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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왕숙천 - 부마로 - 송우리 - 의정부 - 중량천을 돌아

왕숙천 - 부마로 - 송우리 - 의정부 - 중량천을 돌아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 포천 가산리 진목사거리 근방
 

 

제9차 호평동에서 춘천까지

 

지난 6얼 24일 아침 일찍 호평동을 출발하여 춘천까지 경춘 자전거길 전체를 주행하기로 했다. 공휴일이라도 아침 일찍 출발하면 사람이 적다. 춘천까지는 부분적으로 경사로가 많아 밧테리 소모가 많다. 그래서 복귀할 때는 춘천에서 전철을 타고 오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전철로 춘천가서 되돌아오는 코스를 많이 다녔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주파해보기로 했다. 가평 - 강촌 코스는 지루한 길이라 가기를 껴려하던 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랫만에 전체적인 거리를 주행하기로 한 것이다.

 

가평까지는 자주 다니던 길이라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가평에서 춘천까지는 오기만했지 가는 길은 자주 가지 않았다. 

 

가평 강경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강촌으로 달렸다. 강변 갈대밭에는 산책길을 새로 조성하는지 콘크리트로 길을 만들고 있었다. 부분적인 보수를 한 곳도 보이고 보강한 곳도 많이 보인다. 갈대밭 사이길로 게속 달리면서 북한강을 바라보니 물이 많이 불어 있다. 아마 지난번 폭우로 인해 북한강 수계 각 댐들이 물을 방류하고 있는 모양이다.

 

의암호는 변함없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주변에는 각지에서 개발 공사로 분주하다. 중도는 춘천시에서 몇 년째 대규모 테마파크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다가 선사시대 유물이 대량 출토되어 공사가 일부 중단되어 있는 듯하다. 아마 춘천시의 역점 사업인 모양이다. 

 

의암호 주변 감자밭에는 곧 감자를 캐야할 정도로 잎과 줄기가 시들기 시작하고 있다. 운무가 낮게 드리운 의암호는 언제보아도 운치가 있어 보인다. 의암호 주변 자전거길 옆에는 고급스런 커피집이 여럿 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런 커피집에 들어가 본 적도 없지만 마음 맞는 사람이 있다면 아낌없이 운치있는 커피를 마실 수는 있을 게다. 물위로 멋나게 만들어 놓은 나무다리도 지나고 북한강 자전거길 종점을 지나 신매대교를 넘었다.

 

마음 속으로 막국수나 한 그릇 먹고 가려했으나 아직 문을 연 집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대로 춘천역으로 달렸다. 평일이라 그런지 자전거족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춘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복귀했다.

 

 

 

 

제10차 새로운 길을 찿아서 

 

지난 6월 25일, 철원 동송까지 갈 수 있을지 시험삼아 포천으로 올라가서 오가리 방향으로 올라가면 철원 동송읍에 도달한다. 왕복 거리를 고려하여 밧테리 가능 거리까지 올라가보기로 했다.

 

왕숙천에서 부마로를 따라 고개 넘고 부평리를 거쳐 내촌 다리 입구에서 좌회전하여 몇 킬로미터를 달리면 진목 사거리가 나타난다. 진목 사거리에서 새 도로를 타고 100미터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빠지는 구도로가 나타난다. 그런데 입구에 '육사생도 전적비'를 안내하는 간판을 우연히 발견했다. 과거 전쟁사 시간에 잠깐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들었지 현장을 탐방한 적은 없다. 그래서 처음 발견한 간판이라 전적비를 찿아가 보가로 했다.

 

처음에는 간판 표시만 보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갔는데 길 끝에는 채석장과 레미콘 공장이 나타났다. 관리 소홀로 전적비가 없어진 줄 알고 실망했는데, 채석장 관리인이 나타나서 더 이상 갈 수 없다면서 제지하기에 전적비 위치를 물어보았다. 알고보니 잘못 올라왔단다. 구도로를 타고 좀 더 올라가면 전적비가 있다고 한다. 괜히 오르막길을 올라오면서 밧테리만 소모한 것 같았다. 경사 도로를 내려와서 구도로를 타고 조금 갔더니 우측으로 전적비 안내판이 보이고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타나났다. 밧테리 소모를 줄이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는데 50미터 쯤 올라가니 숲이 우거진 산비탈에 전적비가 나타났다.

