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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5

'갈등의 핵, 유태인' 그들은 누구인가? 5

 

마사다 요새

 

2. 기록으로 본 '팔레스타인'

 

첯 번째 주인은 유태민족

헤르츨을 중심으로 한 시오니즘 열정에 불붙은 유태인들이 새 유태 국가의 건립을 꿈꾼 팔레스타인 땅은 과연 어떤 곳인가? 누구의 땅인지조차 판별하기 힘든 팔레스타인은 참으로 복잡한 역사의 과정으 겪으면서 여러 민족이 거쳐간 지역이다. 신.구성경의 중심 무대인 이 땅은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언제나 지역 강자의 손 안에서 놀아난 곳이다. 그렇다고 누구나 군침을 흘린 정도로 비옥한 땅도 아닌 황무지에 불과하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하지만 평균적으로 보아 지구상의 어느 곳에 비해서도 사람 살기에 적합한 땅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민족들의 분쟁이 끓이지 않는 대단히 유별난 곳이기도 하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이 땅을 둘러싸고 이웃한 아랍권과의 싸움이 가라앉지 않는 골치아픈 땅이다. 제2차 대전 이후 전쟁을 억제 하려는 강대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섯 차례에 이르는 전쟁을 치렀고 또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감이 항상 감돌고 있다.

 

우선 첯 번째 문제로 '누가 첯 번째 거주 종족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약 천 년경이다. 아랍인들은 기원후 648년경에 마호메트가 무력으로 이지역을 점령한 이후에는 아랍 민족들이 들어와서 살았다. 그래서 유태인들이 무려 1600년이나 앞선다.

 

두 번째로, '그 지역에 어떤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가?'이다.

기원전 800년경에는 이 지역 주민들은 대다수가 유태인들이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아랍인들이 유태인 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2세기까지 진행되었고 그후 기독교도들이 이 지역을 라틴 제국에 편입시키면서 아랍인들을 차별하였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숫자가 적어졌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접어들어 아랍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그 상태로 유지되다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유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자 유태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누가 그 당을 지배했는가?'이다.

팔레스타인 지역도 전쟁으로 주인 바꾸기가 되풀이 되었다. 유태인들이 원주민격인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무력으로 빼았아 '내 땅이요' 한 것이 기원전 천 년 전의 일이다. 고대 로마시대는 로마가 그 땅을 지배했다. 그후 아랍인들이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땅의 주인이 되었다. 중세 십자군에 의해 한때 이 땅을 무력으로 빼았겼으나 그 기간은 짧았고 머지않아 다시 아랍인들이 빼았아 오렛동안 임자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 지역은 근세 '오스만 터키'의 지배에서 다시 영국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영국은 골치아픈 이 지역을 지배하다가 유엔에 일임권을 넘겼다. 유엔은 이 지역을 유태인과 아랍인의 팔레스타인으로 분리하려 했다. 즉 분할안이었는데, 아랍인들은 거절했고 유태인은 찬성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는데 처음부터 그 꼴을 못보는 아랍인들이 무력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무려 다섯 차례 전쟁을 치러면서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해 오고 있다.

 

불모의 땅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지역은 강우량도 적으며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1897년 헤르츨이 바젤에서 유태인 총회를 개최할 즈음에느 약 3만 5천여 명의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당시 땅의 주인은 물론 오스만 터키였다. 에루살렘에서 살던 유태인들은 성지를 방문하는 기독교인들이 던져주는 푼돈으로 입에 풀칠은 했지만 그밖에 지역은 살기가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러나 전세계 '시오니스트'들은 유럽 각지의 유태인들로 하여금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도록 독려하였다. 그래서 오스만 터키 지배 기간 동안 살기좋은 서구 지역 유럽보다 가난했던 러시아와 동부 유럽지역에서 무려 65만여 명의 유태인들이 스며들어와 삶의 터전을 닦아나갔다. 그 실화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쓴 <엑스도스>란 소설을 줄거리로 하여 만든 '영광의 탈출'이란 영화가 한국에서도 상영된 바가 있었다. 그 영화 줄거리 마지막에서는 난민들이 성공적으로 팔레스타인에 도착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그 반대였다.

 

실제 사실은 이러했다.

