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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414 : 로마 제국 1120 ( 율리아누스 황제 22 )

로마의 역사 1414 : 로마 제국 1120 ( 율리아누스 황제 22 )

 


 

율리아누스 황제 22

(제위 : 서기 361 ~ 363 )

안티오키아 (계속)

이 안티오키아의 번영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율리아누스 시대부터 100년 뒤에 페르시아군의 침입과 지진 피해가 겹쳐서 일어난 때부터였다. 그렇다고해서 페르시아군의 화공과 지진이 5세기에 유난히 집중된 것은 아니다. 불타고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주민들의 의욕과 재력이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도 황제가 재건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황제의 원조가 만능인 것은 아니고 지방자치단체나 개인이 자구 노력을 지원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 로마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인재든 천재든 불행을 이겨내고 북구하는 작업은 주민들의 의지와 재력에 달려 있었다. 5세기의 안티오키아는 그런 것이 쇠퇴한 때문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쇠퇴하던 안티오키아가 도시로서 숨통이 끊긴 것은 서기 638년에 이슬람교도인 아랍인에게 정복당했을 때였다. 안티오키아의 중요성은 고대 로마의 내해였던 지중해와 통해 있었다는 데 있었다.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가 대립한 중세의 지중해는 한 문명권의 안마당이 아니라 두 문명의 경계로 바뀌어버렸다. 그래서 고대와 함께 안티오키아의 생명이 사라진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 안티오키아도 율리아누스가 살았던 4세기에는 아직 로마 제국 동방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찿아올 쇠퇴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코스모폴리턴인 이 도시 주민들, 특히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골수까지 철저한 상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지배자가 누구로 바뀌어도 자기들은 계속 살아 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자칫하면 지배자의 노력을 비웃는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 좋게 말하면 세상 물정을 잘 알아 어떤 일에도 냉정하게 바라보는 어른이고, 정직하게 말하면 교활한 것이 안티오키아 사람 성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젊고 정열적이고 이상주의자인 율리아누스와는 원래 성미가 맍지 않았다.

율리아누스의 안티오키아 체류는 처음부터 불행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안티오키아에는 북동부 일대에 곡창지대를 갖고 있었다. 흉년이 든 해에도 다른 도시라면 황제의 식량 안보에 의해 식량 부족에 빠질 위험은 없다. 그러나 안티오키아는 대도시로 식량을 보장하는 것이 공공의 임무로 여겨진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와는 달리 상업 도시인 안티오키아는 정치에 속하는 식량 안보까지도 경제 논리에 맡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에 주변 지역의 밀 수확량이 흉년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흉년이 든 것이 알려지자마자 시장에서 밀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이면에는 투기꾼들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투기는 고대에도 있었는데, 영어로 투기는 'speculation'의 어원인 라틴어 낱말인 'speculatio'이다. 원래는 철학적인 용어로 '심사숙고'한다는 뜻이다. 인생의 진리를 심사숙고하면 '철학'이되고 돈벌이의 진리를 심사숙고하면 '투기'가 된다.

그리스 철학사의 첯 주자는 당시의 이오니아 지방이라고 불린 소아시아 서해안의 밀레투스에서 태어난 탈래스라는 것이 정설인데, 기원전 7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살았던 이 철학자는 유쾌한 에피소드를 남겨준 점에서도 현세적이고 지중해적이다.

한번은 깊은 생각에 잠겨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가다가 그만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철학자는 실제로 아무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