 

 

 


육사 생도 6.25 참전 전적비 전경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육사 생도가 장교로 임관도 하기 전에 6.25를 맞아 전선으로 북한군을 맞아 싸우러 나온 곳이 바로 이곳이라 한다. 이곳은 38선 부근으로 최전방인 셈이다. 육사 생도 6.25 참전 경위를 사전에서 찿아보았다. 아래는 그 구체적인 내용이다.

 

 


전적비에 새겨진 내용 

 

육사 생도 6.25 참전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우금리 산자락. 포천시 내촌면 국도 47호선에서 서북쪽으로 갈라진 국도 87호선을 따라 4∼5㎞를 달리면 오른쪽에 있다.

 

이곳이 6·25전쟁 초기 큰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전쟁 발발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당시 육사 생도들이 전차로 무장한 북한군 3사단을 저지하기 위해 장교가 아닌 일반 전투원으로, 변변한 무기도 없이 첫 전투를 치르며 많은 희생을 낸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북한군이 전차로 밀고 들어왔던 이곳을 지금은 '육사 생도 6·25 참전 기념비'가 호젓하게 지키고 있다.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비운'의 육사 생도 1, 2 기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비다.

 

165㎡ 부지에 1.2m 화강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5m의 비석을 올렸다. 1979년 12월 1일 생존한 동기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뒤 국비 1억원을 지원받아 정비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육군은 2002년 육사생도들의 첫 전투지였던 포천에서 유해발굴사업을 벌여 유해 4구와 '육사' 표식이 부착된 철모, 의복 등 유품 557점을 발굴했다.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교수의 '6·25전쟁 초기 육사 생도 참전전투 연구' 논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 생도 1·2기 '생도대대' 포천서 첫 전투…열흘간 150명 희생

전쟁 발발 당시 육군사관학교에는 1년 과정을 마치고 20일 뒤인 7월 14일 임관할 예정인 생도 1기 262명과 4년제 정규 대학 과정으로 6월 1일 입교한 생도 2기 334명이 교육받고 있었다.

 

6월 25일 1기생들은 대부분 외출·외박을 한 상태였지만 2기생들은 사격훈련이 예정돼 학교에 머물고 있었다.

 

육군본부에서 사관생도들을 전선에 투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은 개전 당일 오후 1시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즉시 전투대대를 편성해 참전 기념비 주변인 국도 47호선과 87호선이 만나는 곳에 방어진지를 구축, 남하하는 적을 막으라는 명령이었다.

 

육사는 비상소집돼 학교로 복귀한 1기생 전원과 2기생 중 277명 등 539명으로 생도대대를 편성하고 학교에 근무하는 장교에게 지휘를 맡겨 출동하도록 했다.

 

이들이 북한의 전차와 맞서야 했던 무기는 박격포와 경기관총, 자동소총이 전부였다. 대부분 M1소총으로 무장했다. 박격포탄은 50여 발, 실탄은 1인당 56발에 불과했다.

 

이들이 포천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께. 뜬눈으로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오전 6시 일본 99식 소총과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수도경찰청 소속 전투경찰 1개 대대와 합류한다.

 

첫 전투는 오후 4시께 시작됐다. 적의 화력은 도로 오른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한 경찰대대에 집중됐다. 변변한 중화기 한대 없었던 경찰대대는 불과 10여 분 만에 실탄이 떨어지며 철수했다.

 

생도대대는 이후 근접전투를 치르는 등 3시간을 버티던 중 '오후 7시 진지를 이탈 태릉에 있는 학교로 집결하라'는 명령과 함께 철수하게 된다.

 

그 사이 의정부가 적 수중에 들어가면서 생도대대는 27일 서울 동북쪽 불암산과 육사를 잇는 방어선에 다시 투입됐다.

그러나 그날 밤 적의 포격에 이어 28일 새벽 적군이 밀려들자 버티지 못하고 한강 이남으로 다시 철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후퇴 명령이 와전돼 엉뚱한 희생을 낳기도 했다.