1946년 유럽 지역의 2만 6천여 명의 유태인 난민이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던 중 영국 해군에 발각되어 유태인 수용소가 있던 사이프러스 섬의 수용소로 옮겨졌다. 그들은 나치스의 홀로코스트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난민으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랐다. 영국은 당시 아랍권과의 약속으로 아랍권 편에서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유입을 억제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유입 방해 조치로 섬의 수용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유태인 조직에서 이들을 구하기 위해 빠른 대응조치를 했는데, '체세빅 배이'라는 이름의 낡은 배 한 척을 마련하여 유태인 행동대원들을 태우고 비밀리에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로 진입하였다. 그배는 영국 해군을 피하여 어둠을 틈타서 몰래 사이프러스 섬에 접근하였다. 섬에 접근한 배는 유태인 행동대원들이 수용소에 접근하여 유태인 난민 조직과 접선했다. 유태인 행동대원들에 의해 약 5천 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몰래 수용소를 빠져 나와서 배를 타게 된다. 이들 난민을 태운 배는 어둠을 뚫고 어두운 밤 지중해를 파도를 헤치고 목적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였다. 배의 이름도 '엑스도스'로 바꾸었다. 배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 감시병에 의해 이 사실이 보고되자 영국은 6척의 해군 함정을 출항시켜 엑스도스 호를 추격하였다. 엑스도스 호는 팔레스타인에서 불과 2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해역에서 결국 영국 해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영국 함정이 사방에서 엑스도스 호를 포위하고 정선을 명령했다. 그러나 엑스도스 호는 그대로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 시도하자 영국 함정에서 사격이 가해졌다. 승무원을 포함하여 수명이 죽었으나 그래도 항해를 강행하자 영국 함정에서 이번에는 포격을 가하면서 배를 그대로 침몰시키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내자 할 수 없이 엑스도스 호는 결국 투항할 수 밖에 없었다. 배는 그대로 예인되어 다시 유럽으로 끌려가서 프랑스에 내리도록 했으나 닌민들은 하선을 거부하였으며 프랑스 측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거절했다. 그러자 다시 예인되어 독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 강제로 하선시켰다. 이상이 실제로 진행되었던 사건의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그로부터 11년 후에 '레이 우리스'가 쓴 <엑스도스>란 제목의 소설로 한층 더 유명해졌는데 이 내용을 영화한 것이다. 이 와중에 엑스도스 호에 타고 있던 무선 통신사가 이 사실을 전세계에 타전하여 ,영국 해군의 사격으로 난민이 숨진 사실, 배안에서 5천 명의 비참한 함상 생활, 예인되어 끌려가는 난민들의 애절한 희망 등을 외부 세계에 알렸던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이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소설로도 씌이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가난한 유태인들은 맨손으로 황무지를 일구며 가장 교조적인 분파를 이루었다. 유태인 단체에서 세계적인 모금운동을 벌여 많은 자금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자 정착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터키 당국과 아랍인들은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몰려들자 땅 값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후 유태인들은 정착지를 약 25만 에이커나 사들이고 233개의 공동 집성촌인 '키부츠'로 불리는 부락을 새로 이루고 정착했다.

 

터키 당국은 이주민들을 반기지는 않았다. 그래서 만만하게 보이는 이주민들은 구실을 달아 추방했으며 쫓겨나지 않은 자들은 도시 외곽으로 쫒아냈다. 쫒겨난 유태인들은 늪지대를 메우고 나무를 심으며 밭을 일구고 우물을 파고 집을 지었다. 이들은 죽은 후 이 땅에 묻히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이주해왔기 때문에 언제고 이 땅의 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죽은 듯이 버텼다. 초대 수상이 된 '벤 구리온'도 이런 무리속에 끼어 폴란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왔다가 터키 당국에 의해 과격 시오니스트로 지목되어 추방되기도 한 불온분자였다.

 

개척의 거점 키부츠

초기 이스라엘 정착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이름이 전해오는 유명한 키부츠가 이스라엘 건국 38년 전인 1910년 이 시절에 최초로 탄생했다. '데기니아'라는 이 키부츠는 갈릴리에서 흘러내리는 오르단강 가까운 지역이었다. 이 첯 번째 키부츠에서 전설적인 이스라엘 장군인 외눈박이 '모세 다얀' 장군도 바로 이 키부츠 출신이다.

 

이 시절 키부츠 개척민들이 고안한 농사법으로 파이프를 땅속으로 그물처럼 깔고 시간에 맞추어 물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작물의 뿌리에 물이 닿게하여 한방울의 물도 낭비하지 않았다.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도 이들이 고안한 방식이다.

 

키부츠는 탄생하자마자 중근동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급자족은 물론 일부 채소는 풍족하게 남기도 하였다. 남은 농산물은 팔레스타인 전역에 내다 팔고 현찰을 모았다. 유태교를 중심으로 한 가장 이상적인 신앙 및 생활공동체로 소개되어 많은 유태인들이 몰려들었고 그후 수많은 키부츠가 생겨나기 시작하여 이스라엘 건국에 즈음한 시기에는 300여 개의 키부츠가 자리를 잡았다.

 

키부츠의 수가 늘어나면서 키부츠 연합기구도 만들어졌다. 정치적 영향력도 생겨 이스라엘 노동당의 주력 정치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초대 수상 벤구리온, 뒷날 수상에 오른 '골다 메이어' 여사를 배출했다.

 

초기의 키부츠는 자체 '무장 자위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아랍인들의 무장 공격에 자체 방위는 물론 초기 독립전쟁에 지역별 독립 부대를 만들어 참전하기도 하였다. 총 거주 인구 13만 명,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며 전체 이스라엘 농산물 생산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