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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변화와 기회에 대하여

로마의 역사 471 : 로마 제국 175 ( 칼리굴라 황제 30)




로마의 역사 471 : 로마 제국 175 ( 칼리굴라 황제 30 )


 



칼리굴라 황제 30

( 재위 : 서기 37년 3월 18일 ~ 41년 1월 24일 )



반정(反正)의 칼 (계속)

그후 카이레아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다. 상상력을 발휘하려 해도 사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총사령관을 잃은 병사들이 갈 곳은 군대밖에 없다. 카이레아는 라인 강 군단 기지로 돌아간 게 아닐까 생각된다.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북방 방위선을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정착시키는 데 전력을 쏟았다. 방위선 확립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임무였다. 그리고 카이레아처럼 우수하고 충실한 군사 전문가는 그런 임무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카이레아가 군단병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근위대 대대장으로 승진하여 수도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은 칼리굴라가 황제에 즉위한 뒤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후 카이레아의 임무는 칼리굴라의 신변 경호가 되었다. 칼리굴라가 가는 곳이라면 리옹에도, 라인 강 전선 기지에도, 도버 해협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갈리아 북부에도 그림자처럼 따라가는 것이 카이레아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이 생활도 어느듯 4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칼리굴라는 결혼도 하지 않고 계속 독신으로 지내는 카이레아를 동성애자라고 놀렸다고 한다. 여기에 원한을 품고 칼라굴라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수에토니우스지만, 병사로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황제를 그 정도의 원한으로 죽였다는 건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미숙한 채로 끝난 칼리굴라의 성격을 생각하면, 카이레아를 엽신여기고 놀렸다기보다는 일종의 응석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된다. 나이로 치면 아버지뻘인 카이레아도 친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도 인연이 멀었던 칼리굴라를 아버지 같은 심정과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칼리굴라 황제의 언동에는 그토록 충성스럽던 카이레아도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60세가 가까워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대한 뒤의 쓸쓸한 독신 생활뿐이었다. 그런 카이레아가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칼리굴라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 아닐까. 마치 가족의 불상사는 가족이 처리하겠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칼리굴라를 죽인 뒤, 카이레아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게르마니쿠스 동생인 클라우디우스를 데려오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클리우디우스가 끌려오자, 그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으로 돌아가 집합한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게 했다.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다. 다시 말해서 칼리굴라의 삼촌인 클라우디우스도 어디까지나 가족이었다. 카이레아는 원로원이 나서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이것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가부장권이 강한 로마인들의 가족의식이 있었기에 이처럼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정 사실을 인정핳 수밖에 없었던 원로원의 추인으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황제 살해라는 대역죄를 지었으니 죽으라고 요구했을 때, 카이레아는 아무 말로 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동지인 사비누스도 카이레아를 뒤따라 자결했다. 둘 다 대대장인데 마음만 먹었다면 휘하의 2천 명 병사를 동원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폭군 칼리굴라를 죽이고 클라우디우스를 제위에 앉힌 공로자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대역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근위대 병사들에게 주어진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상여금은 두 대대장의 죽음에 대한 병사들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한 보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로마 제국을 생각하고 게르마니쿠스라는 가족 집단의 명예를 생각하면 칼리굴라를 그대로 두는 것은 로마 제국을 망국의 지름길로 가는 것이고 가족의 명에를 실추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두 사람은 칼리굴라 황제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실행햇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러한 결행은 어쩌면 로마가 장구한 역사를 이어가게 만든 로마인의 정신적인 표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것은 아래 사항뿐이다.
 
'서기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 황제가 살해되었다. 아내도 딸과 함께 살해되었다. 

범인은 근위대 대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 그리고 소수의 근위병들이다. 원로원 의원이 가담한 사실은 전혀 없다. 

황제를 죽인 후 황제의 숙부인 클라디우스를 찿아내어 근위대 병영으로 데리고 가서 "황제!" 라는 환호를 받게 했다.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추인했다.

카이레아와 시비누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죽음에 승복했다. 살해에 가담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칼리굴라의 죽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칼리굴라를 테레베 강에 내던지라는 목소리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없었다.

칼리굴라의 유해는 에스퀼리노 언덕 정원 구석에서 서둘러 화장한 뒤 매장되었다. 황족의 묘지인 '황제묘'에는 묻히지 않았고 무덤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칼리굴라 자신이 수없이 만들어 제국 각지로 보낸 그의 조각상은 눈에 띠는 족족 파괴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게 놀랄 만큼 적은 까닭도 그가 피살된 직후에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잊고 싶은 악몽이라도 되는 것처럼 칼리굴라 황제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별다른 기대도 없이 50대의 새 황제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