 

이후 생도대대는 현재의 판교와 수원 일대 방어선에 투입되는 등 7월 4일까지 10일간 생도신분으로 전투를 치르고 대전으로 철수했다. 이어 7월 10일 1기생 임관식과 함께 생도대대는 해체됐다.

 

육군사관학교에 따르면 1기생 임관 전까지 생도대대 전사자는 1기 65명, 2기 85명 등 150명이다. 이후 정전 때까지 1기 48명, 2기 47명 등 95명이 또 전사했다. 생도대대로 참전한 1·2기 539명 중 절반 가까운 245명(1기 113명, 2기 132명)이 6·25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종남 교수는 논문에서 "훗날 전투에서 유능한 초급장교로 활용할 수 있는 인재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투입, 많은 희생을 치른 것에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고 밝혔다.

 

◇ '비운의 기수'…생도 1기 1966년 육사 10기로 인정, 생도 2기 1996년에야 명예졸업장

육사 생도 1기와 2기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에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1955년과 1966년 두 차례 기칭(期稱) 파동을 겪으며 교육과정을 마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첫 기칭 파동은 육군사관학교가 폐교된 뒤 1951년 10월 경남 진해에서 정규 4년제 교육과정으로 재개교한 데서 비롯됐다.

 

이때 입학한 육사 11기들이 1955년 10월 임관할 때 육군본부가 '정규육사 1기' 호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공고 때는 '육사제1기사관생도 모집'으로 했음에도 전쟁 발발 전 1∼9개월 과정의 단기육사 출신(육사 1기∼9기)들이 군의 주축이 돼 장교 족보를 흔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66년 육사 기수 정리 과정에서 생도 1기는 육사 10기로 조정이 됐으나 생도 2기는 끝내 육사 기수에 편입되지 못했다. 생도 2기는 1기 임관 이후 육군종합학교에서 6주간 교육을 받고 종합 1 또는 2기로 임관했다.

 

'첫 4년제 정규 육사 생도'라는 명예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육사 11기가 군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육사 11기는 생도시절 전쟁 중임에도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육사 2기 생들의 명예회복은 육군사관학교가 개교 50주년을 맞은 1996년 334명 2기생 전원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면서 이뤄졌다. ( 연합뉴스 우영식 기자 2016. 6. 23 ) >

 

입구에 새겨진 내용

 

이상이 육사 생도 6.25 참전 내용이다.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마침 오늘이 6.25일이라 전적비 답사가 나에게는 무척 의미있는 일로 여겨졌다. 전적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연기처럼 사라진 젊은 생도 선배들의 명복을 빌었다.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모집이 이루어지자 육사를 지원한 젊은이들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던 그들에게 6.25 전쟁은 꽃다운 나이에 이슬처럼 사라지게 만든 크나큰 불행이었다. 해방을 맞았고 건군에 앞장서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는 애국심은 누구보다도 강렬했던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기꺼이 군번도 없이 소총을 들고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하는 적군 앞에서 용감하게 분투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과 우리들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70년대만 해도 육사 생도에 대한 전사 교육 시간 편성되어 있지만, 세계 전사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실제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에 대한 전쟁사나 전적비를 답사한다든가, 각 유명한 전투 지역을 실제 답사하고 현지에서 전술토의를 한다든가, 오늘날 군사력에 따른 소규모 전투에 대한 현지 실습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전적비 올라오는 길

 

 

전적비 답사를 마치고 송우리 방향으로 새로 만든 길로 달렸다. 

 

마음 속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갖가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산다는 게 무언가?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삶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다. 그 인생 시간을 다 보내지 못하고 도중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국가와 사회의 변화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그 역사의 흐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광기 넘치는 지도자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그 희생 덕분에 후손들은 삶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내가 이런 자전거 주행의 호사를 누리는 것도 이러한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즐기는 행복일 것이다.

