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향기를 맡으며 자전거길을 달리다 2
강촌 - 충의대교 - 가정리 충효로- 의암 류인석 기념관 - 방하리 '술어니 고개'(새적산 461.4미터) - 북한강변길 - 가평 - 청평 - 새터 - 마석 - 호평동 주행 (1차)
강촌 내륙 주행로 약도(1차, 2차)
자전거 주행은 차량이 적고 사람도 적은 한적하고 잘 포장된 조용하고 주변 풍광이 좋은 길을 다니는 것이 안전에도 좋고 주변 경치를 즐기기에도 좋다.
춘천 의암호 주변 둘레길을 가려면 복잡한 길에다 산책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달리기에도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의암호 둘레길은 주변 풍광은 절경이지만 항상 안전에 주의를 하지 않으면 사고를 내기 쉽다.
그리고 벗고개와 서후고개, 중미산 고개를 가려면 공도를 타고 고개를 넘어다니기 때문에 갈 때는 항상 불안감을 가지고 가야 한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젊은이들은 겁없이 달리지만, 나이든 나로서는 혼자 다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다. 지나가는 차량의 운전수들이 대부분 정상이지만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비정상적인 사람을 만나면 사고를 당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공도를 다니면 사고 발생 확률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량과 사람이 적은 한적하고 풍광이 좋은 길은 공도지만 위험을 무릎쓰고 찿아다닌다. 그래서 2년 전에 강촌에서 양평 방향으로 가는 내륙길을 여러 곳을 다녀보았지만, 이번에도 가보지 않았던 코스를 선택했다. 바로 강촌에서 소주고개를 넘어 후동리 - 충의 대교에서 우측으로 가면 가정리로 가는 충의로다. 충의로에서 방하리 고개를 넘어 북한강변으로 넘어와서 가평으로 올라와서 가평 대교에서 경춘 자전거길과 만나게 된다. 지난 4월 8일 이 길을 주행했다.
강촌역 뒤로는 봉화산(486.4미터), 검봉산(529.6미터), 안산(310.2미터), 뱀용산(228.9미터)이 둘러싸고 있어 내륙으로 가는 도로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유일한 도로망이 소주고개를 넘어 후동리로 넘어 가는 길이 403번 도로다.
이 도로는 발산리에서 좌우로 갈라지는데 좌측 방향으로 춘천, 홍천 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는 충의대교로 가는 길이다. 충의대교를 지나 모곡리로 가는 길은 양평으로 가는 방향의 길이지만 충의대교 입구에서 우측으로 갈라지는 도로가 가정리로 가는 충효로이다.
충효로를 가다보면 '의암 류인석 기념관'이 나온다. 기념관을 지나 충효로를 계속 가다가 남면 일반산업단지 근처 가정교 다리에서 좌측으로 방하리로 가는 길이 나오고 우측으로는 문배 고개로 가는 길이 나온다. 1차는 방하로를 따라 방하리 '술어니 고개'를 넘어 북한강변으로 나가 가평으로 가는 코스를 주행했고, 2차는 문배 고개를 넘어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가정리에는 한말 독립투사들을 많이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다. 그래서 홍천강의 대교도 '충의대교'라 부르고 가정리 도로도 '충효로'로 명명하고 있다. 이런 외진 시골에서 많은 독립투사들이 태어나 '충효의 고장'이라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혀 몰랐던 의암 류인석에 대해 가정리에 있는 '의암 류인석 기념관'을 보고 그 분에 대해서 좀 알아보았다. 다음은 그 분에 관해서 사전에서 찿아본 내용이다.
의암 류인석 소개
1842년, 강원도 춘천부( 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출신. 춘천 출신이지만 주로 제천 등지에서 활약을 했기 때문에 제천시에서도 한방 도시와 함께 많은 홍보를 하는 인물이다.
의암 류인석 기념관 입구 전경
아버지 유중곤(柳重坤)과 어머니 고령 신씨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인 유중선(柳重善)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이후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화서 이항로와 교분을 맺고 있던 터라 선생은 화서 문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화서학파의 위정척사, 존화양이 사상에 심취한다.
