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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6

'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6

베들레헴 전경

 

베들레헴 시내 모습

 

4. 피로 얼룩진 독립전쟁

 

다시 맞붙은 다윗과 골리앗

이스라엘 독립전쟁(1948-1949)과 뒤이은 네 차례의 아랍권과의 전쟁은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독립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불과 75만 8천 7백 명이었다.약 75만 명과 3천만 명의 싸움이었다. 이랍권의 침공에 대응하여 소집 가능한 병력은 1만 9천여 명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3분지 1은 2차 대전시 연합군 부대에 편성되어 전투에 참가한 군인 출신들이므로 전투 경험이 있었으나, 나머지 3분지 2는 소총을 처음 쏘아보는 신참이었다. 5월 14일 선제공격을 가한 아랍군은 모든 전선을 휩쓸었다. 이틀 후 끈질긴 공방전 끝에 구 엘루살렘이 아랍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로서는 2천 년의 한을 푸는 전쟁이었다. 물러설 공간과 시간이 없었다. "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죽자"라는 것이 병사들의 신념이었다.

 

처음 이틀간은 아랍군이 석권했으나 3일째부터는 전선이 고착되었다. 이스라엘은 사력을 다해 전선을 지켜내고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조금씩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다던 전쟁은 6월로 접으들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은 조금씩 전선이 전진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6월 11일 유엔이 휴전안을 내놓았고 이에 양측은 휴전을 받아들였다. 양쪽 어느쪽도 이 휴전이 곧장 평화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전쟁은 이제부터이고 다음 전쟁을 위한 예비 단계라고 생각했다. 서방측은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판매하지 않았지만 체코를 통한 소련의 무기 수입은 영국 공군에서 활약한 유태인 조종사들에 의해 비밀리에 공수되고 있었다. 여성과 노년층까지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양측은 전쟁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아랍권을 지원하고 있었는데 소화기, 탱크, 장갑차 등 중화기를 판매했다. 아랍측은 병력 규모도 6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스라엘은 실제 병력은 2만 명에 불과했다.

지난 가을 왕숙천 갈대 모습

사활을 건 다섯 차례의 전쟁

두 번째 싸움은 양측이 다 원해서 시작되었다. 아랍은 이스라엘 독립을 좌절시키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다윗의 실력을 세계에 드러내자는 심산이었다. 1차 독립전쟁 결과에 양측 모두 불만족이었던 까닭에 유엔이 아니라 누가 말려도 듣지 않을 상황이었다. 2차 독립전쟁도 아랍군이 먼저 사면에서 공격하였으나 준비된 이스라엘의 화력에 주춤했다.

 

1차전과 달리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우세했다. 한때 주춤했던 전선이 이스라엘 반격으로 싸움은 아랍 영토에서 치러졌고 이스라엘 진격이 돋보였다. 이집트군만이 초전에 '네게브' 사막에서 이스라엘군을 밀어내는듯 보였으나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이집트군도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진격속도가 빨라 이집트 영토 깊숙이 지중해의 이집트군 기지 '엘 아리쉬'의 외곽까지 육박했다. 이에 이집트는 당황했다.

 

이 시점에서 휴전을 촉구하며 영국이 개입했다. 이스라엘군의 퇴각을 요구하며 불응시 영국군이 개입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 휴전이 성립되고 이상의 두차례 싸움을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두차례 전쟁에서 이스라엘 전사자는 모두 6천여 명, 전체 전투원의 3분지 1이며 당시 이스라엘 인구의 1%에 해당했다.

 

이스라엘은 이 두 차례의 독립전쟁을 포함하여 아랍과 모두 다섯 차례의 전쟁을 치른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른 아랍 국가는 이집트를 필두로 시리아.요르단.레바논이다. 이라크와 사우디는 위치상 배후에서 지원만 했다. 독립전쟁까지 포함 모두 다섯 차례의 전쟁은 '시나이 전쟁'(1956년), '6일 전쟁'(1967년),'욤 키푸르 전쟁'(1973),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바논 전쟁'(199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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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차례의 전쟁 중 독립전쟁과 욤 키푸르' 전쟁을 빼놓고 세 차례는 이스라엘의 기습으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측으로 보면 일종의 예방전쟁이었다. 어느 전쟁 하나 이스라엘 존망이 걸려있지 않은 전쟁이 없었지만 독립전쟁이 가장 급하고 위험했다. 아랍권의 기습으로 시작된 '욤 카푸르 '전쟁은 '욤 키푸르'라는 유태인 명절에 터져 손을 놓고 있던 이스라엘이 초전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다섯 차례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매듭지었다.

 

짧은 기간에 되풀이된 다섯 번의 전쟁은 마치 2천 년 동안 잠자고 있던 분화구가 맹렬한 기세로 연이어 터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폭발과 여진은 너무 커서 중동 지역은 물론 서구 유럽과 강대국들도 어쩔 수 없이 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스라엘은 이토록 강해졌는가? 강력한 무기가 있었는가? 아니면 열강이 지원군을 보내 주었는가? 역시 그렇지 않았다. 아랍권이 열강과의 관계나 스에즈 운하 이용, 유전 문제로 보나 훨씬 유리했다. 열강의 입장에서보면 아랍권과의 유대가 훨씬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측의 전략적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건국은 처음부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스라엘 탄생으로 인해 산유국들과 관계가 소원해졌고 소련의 진출을 허용하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생겨나지 않는 편이 서방측을 위해서는 훨씬 좋았다.나중에는 달라졌지만 영국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아랍편이었다.

 

그렇다면 그들만의 종교인 유태교의 '야훼 하느님'의 신앙에서 비롯된 기적 같은 힘이있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고립무원 속에서 멸망을 거듭했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의 철저한 유린, 사막속의 성지 '마사다' 요새에서의 처절한 옥쇄, 그리고 나치스 치하에서 짐승처럼 끌려가 죽임을 당한 당시 유럽 지역 유태인의 3분지 2나되는 6백만 명의 죽음. 신앙은 있었지만 하느님이 도와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태인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 이스라엘의 승리와 국가 존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내 희생으로 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표현할 길 밖에 없다. 유태인은 처음부터 미국이나 열강의 도움이나 조언을 믿지 않았다. 러빙했지만 행동은 스스로 했으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멈추지 않았다. 오랜 역사를 통해 남의 말을 듣고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을 거론하는 한국인에게 한 유태인은 아렇게 말했다. " 통일은 당신네들의 의지와 희생에 달려 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기 전까지 통일을 이룰 수 없다."라고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다. 한국인 모두가 한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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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을 첨언하면,

경우는 다소 다르지만 우리들의 통일이 미국이나 중국,일본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들 경우와 비슷했던 독일 통일의 진행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 사례를 충분히 연구하여 우리들의 여건에 접목하는 방법이다. 물론 강대국들을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 '와이즈만'이 '트루만' 대통령을 만나 이스라엘 독립 지원을 청원하듯이 우리들의 통일의 당위성과 타당성을 설파하며 강대국들에 대한 대외 물밑 접촉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대외적인 여건도 성숙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는 우리들의 노력에 달렸다. 또한 우리들이 통일의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인 대북관계를 추진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숙되어야 할 선행 조건들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와 이론이 국가 전략수립 차원에서 부단히 이루어지고 국가 정책과 전략도 이러한 차원에서 주도면밀하게 수립되고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독립전쟁을 포함한 다섯 차례의 전쟁에서 그들이 단지 기적을 믿는 민족이라서 이루어진게 아니다. 기적은 그 민족의 투철한 의지와 피나는 노력의 결집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