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강도가 신사를 협박했다. “네 돈 내놔라!”
신사가 답했다. “이러면 안 돼. 난 국회의원이야!”
“그렇다면!” 강도가 말했다. “내 돈 내놔라.”
연초에 한 잡지에서 읽은 유머 한 토막이다. “내 돈 내놔” 한마디는, 국회의원 아니라도 이래저래 나라의 녹(祿)을 먹는 사람이라면 누구이건 외면하기 힘든 의미를 갖는 말일 것이다.
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을 뜻하는 ‘공복(公僕)’이란 말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재작년 가을 미국 대학에서 ‘공보와 언론관계’란 강의를 접할 때의 일이다. 교수는 기자 생활에 이어 국방부 공보관으로 일하면서 저널리즘과 정부 양쪽을 다 경험한 사람이었다. ‘홍보(Public Relations)’와 ‘공보(Public Affairs)’의 차이가 뭐냐고 그는 물었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는 표정의 학생들에게 교수는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가’의 기준에 따라 홍보와 공보는 나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홍보담당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지만,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에서 일하는 공보담당자는 그야말로 ‘공공(公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신을 임명한 사람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이 공익에 부합되는지를 엄정하게 판단하는 도덕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 것이다.
14일 출범한 3기 방송위원회가 출발부터 삐걱거린다는 소식을 들으며 공(公)과 사(私)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의식한 정치권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른 인선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 데다 KBS, MBC, EBS의 사장과 이사 등 방송위가 직간접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하는 후속 인사가 이어지면 그 파장이 확대 재생산될 우려가 있다.
9명의 방송위원은 앞으로 3년 동안 방송의 공적 책임과 공정성 및 공익성을 유지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는다. 그만큼 대우도 상당하다. 정무직 장관급 지위를 갖는 방송위원장은 연봉 1억457만8920원을 받는다. 부위원장과 3명의 상임위원은 차관급 연봉 9500여만 원을 탄다. 5명의 상임위원은 비서를 두고, 자동차와 업무추진비도 제공받는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 일하라고 이 같은 예우를 받는가. 사법부 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에 오른 전수안 대법관의 취임사를 되새겨 본다. “저를 대법관으로 추천한 보수단체나 진보단체의 편파적 신뢰나 일방적 기대를 망설임 없이 털어 버리고 기꺼이 배반하면서 오직 국민이 갈구하는 정의의 발견과 선언에만 전념하겠습니다.”
방송위뿐 아니라 이런저런 기관들의 인사로 온 나라가 수해 뒤끝만큼이나 어지럽다. 이들 인사의 첫 단추를 끼운 사람들에게 더는 기대 같은 거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왕 자리를 맡은 사람들에겐 두 번째 단추나마 제대로 채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꼭 당부하고 싶다.
자리와 예산을 위탁한 국민을 배신하는 것은 사실 공금 횡령보다 파렴치한 범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누가 추천했든지 ‘시켜 준 그 사람’이 눈에 어른거리더라도, 눈에 잘 보이진 않겠지만 늘 당신을 주시하는 숱한 납세자를 더 무섭게 생각하며 일해야 한다고.
그게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예의’이자 ‘국민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