강화도 조약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47명의 화서학파 인물들과 함께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의암 류인석 기념관 전경
1893년에 제천 장담(長潭 : 현 봉양읍 공전리 장담마을)으로 이사했으며, 이곳이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 활동의 근거지가 된다. 이후 을미사변이 터지고 단발령까지 겹치자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유인석 역시 이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제2차 의제 개혁 직후 '변고'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1895년 5월 2일, 3일 양일간에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장담에서 대규모의 강습례와 향음례를 거행하면서 사실상 의병 항쟁의 준비 단계를 밟는다.
유인석의 문인들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년 1월 12일, 김백선의 포군을 주축으로 경기도 지평에서 거의한 뒤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였다. 이후 단양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일시적으로 격퇴하였으나, 반격이 지속되자 유인석은 이들을 영월로 모두 모이게 하였고, 여기서 의병들의 간청으로 의병장에 오르게 된다.
이후 충주성을 점령하고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을 중앙의 명을 받아 단발령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살해하였고 제자인 이범직을 시켜 단발령을 시행하던 천안군수 김병숙도 살해했다. 그다음엔 단발령을 시행하던 평창군수 엄문환도 살해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지쳐 충주성을 버리고 제천으로 퇴각했다. 이후 단발령이 철회되고 김홍집 내각이 축출되자 거의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전언이 내려왔다. 그러나 정부가 특히 일제 침략 세력이 완전히 구축되지 않는 한, 또한 망국 개화 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의병 항전을 계속할 것이라며 항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제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는 제천성을 상실했다. 이후 의병들을 이끌고 소규모 전투를 행하면서 서북으로 간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관군의 압박이 이어졌으며, 이후 서간도로 망명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의병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다. 일제의 영향력이 없다는 것도 좋은 이유였지만, 동시에 유인석은 청의 군사적 원조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간도에서 무장 세력은 불법인지라 그곳 관리는 무장 해제를 요구했으며, 결국 유인석은 9월 28일 혼강(琿江)변에서 의병진을 해산한다.
1897년 3월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으나 곧 다시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다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향음례, 강습례를 수시로 열어서 존화양이 의식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취시켰다. 1906년, 31대 연성공 쿵링이의 지원으로 청나라 망명을 추진했으나 그의 다릿병이 심해져서 포기하였다.
후세인의 평가는 다소 부정적인 면도 있다. 유교 사상이 강하여 평등과 개혁 사상이 약하고 평민을 무시하는 태도로 지원군 문제로 상관에게 항의하는 의병 지도자를 죽인 경우, 의병이 점령한 지방에서 삭발령을 집행한 지방 관리를 무참하게 처단한 경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기념관 주차장
충효로 전경. 방하리 고개로 가는 길
기념관 주변 가정리 일대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 모습이다. 길을 따라 주변 일대는 농지가 많아 부유한 지방이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독립투사들이 많이 배출된 모양이다. 이때 쯤 밭갈이는 물론 도로 옆에는 비료 포대가 쌓인 것이 보이는 모습이 봄철 영농이 한창이다.
산천 초목들이 파릇한 새 순을 내밀기 시작하고 봄꽃들이 곳곳에 피어나 있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술어니 고개를 접어드니 독립투사들이 묻혀 있는 묘지들이 보인다. 지나다니는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주변 풍광을 즐기면서 음악을 들으며 달리니 즐거움에 대한 행복감이 절로 솟아오른다. 경제적 여유가 넘치면 인간은 허영과 허세가 남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들이 해외 여행을 많이 간다. 난 능력이 미천하여 해외 여행을 가지는 않았지만 이런 즐거운 풍광을 어디에다 비하랴.
