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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감자꽃 필무렵, 소양댐을 오르다.

감자꽃 필무렵, 소양댐을 오르다.

 

 

의암호 주변 감자밭 전경

 

 

6월 중순, 이때쯤이면 감자꽃이 한창 필 무렵인데, 감자에 대한 백과사전 내용이다. 

 

감자(정체자: 甘藷, 영어potato)는 가지과의 여러해살이 식물로,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곡물이다. 하지감자지슬북감저(北甘藷), 마령서(馬鈴薯)라고도 한다. 원산지는 남미 안데스 지역인 페루와 북부 볼리비아로 알려져 있으며, 주로 온대 지방에서 재배한다. 식용하는 부위는 덩이줄기로, 대표적인 구황작물(救荒作物) 가운데 하나다.

 

 


 

 

감자는 현재 재배 식물 가운데 가장 재배 적응력이 뛰어난 식물로 알려져 있는데, 해안가에서부터 해발 4,880m 히말나야나 안데스 고산지대에서도 재배하고 있으며, 기후지대별로는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에서부터 연중 대부분 눈이 덮여 있는 그린란드에서도 재배하고 있다.

 

감자는 1570년대 신항로 개척으로 에스파냐가 유럽으로 들여왔는데, 처음 유럽에 도입되었을 때는 널리 퍼지지 않았으며, 감자가 나병을 일으킨다거나 성서에 없어서 악마의 작물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18~19세기 즈음 세계적으로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인구 부양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감자는 싸고 실용적인 농작물로 자리 잡았다. 아일랜드에서는 영국의 곡물 수탈 때문에 곡물 대신 감자를 주식으로 삼고 있었는데, 19세기 말 감자 역병이 돌아 아일랜드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감소할 정도의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일찍부터 감자를 왕궁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자꽃을 머리 장식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궁에서만 길러졌던 감자는 프랑스 대혁명 후에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18세기 중반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가 감자를 구황작물로 심으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널리 보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맛없는 감자를 심지 못하겠다는 상소문이 날아오자, 자신이 직접 매일 감자를 먹음으로써 여론을 무마시켰다. 

 

중국에는 명나라 때에 옥수수, 고구마와 함께 전래되었으며, 일본에는 1603년 네덜란드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감자는 1824년~1825년(순조 24~25년)경에 조선에서 산삼(山蔘)을 찾기 위해 숨어 들어온 청나라 사람들 식량으로 몰래 경작하면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는 특히 강원도 지역이 감자로 유명한데, 이는 1920년대 초에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에서 농업연구를 하던 독일인 매그린이 개발한 품종(난곡 1호 ~ 난곡 5호)이 1930년대 강원도 지역에서 대규모로 재배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강원도에는 화전민이 약 35만명으로 도내 인구(약 150만명)의 23%에 달하였는데, 강원도의 기후조건이 감자를 재배하기에 원활하고 다른 작물에 비해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많았기 때문에 쌀을 경작하기 어려웠던 이 지역에서는 화전민을 중심으로 감자가 주식으로 재배되었다.

 

 

 

 

 


소양호 전경



 

 

제6차 새로운 길 주행

 

그동안 한강과 중량천, 광릉숲길 쪽으로만 다니다가 평일 오랫만에 북한강 자전거길을 달려 가평으로 향했다. 자전거 밧테리를 고려하여 지루한 가평-강촌 구간은 점퍼하기로 하여 가평에서 지하철을 타고 춘천역으로 가서 의암호를 돌아올 예정으로 출발했다.

 

작년에 홍수 피해로 북한강 자전거길이 여러 곳에 피해를 받았고 거의 1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최근에야 가평군에서 대대적인 정비와 보수를 시행하여 북한강 자전거길이 많이 좋아졌다. 꺼지거나 물에 비틀어지거나 날아간 도로 노면을 재포장하고 청평 근방 진흙탕 침수 지역은 주변 흙을 제거하고 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려했다. 곳곳의 턱도 정비했고 애를 많이 쓴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가평 가까이는 하천 제방 정비사업을 하면서 자전거길도 깨끗하게 새로 포장되어 달리기에 좋다. 그리고 부분적인 피해 지역의 복구는 물론 도로상에 나무 뿌리나 턱이 진 곳 등 전체적인 정비와 보수를 대부분 마친 상태다. 그래서 달리기에 편안함을 증가시켜 주었다. 

