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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1413 : 로마 제국 1119 ( 율리아누스 황제 21 )

로마의 역사 1413 : 로마 제국 1119 ( 율리아누스 황제 21 )

 


 

율리아누스 황제 21

(제위 : 서기 361 ~ 363 )

안티오키아

서기 361년 11월 3일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어준 덕분에 율리아누스는 피를 흘리지 않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단독 황제로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한 것은 같은 해 12월 11일이었다. 그후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 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서기 362년 4월까지라는 연구자도 있고, 초여름까지라고 말하는 연구자도 있다. 어쨌든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 동쪽으로 간 것은 확실하다.

이유는 명맥하다. 페르시아와 다시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에 제국은 야만족의 침입도 없고 반란도 없어서, 로마 황제가 해묵은 문제 해결에 몸소 나설 수 있는 조건이 확실히 갖추어져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대 지도는 11세기에 모사한 것이지만, 그 원본이 제작된 것은 4세기 중엽이니까 율리아누스가 살았던 시대다. 최초의 소유자 이름을 따서 '타불라 페우팅게리아나'라고 불리는 이 지도에는 다른 도시와 다른 특별한 기호로 표시된 당시 로마 제국의 3대 도시가 그려져 있다.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티오키아다.

로마는 오늘날에도 대도시로 살아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영어로 콘스탄티노플)는 서기 1453년에 오스만터키에 함락된 뒤 터키식으로 이스탄불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그후에도 오랫동안 타키의 수도였고 지금도 오리엔트적인 삶이 넘쳐나는 도시로 건재하다.

이들 고대의 2대 도시에 비하면 안티오키아의 생명은 짧았다. 지금은 터키식으로 안타키아라고 불리고, 시리아 국경에서 30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터키의 변방 도시일 뿐이다. 옛날의 안티오키아를 생각하면 안타키아를 찿아간 사람은 모두 아연해 질 것이다.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종횡으로 달리며 서로 교차하는 도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던 도시 구조도 찿아볼 수 없고, 한복판에 몇 킬로미터나 뻗어 있던 대로도 남아 있지 않다. 양쪽에 원기둥이 늘어서 있던 이 중앙 대로는 '타불라 페우팅게리아나'의 기호로도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고, 오리엔트 제1의 도시 자리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다투던 시절에 안티오키아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도시 규모는 로마보다 작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는 훨씬 크다. 안티오키아는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 제국을 분할한 장군들 가운데 하나였던 셀레우코스가 세운 도시다. 따라서 기원전 753년에 건설된 로마보다는 역사가 짧지만, 서기 330년에 건설된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는 훨씬 오래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였던 안티오키아가 이 왕조를 멸망시킨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뒤에도 계속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방과의 교역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우선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운반되어 오는 오리엔트 물산의 집결지로 가장 적당했고, 바로 옆을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오론테스 강은 배가 충분히 다닐 수 있었고, 20킬로미터만 내려가면 지중해로 나갈 수 있었다. 교역으로 번영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주민도 통상 도시답게 코스모폴리턴이었다. 그리스계 주민이 지배층과 중산층을 형성했고, 이익이 날 만한 도시라면 어디서나 정착하는 성향이 어느 민족보다 강한 유대인도 옛날부터 유명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주민들 가운데 중하층이나 하층은 원주민이라고 해야 할 셈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리엔트 색이 짙은 국제 도시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중앙 대로에 서 있는 원기둥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원기둥이 과세 기준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안티오키아에 원기둥이 길게 서 있는 대로는 지중해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그것은 바로 안티오키아가 가진 재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시 안티오키아의 인구는 노예까지 포함하여 거의 100만 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로마보다는 적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는 많았다. 로마 제국은 이 오리엔트 대도시에 자치권을 인정했고, 200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 안티오키아의 의회가 지방자치단체 수준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있었다.

기독교에 기울지 않고 평생을 이교도로 산 무인이자 문인으로서 고대 로마의 최후의 역사가라고 불리는 암마이누스 마르켈리누스도 이 국제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그리스계 안티오키아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