 

희생당한 사람은 후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간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들의 희생을 얼마 동안은 기리지만 시간이 흘러가면 점차 그 기억도 사라져 갈 것이다. 그래서 살아남은 동기생들이 이런 전적비를 세우고 후세인들이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불행한 시대를 피해서, 또는 살아남아서, 천수를 누리며 오래 산다고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다. 명예를 붙잡고 사는 사람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없듯이, 양심과 공공심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다. 그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풍족한 재물을 움켜쥐고 떵떵거리며 살기를 원하지만 권력이나 재물은 쉽게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두가 치열하게 권력과 재물을 얻기 위해 다툼을 벌이기 때문에 악착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재물을 벌지 않으면 권력과 재물을 모을 수도 없다. 

 

권력과 재물은 오물과 같아 똥파리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권력과 재물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가족과 단절하고 서로 원망과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주변에 베풀면 거름이 되어 오곡이 무르익어 풍년을 이루지만 움켜쥐고만 있으면 스스로 썩어간다는 말이다.

 

인생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 불행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국가나 사회적인 요구에 의해 전쟁터로 보내지거나 목숨을 잃어야 했다. 애국이라는 선동에 이끌려 전선으로 달려갔고 이슬처럼 사라져갔다. 육사 생도들의 안타까운 죽음이나 월남전에서 산화한 수많은 장병들, 무장 공비를 소탕하다가, 서해 해전, 천안함 침몰 등 각종 사건 사고로 묵숨을 잃은 경우도 많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길고양이처럼 살아가는 수단과 방법은 다르지만 수명을 다하는 죽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고난을 겪고 성공을 하면 누구나 거만해지고 당당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다운 삶, 즉 자아실현의 욕구 최종 단계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 누구나 부귀영화를 추구하게 되고 그런 삶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것이 권력의 힘이요 자본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권력과 자본을 얻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는 지도 모른다.

 

 

 


송우리 가는 새로 낸 도로

 

 

송우리로 가는 중간에 밧테리 눈금을 보니 2개 정도 남았다. 이 상태로 철원 동송까지 올라간다면 예비밧테리로 교체하면 돌아갈 수는 있지만 고개길에서는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철원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송우리에서 의정부 방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의정부에서 포천 - 운천으로 이어지는43번 국도는 차량이 많이 다니는 가장 복잡한 도로이다. 이 도로는 옛날부터 차량이 많았고 일찍부터 도로 확포장 공사가 실시된 곳이기도 한다. 43번 국도도 옛날에 비해 더 넓게 확포장하여 의정부로 가는 길은 노견 쪽에 차량 주차 공간을 만들어 두어 자전거가 달리기에도 좋다. 곳곳에 신호등이 즐비하고 신호등이 파랑 신호로 바뀌면 나는 노견에 서 있으면서 같은 방향의 차량들이 다 지나간 다음 뒤따르고 뒤 차량들이 신호등에 걸려 정지한 시간을 이용하여 주로 달렸다.

 

도로가 넓어 차량들의 속도가 빠르다. 차량도 많고 중간에 정차한 차량도 있어 전방 주시를 게을리하면 안된다. 광명숲으로 빠지는 길을 지나 의정부 시내로 고개를 넘었다. 지난번 축석 고개는 엣날 고개 그대로였으나 새로낸 도로는 고개 경사가 그리 급한 것은 아니지만 길이가 길었다.

 



송우리로 가는 길
 

도로 간너편 전경

 

 

포천 일대는 대부분 평야지대다, 각종 제조 공장과 창고들, 비닐하우스 등이 산재해 있다. 저지대가 많고 폭우가 내리면 금방 물에 잠가는 도로가 많다. 그래서 포천은 교통의 요지다. 서로는 서울, 의정부, 동두천과 연결되고, 북으로는 운천, 철원, 지포리, 육단리로 연결된다. 동으로는 서파, 현리, 청평, 가평, 춘천으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광명숲, 진례, 퇴계원, 구리, 서울로 연결된다. 

 

의정부에 도착하여 경전철 밑으로 하천을 따라 새로 포장된 자전거길로 가다가 드디어 중량천 자전거길을 만났다. 중량천을 내려가다 묵동천 자전거길로 접어들었다. 화랑로를 따라 가다 퇴계원에서 사능역을 거쳐 호평동으로 돌아왔다. 이동거리는 휴대폰 오픈라이드 거리를 보니 95킬로미터. 힘든 길이었지만 뿌듯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