 

남양주시도 왕숙천 자전거 도로 주변 산책로를 자전거 도로 옆으로 만들고 있고, 구리 한강 시민공원은 보리밭, 꽃밭 관리 등  대규모의 유지.관리 비용이 투자되고 있는 곳이다. 자전거 도로는 가는 곳마다 공사가 진행되는 곳도 많다. 구리 한강시민공원에는 관리소가 있는데 인부도 많다. 공원 관리 인부들 감독체계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시간만 떼우고 일당을 받아가는 허술한 예산 낭비 부분도 세밀히 감독하고 살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각 지자체들이 자전거 도로 유지.보수에 열심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래도 지자체 중에서 아마 가평군이 자전거 도로 정비에 가장 열성적인 것 같다. 자전거 도로 주변에 자라는 잡초를 제거허기 위해 지자체마다 업체를 고용하여 잡초 제거 작업을 벌이는데 예산이나 작업량이 어머어마한 규모가 될 것이다. 잡초는 한 번 제거한다고 다시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일정 기간마다 잡초 제거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주어야 하는데, 이는 자전거 주행에 안전이 보장하기 위함이다. 이곳 호만천 산책길도 주기적으로 인부들이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배수로는 물론 주민들이 기거하는 아파트 근처, 공공 청사 근처, 도로 주변도 주기적으로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이런 유지.보수에 사용되는 예산도 어머어마할 것으로 추정된다.

 

 

평일이라 자전거 도로에 주행하는 자전거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변 산에는 밤나무들이 하얀 밤꽃을 눈꽃처럼 열심히 피우고 있다. 자전거길에는 벚나무와 뽕나무에서 버찌와 오디들이 떨어져 검은 잉크를 부은듯 도로가 검게 물들어 있고 자전거 터이어에 눌리면 튀어서 옷을 더럽히기도 한다. 오디가 몸에 좋다는데, 지천에 깔린 오디를 다 가져가지도 못한다.

 

 

 

청춘 열차 내부 전경

 

 

가평역에 도착하여 10시 이전이라 청춘 열차표를 끊었다. 자전거를 휴대하고 청춘 열차를 처음 타본다. 지정돤 칸에 올라 자전거를 거치하고 자리를 보니 옆에 사람도 있어 답답할 것 같아 그냥 자전거 거치대 옆 자유석 자리에 앉아 갔다. 

 

청춘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가면서 이런 저련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젊은 아가씨 유튜브가 어머니와 같이 소양댐에 올라 찍은 동영상을 보았다. 나도 내친 김에 춘천역에 도착하면 오랫만에 소양댐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수십 년 전 양구 백두산 부대로 전출갈 때 소양댐에서 배를 타고 간 적이 있었다. 고등군사반을 마치고 처음 오지로 배치받아 찿아갔던 곳으로 3년 동안 추억이 깊게 서린 그곳을 언젠가는 다시 찿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평소에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소양댐을 찿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불꽃처럼 가슴 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또 언제 다시 소양댐을 찿을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옛날에 소양댐으로 올라가는 오르막 길이 경사가 꽤 되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 전기자전거가 과연 순조롭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 올라가다가 안되면 되돌아오면 되니까.

 

 

 

 



청춘 열차에서 찍은 풍경

 

 

요즘 티비에는 별난 광고도 많다. 힘이 세보이는 남자 가수와 천하장사 출신이 나와서 선전하는 정력보강제를 난 먹어보지도 않았지만 먹을 일도 없다. 각방 쓴지도 오래고 그짓거리가 얼마나 허망한 짓거리인지는 세월이 지나봐야 안다. 매일 3끼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은 생리적인 욕구를 참을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상대가 까무라치고 입에 거품을 쏟아낼 때까지 강한 남자의 힘을 보여준다? 글쎄다. 그게 무슨 대단한 자랑처럼 이야기하고 하룻밤에 몇 번을 했느니 등 오로지 하등 동물같은 생각이 가득찬 인간이 대부분인 세상이다.