남들이 가니 나도 가야하고 남들이 하니 나도 하는 줏대 없는 인간들이 대부분이다. 옆 집이 캠핑을 가니 자식들의 성화에 나도 가야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한때 캠핑 장비가 날개돋히듯이 팔리고 점차 각종 캠핑 장비들이 개발되어 남이 장만하면 나도 장만해야 하는 등 수백만 원을 들여 장비를 마련한다. 한적한 곳에서 캠핑을 하면서 같이 온 이웃과 음식도 나눠 먹고 불멍을 때리면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온 가족이 같이 캠핑을 떠나 산좋고 물좋은 곳에서 며칠씩 보내고 돌아오곤 한다. 모기에 물리고 뱀에 놀라고 넘어져 다치고 물에 빠져 죽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피곤이 겹쳐 쓰레기도 아무 곳에나 버리고 돌아온다. 그래서 전국의 바닷가나 산골짜기마다 캠핑장이 많이 생겨나고 캠핑족들이 찿아간다.
그러나 캠핑 장소가 생기기 전에는 외지고 경치좋은 지역에는 캠핑족들이 버린 쓰레기가 곳곳에 넘쳐났다. 술어니 고개를 지나오는데 고개길 옆에도 각종 쓰레기가 버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봉투에 담아 버린 것으로 보아 지나가던 차량에서 버린 것이 분명해보인다. 국도도 마찬가지고 주차장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외진 고개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백성이나 군중은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성적이며 다른 사람에 동화되기 쉽다.
차량을 타고 가다 창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모습을 자식들이 뻔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식들이 똑같은 그런 짓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지역 주민들이 캠핑을 금지하고 주차도 금지하는 모습이 확산되고 있다. 자전거 도로는 물론 골짜기, 강변, 국도변, 주차장, 쉼터 등 가는 곳마다 쓰레가가 난무하는 광경을 보면 국민은 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2천 년을 나라없이 떠돌다가 세운 이스라엘의 유대 민족도 이럴까?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우리처럼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를 잃고 일제 치하에서 36년을 치욕스런 삶을 살아오다 남의 힘으로 되찿은 나라이기 때문인지 우리들은 나라를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또 나라를 잃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나라잃고 외지를 떠돌면서 독립운동한 선조들을 다시 흉내낼 것인가?
방하리 '술어니 고개'는 경사도가 10 ~15% 정도로 좀 심한 편이다. 그래도 다니는 차량이 적고 사람도 없다. 나의 애마 전기 자전거는 힘차게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골짜기에서 들짐승이 갑자기 나타날 것 같아 주위를 살피며 조심조심 정상에 올랐다. 고개 정상에는 아무 것도 없다.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브레이크를 점검하고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구비구비 휘돌아치는 내리막길은 나에게 전율과 희열을 느끼게 만든다. 고개를 오르고 난 다음에 오는 기쁨, 이런 기분에 고개길을 오르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달리는 이 코스는 차량과 사람이 적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길과 산길로 달리기에 너무나 좋은 드라이브 코스다.
고개를 넘어 오니 저멀리 북한강이 보인다. 이곳은 좀 외진 곳이라 찿아오는 사람이 적은지 길 주변에는 음식점, 모텔, 카페 등이 다른 곳에 비해 적어 보인다. 북한강이 보이는 강변길을 약 5~6킬로미터 쯤 작은 고개길을 넘고 경변길을 따라 달리는데 벚꽃이 가는 곳마다 만발했다. 지나다니는 차량이나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달려오니 저멀리 가평 대교가 보이고 다리 밑에서 춘천과 가평으로 가는 경춘자전거길과 만나게 된다. 강촌에서 가평 대교까지 약 20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다.
경강교 쉼터에서
쉼터 목련꽃 전경. 쓰레기가 방치되어 있다.
청평 에덴 동산 입구 자전거길 벚꽃 전경
에덴 동산 들어가는 입구 벚꽃길. 벚꽃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와서 구경하고 있다, 에덴 동산은 통일교 재단으로 이곳을 들어가면 골짜기 일대에 대규모 성전과 유치원, 교육장 숙소/빌라 등 대규모 마을이 조성되어 있어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는 없다.
가평에서 청평 에덴동산을 거쳐 대성리 벚꽃단지를 지나고 새터와 마석을 경유하여 호평동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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