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3
* 근대 이후 두드러진 유대인 활약
게토(Ghetto)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드'
기원후 70년, 유태민족의 마지막 나라 유대아가 로마에 멸망하자 유태민족은 중동과 유럽, 북아프리카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 라고 부르는데 희랍어에서 비롯된 '흩어지다'란 의미다. 그후 유랑 생활을 하는 동안 유태민족은 어느 나라에서나 '아웃사이드' 신분으로 살았다. 공민권이나 거주권 같은 것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으며 생존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 박해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 왔다. 능력이 있어도 사회에서 받아주지도 않았으며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중세기 유태인들은 16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유태인 밀집 구역인 '게토(Ghetto)'가 탄생한 이래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게토 혹은 유태인 밀집 부락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구사회에서 비롯된 민권사상이 이상적인 사회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일반 민중들과 더불어 차별 받아오던 유태인까지도 일반인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유태인들의 자질이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반란 군중속에 유태인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이런 적극적인 참여는 프랑스에서 유태인들이 공식적인 시민으로 인정받는 바탕이 되었다. 이런 변화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따르게 되었으며 유태인들은 그들의 자질을 발휘해도 뒤탈이 없는 시대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다방면에 유태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국가나 사회에 조심스런 진출을 하게 되는데, 특히 정치 분야는 금기였지만 문화.경제적인 면에서 활약이 뛰어났다. 이는 '토라'와 '탈무드'로 무장한 지적인 바탕이 단단한 뒷심을 발휘하게 하였고, 2천 년의 디아스포라 세월 동안 축적된 방어적인 생존 기술이 있어 한번 트이자 곧바로 사회의 주목을 받게에 이른다.
쉽지 않은 저명 유태인 추적
거물급 유태계 인물들의 추적은 그리 쉽지 않다. 적지 않은 유태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세 이후 여러가지 이유로 신분을 감추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로의 개종도 빈번하였으며 많은 유태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거주 국가의 흔한 이름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더더욱 추적이 힘들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리더로 '스탈린'과 자웅을 겨루었던 '트로츠키'도 유태인이다. 그는 당시 '레닌'과 더불어 가장 지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재능은 탁월한 설득력, 치밀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오합지졸의 노동자를 조직하고 무장 세력화 시키는 등 그의 능력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혁명 성공 후 스탈린과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멕시코로 망명하였고, 결국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서 현지에서 피살되었다. 스탈린은 주변의 만류에도 그를 살해토록 한 것은, 끈질긴 기질을 가진 유태인인 데다 유태인 사회가 그 뒤에 있어 그 파워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권력 장악 후 유태인들의 영향을 없앨 목적으로 시베리아 동쪽 중국과 접경인 '비로비찬' 지역에 유태인들의 정치.사회적인 자치국을 허용한다고 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선전은 동유럽 유태인들을 슬렁거리게 하였는데, 약 1천 4백여 유태인 세대가 그곳으로 떠났고 소련 내에서도 약 5만 명의 유태인들이 이주했다. 막상 그곳에 도착한 유태인들은 농토도 개간하기 힘든 험한 황무지에다 혹독한 기후 등 도저히 살 수 없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주했던 유태인들은 차츰 빠져나가 결국 10년이 채 안되어 정착하였던 유태인 수는 8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또 이들 대부분도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스탈린은 자신의 주치의 의사가 9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유태인이 6명이나 되었다. 스탈린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혐의로 주치의들을 감옥으로 보내 사형당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가 스탈린이 갑자기 죽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히틀러' 또한 유태인이었다는 소문이 당시에 파다하였는데, 자신의 뿌리를 감추기 위해서 더 한층 돌출적인 행동을 하였을 가능성은 얼마던지 있었기 때문이다. 또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유명한 유태교 목사나 신부 지위의 '랍비'였다고 한다. 또 자기 자신이 유태인인지도 모르다가 나중에야 알게된 경우도 있는데. 바로 미국 최초의 여성으로 클린턴 행정부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울브라이트'의 경우도 있다.영국의 재상을 지낸 '벤자민 아이작 디즈넬리'같은 경우는 유태인이기 때문에 정치에 입문이 허용되지 않다가 영국 국교로 개종한 후에야 수상까지 역임했다. '아인슈타인' 같은 경우는 자신이 유태인임을 만천하에 내세우면서 살았던 사람인데,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와이즈만'이 물러난 후, 이스라엘 대통령직을 맡아 달라는 이스라엘 정부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자신은 과학자로 남아 이스라엘을 돕겠다고 했다고 한다.
양평 서후리 중미산 올라가는 길
양평 옥천면 중미산에서 내려오는 길
유태인의 끈질긴 집념
유태인 학자들의 성공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유태인 종족 특유의 집념에서 오는 듯하다. 어느 분야에 종사하던지 유태인들은 끈질기게 자기 일에 몰두한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욕을 참으면서 고집스럼게 자기 목표를 관철한다.이런 모습은 유태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인데, 대표적인 인물이 정신분석 학자이며 철학자인 '프로이드'다. 그는 <꿈의 해석>이란 저서를 썼고 정신분석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그는 유태인들을 자극하는 주장을 적지 않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유태인들의 히브리 경전(구약성경)을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하기도 하였는데, 출애급기에서 모세를 유태인이 아니라 이집트 왕자라고 하였으며, 그를 추종하던 유태인들이 그의 성공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유태인들은 모세를 죽인 죄의식을 자자손손지니며 살아가야 했던 민족이라고 했다. 이른바 '오디푸스 콤플렉스' 를 적용한 해석이었다. 그는 남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전형적인 괴짜 유태인 학자였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해석을 유태인들은 즐겨하는 분야가 되었으며 그런 풍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로이트를 통해 유태인 학자의 전형적인 예를 보았지만 유태인들의 끈질긴 학구열이 낳은 세계적인 학자들은 다른 소수 민족과 비교할 수가 없다. 그들은 계속 많은 학자들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없는 공정한 경쟁 무대만 마련되면 유태인들의 성공 확률은 어느 분야보다도 두드려진다. 미국에서 유태인들의 진출이 눈부신 이유는 그런 차별없는 경쟁무대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성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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