 

난 이미 골프체, 차량, 테니스 도구, 캠핑 장비, 낚시 도구, 향우회, 동창생, 친구 연락처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자전거만 타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은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는 자연인과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젊은 여인을 보면 품고 싶은 것은 아직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런 것을 초월하는 삶이 찿아오는 그때쯤이면 깨달음이 느껴질 것이다. 티비에 예쁜 얼굴과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침을 흘리는 것은 아직 깨달음이 요원하다는 증거이고, 마치 마귀가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깨달음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다.

 

우리 인간은 출세와 부귀를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가난하고 배고픈 어려운 시절이 지나고 때를 만나 성공한 그날, 많은 사람들이 찿아오고 반겨주지만, 성공과 인기는 거품과 같고 지나가는 봄바람 같은 것이다. 자연의 기승전결, 인생의 기승전결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성공하고 부귀해지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인데, 자만과 허영심, 그칠줄 모르는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빈 손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풍요가 찿아온 고대 로마가 진보적인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보수층이 진보층과 충돌한 계기가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내전이다. 당대 최고의 장수이며 찬란한 성공을 거두었던 허영심의 대명사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을 등에 업고 공화정을 견지하려 하였고 반카이사르 정책을 추진했다. 카이사르가 그런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보수층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자 고심 끝에 결국 참지 못하고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평화로운 시기에 전쟁을 대비하고 잘나가는 시절에 몰락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소양댐 전상에서

 

드디어 춘천역에 도착했다. 소양댐 자전거길은 처음 가는 길이라, 춘천역에서 지도룰 살펴보고 소양 제2교를 지나 다리밑으로 소양댐 방향으로 달렸다. 자전거길을 모르고 하천에 설치된 콘크리트 산책길을 달리다가 결국 자전거길과 만났고 소양댐 근방에서는 도로를 탔다. 거리는 약 편도 13킬로미터 정도였다. 

 

드디어 소양댐 올라가는 경사로 길이 나타났다. 자전거 밧테리 눈금은 두 개가 남았고 단계를 4단으로 올리고 기어를 저속으로 하여 힘차게 올랐다. 지난번 수동 고개에 비해 그리 가파른 오르막길은 아니다. 이 정도는 가쁜히 오를 수 있었고 10분 정도 올라가니 댐 정상이 나타났다. 평일이라 차량도 거의 없고 버스만 다니고 있었다.

 

댐 정상에서 사진 몇 컷을 찍고 선착장 근처로 내려갔다. 선착장은 옛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여기서 양구 선착장까지 당시에는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푸른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보트에서 보는 주변 광경은 별천지나 마찬가지였다. 양구에 근무하는 어느 대위 부인이 임신하여 배를 타고 춘천으로 급히 나오다가 목숨을 잃은 이야기를 들은 마누라는 얼굴이 파래졌다. 

 

처음에는 이사짐을 싣고 오음리를 통해 비포장 도로를 따라 앙구로 갔다. 몇 개 안되는 이사짐을 싣고 덜컹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달린 기억이 난다. 돌아도 돌아도 비포장 길은 계속되었다. 결국 양구에 도착헸다. 무작정 올라왔기에 지정된 관사도 없어 우선 이사짐을 비오큐에 내리고 이사짐을 싣고 온 대한통운 차량은 돌려보냈다. 사단 인사처에 근무하는 선배한테 전화하여 관사를 물어보았다. 양구에는 정해진 관사가 없으니 빈 관사 아무 데나 들어가란다. 그래서 풀이 잔뜩 자란 빈 관사에 입주했던 기억이 난다. 

