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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로마의 역사 1378 : 로마 제국 1083 ( 콘스탄티우스 황제 31 )

로마의 역사 1378 : 로마 제국 1083 ( 콘스탄티우스 황제 31 )

 

 

콘스탄티우스 황제 31

(제위 : 서기 337 ~ 361 )

갈리아의 율리아누스 (계속)

서기 355년도 거의 저물어갈 무렵, 부제 울리아누스는 비엔에 도착했다. 로마 시대에는 비엔나라고 불린 이 도시는 그르노블에서 리옹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도시로발전했기 때문에, 리옹을 대신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율리아누스가 도착한 곳도 이름뿐인 황궁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가 개인적으로 데려가는 것을 하락받은 수행원은 네 명뿐이었다.

수행원 네 명은 하인 두 명에 주치의 한 명, 그리고 사서 한 명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주치의와는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적어도 일상생활이 외롭지는 않았다. 밀라노를 떠날 때 다른 것은 다 검사를 받았지만 책(당시에는 두루마리)만은 검사도 받지 않고 통과된 모양이다. 사서는 그 많은 책을 맡아서 관리할 뿐만 아니라 서기와 비서도 겸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황제가 어딘가로 행차를 하려면 궁정신하와 하인들로 이루어진 큰 무리를 거느리고 이동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율리아누스의 작은 궁정은 그를 맞이한 사람들에게 그의 지위가 아주 낮다는 인상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율리아누스가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데려갈 수 있었던 수행원 네 명뿐이었다. 나중에 율리아누스의 초빙을 받고 온 철학자 두 명이 추가되었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다. 갈리아에 갈 때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붙여준 궁정신하가 몇 명 있었지만, 그들은 정제의 첩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안전했다. 비엔에서 부제를 맞이한 사람들도 대부분 방심할 수 없는 상대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환관 네트워크는 갈리아에도 거미출처럼 쳐져 있었다.

마그넨티우스 휘하의 기병대장이면서 무르사에서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그 야만족 출신 장수를 버리고 콘스탄티우스 쪽으로 돌아선 실바누스의 불행한 최후가 좋은 예에 속한다.

실바누스는 콘스탄티우스에게 공을 인정받아 갈리아를 담당하는 기병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런데 4년도 지나기 전에 이 프랑크족 출신 장수가 제위를 노리고 있다는 첩보가 황제에게 들어왔다. 콘스탄티우스는 귓가에서 속삭이는 환관의 말을 모두 곧이듣고, 마그넨티우스를 타도했나 했더니 또 야만족 출신이냐면서 화를 냈다. 황제가 자기를 제2의 마그넨티우스라고 말했다는 보고를 받은 실바누스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퀼른에 틀어박혀 고민하다가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제국 서방에서는 역전의 용장인 실바누스인만큼, 그를 토벌하려면 비슷한 실력을 가진 동방에서 역전의 용장이었던 우르시키누스를 일부러 불려들여야 했다. 실바누스가 처형된 것은 율리아누스가 비엔에 들어가기 석 달 전이었다.

이것으로 전선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또하나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폐쇄적이고 의심많은 성질인데다 전제적 절대군주인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진짜냐 가짜냐에 관심없이 반란은 싹부터 잘라버려야만 제국의 안녕이 보장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실을 따져보면, 삼형제 가운데 그 혼자만 오랜 치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싹부터 없애버리는 방식으로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거듭해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형까지 살해당한 율리아누스는 열세 살 연상의 이 최고 권력자가 쳐놓은 함정을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했다.

율리아누스의 갈리아 생활은 감시의 눈에 둘러싸인 느낌으로 시작되었지만, 소수나마 그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도 있었다. 갈아에 온 뒤 율리아누스는 모든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좋은 의논 상대를 만났다.그 사람은 갈리아의 군무장관인 플라비우스 살루티우스였다. 부제가 울리아누스가 총사령관이라면, 그 밑에서 실제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황궁 내부의 음모와는 인연이 먼 무인 기질의 사람이고, 군무에 완전한 풋내기인 율리아누스가 책에서 얻은 지식을 실전 무대로 옮겨서 설명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쨌든 율리아누스가 부임지가 갈리아라는 이유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도 공부했다고 한다. 공정한 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살루티우스 덕분에 24세의 율리아누스는 군무만이 아니라 내정끼지 포함하여 갈리아의 실상을 배우게 되었다.

부제로서 율리아누스가 맡은 지역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와 히스파니아였다. 안전보장 면에서 말하자면, 브리타니아와 히스파니아는 갈리아의 안전을 회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었다. 제국 서방의 속주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 갈리아의 동쪽 경계인 라인 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북방 야만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브리타니아와 하스파니아는 일단 제쳐놓고 갈리아의 안전 회복에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했다. 그리고 힘을 집중해야 할 지역도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북해로 흘러드는 라인 강 양쪽으로 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