 언제까지 피해 다닐 것인가? 그들은 악착같이 정치적 코드를 피해 간다. 이 주제에 관한 한, 우리 감독들에게서는 어떤 분열증같은 것마저 읽힌다. <그때 그 사람>은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영화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세계적 층위에서 안전한 지적인 코드(반미는 세계 시장에서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의식있는 지식인으로 행세하려면 반미는 어쩌면 기본이기까지 하다)는 포기하지 않는다.

세계 시장에서 봉준호의 지우개를 알아챌 관객은 없다. 그 지우개는 한국이라는 기묘한 정치지형의 맥락 안에서만 그 의미가 확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괴물이 휩쓸고 다니는데도 도대체 공권력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묘한 설정도 ‘보편적’ 인간 조건의 틀 안에서 근원적으로 읽힐 것이다. 봉준호의 정치적 지우개를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어떤 관객들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입장을 정하지 않은 정치적 영화란 무엇인가? 차라리 순수한 장르 영화로 만드는 것이 오히려 솔직한 예술적 입장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괴물>을 딜레탕티즘이라고 본 김헌식의 해석은 정확하다.

언젠가 정면대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도망만 다닐 것인가? 언제까지 관객과 자본의 환호 뒤에 숨어서 자신의 영혼을 기만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