 

이튼날 부대 도움을 받아 엉망으로 방치되었던 관사 수리를 대략하고 몇 개 되지도 않는 개나리 봇짐인 이사짐을 정리했다. 부억은 나무를 떼는 아궁인데 마누라는 나무로 밥을 해본 적도 없고 불을 피워본 적도 없는 서울 아가씨였다. 불을 떼면 연기가 방구둘 사이로 올라와서 장판 틈 사이로 피어올랐다. 그런 환경에서 젊은 중대장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첯 애를 임신한 마누라를 어느 대위 부인이 해산하기 위해 춘천으로 나가다가 사망한 사건 이야기가 생각나서 미리 대구 시댁으로 내려 보내 해산했던 기억이 난다.

 

 

 

 


안내 간판

 

소양댐은 1967년 4월에 착공하여 공사 기간이 거의 7년 가까이 걸린 대공사였다. 중심 코어 형태의 사력댐으로 저수용량 29억 톤이다. 수몰 지역 주민을 이주시키고 건설한 한국 경제개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댐이다. 소양댐 홍수 저절 능력은 5억 톤, 용수 공급은 년간 12억 톤이다. 소양댐 물을 방류할 때는 장관을 이룬다. 한강 홍수 저절의 가장 중요한 댐이다.




댐 전경



호수에서 분수도 내뿜는다





산착장 전경



음식점 모습

 

 

다른 동기생들은 서울 근방이나 수방사, 특전서 등지로 배치받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육본 인사담당자와 대부분 이야기 하고 원하는 부대로 배치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었던 나는 가장 오지중에 오지인 양구 백두산 부대로 배치된 것이다. 빽도 없고 눈치도 없고 코치도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면 다 그런 모양이다. 과거 유신사무관을 나갈 때 나는 신청만 하면 되는줄 알았는데, 그 당시 최소 소장 이상의 장군 빽을 쓴 동기생들만 사무관으로 나갔다. 지금 그들은 대부분 서울에 자리를 잡았고 열심히 긁어 모은 재물로 지금은 세계 여행도 다니고 지인들과 골프도 치고 음주가무를 즐기며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정상 조형물





소양댐 기념비


기념비 앞에서 한 컷

 

 

 

이런 저럼 쓸데없는 수많은 상념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랫 쪽에 카페와 음식점이 있었다. 막국수와 닭갈비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저런 식당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 유튜브를 보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들린 음식점은 맛은 있을지 몰라도 음식 가격이 터무니 없이 비싸다. 그래서 자전거길 옆에 있는 카페나 음식점을 난 들어가지 않는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찍은 사진을 마누라한테 보냈다. '멀리도 갔네' 하면서 조심해서 오란다. 많은 상념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순식간에 내려와서 의암호 쪽으로 달렸다. 소양 제2교에 도착하여 의암호를 돌아 강촌역으로 향했다. 나무 뿌리가 자전거 도로 위로 솟아 달리기에 불편하다. 약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불랙박스 등 전기기기를 비닐로 덮고 달렸다. 자전거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의암호 옆에는 토지가 퇴적지로 토양이 좋다. 그래서 농작물이 잘 자란다. 옆에는 감자밭이 넓게 펼처져 있고 하얀 감자꽃이 사방에서 피고 있었다. 소양댐과 양구 백두산 부대의 무수한 추억이 감자꽃이 되어 다시 피어오르는 듯하다. 감자꽃은 다시 의암호 위에 피어 오른 운무가 되어 내 마음을 적시고 있었다. 감상과 상념에 젖어 힘차게 페달링을 하면서 의암호반을 달렸다. 오늘도 살아 있음에 신께 감사하고 추하지 않게 삶을 마감하도록 빌어본다. 멀리 강촌이 보인다.

 

 

 


돌아오는 길. 가평을 지나면서, 지하철에서

 

 

의암호 하류로 흐르는 북한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물이 불어서 그런지 다슬기 채취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강촌 다리에 올라가는 가파른 길을 힘차게 올랐다.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서 강촌역으로 올라갔다. 나무 그늘에서 간식을 먹고 텅빈 열차를 타고 호평동으로 향했다.

 

감자꽃이 필무렵 소양댐을 다녀온 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