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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변화와 기회에 대하여

로마의 역사 293 : 고대 로마 289 (안토나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대 옥타비아누스 12)


로마의 역사 293 : 고대 로마 289 (안토나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대 옥타비아누스 12)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대 옥타비아누스 12

      (기원전 42년~ 기원전 30년)

 



악티움 해전(계속)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사랑하는 여인의 주장이라고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 나름대로 전략적인 판단이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군의 등뼈나 마찬가지인 백인대장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번 싸움에는 일찍이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한 백인대장들이 대부분 자원하여 참전했다.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단장을 지내고 부사령관까지 경험한 안토니우스는 용맹한 부대장의 대명사가 된 '카이사르의 백인대장'들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라면 육상전에 아무리 용맹한 백인대장들이라도 그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집트 여왕은 만약 해전에서 패배할 경우의 대비책도 미라 마련해두자고 요구했다. 그래서 작전회의에서 해전에서 패배시 육군과 해군이 모두 이집트까지 철수하여 그곳에서 로마군을 맞아 싸우기로 결정했다.

총사령관은 이번 전투에서 모든 것을 걸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장병들을 싸움터로 이끌고 갈 수 있는 법이다. 설령 패했을 때의 대책을 생각했다 해도 그런 것은 저 혼자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 하고, 작전회의에서 처럼 공개된 자리에서 결정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이것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질질 끌려간 결과일 뿐 아니라, 안토니우스 자신이 총사령관 재목이 아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클레오파트라가 참석하는 작전회의가 거듭될수록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수들은 절망감이 깊어져갔다. 그들은 안토니우스가 없는 것에서 불만을 틀어놓고, 자기는 로마에 충성했지 이집트 여왕의 남편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은 없다고 불평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에 상륙하자 그들은 안토니우스 진영을 이탈하기로 결심했다.

장교가 이탈하면 그 휘하의 병사들도 같이 이탈한다. 날이 밝으면 숙영지 하나가 텅 비는 사태가 속출하게 되었다. 작전회의 석상에서도 여기 저기 빈 자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격분한 안토니우스는 탈영병이 붙잡힐 때마다 사형에 처했지만, 그것은 탈영을 더욱 부채질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여름이 찿아올 무렵에는, 당연히 안토니우스의 세력권에 들어 있어야 할 동방의 제후들 중에서도 이제 옥타비우스 편에 서겠다는 뜻을 밝히는 자들이 늘어났다. 그 선봉이 헤로데 왕이 다스리는 유대였다. 유대인들은 카이사르가 유대 상인의 지위를 그리스 상인과 대등하게 해주었을 때부터 카이사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을 슬퍼한 그들이 카이사르가 아들로 선택한 옥타비아누스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를 이기는 것은 경제적으로 유대인 경쟁자인 그리스 상인들이 다시 우위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스인들도 이 무렵에는 클레오파트라 야심에 말려들어 골탕을 먹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 진영에서 탈영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은 그들에게도 불길한 조짐으로 보였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을 뜻을 밝힌 스파르타가 그리스 전체의 이반을 예고 했다. 유대인과 그리스인과 오리엔트에서 온 사절들이 옥타비아누스의 막사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결전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군자금도 넉넉하고 군량도 충분했다. 군자금과 군량이 부족한 옥타비아누스군이 소모되기를 기다란 다음 결전을 벌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결전을 서둘러야 할 쪽은 옥타비아누스가 아니라 안토니우스였다.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를 등진 장교들이 모두 옥타비나우스를 찿아왔고, 그때마다 정보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적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32세도 안된 젊은 지도자가 안토니우스 부하들을 처리하는 솜씨도 교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안토니우스 진영을 떠나온 장교들은 비록 안토니우스를 버리긴 했지만 그에게 화살을 쏠 마음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휘하에 편입시키지 않고 모두 귀국을 허용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안토니우스 진영에서는 탈영병 수가 더욱 늘어났다. 이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없이 안토니우스가 선택할 수 잇는 길은 해전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토니우스를 따르겠다고 마음을 바꾸지 않은 로마 병사들은 프레베자 만에 정박해 있는 군선에 올라탈 때 놀라운 것을 목격하고 아연실색했다. 돛이 언제라도 펼 수 있는 상태로 돛대 밑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일급 사령관이라면, 전투시 반드시 퇴로를 생각해두고 전쟁터에 나간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내색하서는 안된다. 병사들로 하여금 사령관이 이 전투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로 병사들을 몰아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해전의 경우 그것은 돛의 처리방법에서 나타난다.

고대 지중해에서는 사각돛이 주류를 이루었고,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삼각돛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돛의 모양에 변화가 있었지만, 돛만 달린 순수한 범선은 고대에나 중세에나 상선으로만 이용되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인도양이나 대서양과 달리 지중해에서는 바람의 방향이 수시로 바뀐다. 따라서 모터 역활을 하는 노가 달린 배, 즉 겔리선이 지중해에서는 가장 적당한 배로 되어 있었다. 다만 노잡이가 젓는 노는 어디까지나 모터 역활을 한다. 그래서 겔리선에는 노는 물론 돛도 같이 달려 있는 범선이다. 순풍이 불면 노잡이는 쉬고 돛으로 항해하다가 바람이 멎거나 역풍이 불거나 항구에 진출입 또는 정박시킨 때에는 노잡이가 활약한다.

따라서 노만 사용하는 해전에서는 아군의 배를 얼마나 마음대로 움직이느냐가 승부를 결정한다. 로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대포가 활용될 때까지는, 해전이라고 해도 보병들이 승선하여 적선에 접근시킨 다음 적선에 올라타 싸우는 백병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해전 전쟁터에서는 노가 주력이다. 이무리 순풍이 불어도 돛은 사용하지 않는다. 언제 바람의 방향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며 전투시 갑판에서 장애물이 되고 적이 화공 공격시 돛이 불에 타기 쉽기 때문이다.

지중해가 역사의 주무대였던 시대에는 대서양을 주무대로 하던 르네상스 시대처럼 높은 돛대에 90도 각도로 고정한 활대에 돛을 캐겨놓는 방식은 취하지 않고 돛은 활대에 묶여 있고, 돛대에 고정시킨 활차로 그 활대를 끌어올려 돛을 편다. 즉 돛대와 활대는 서로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이 자주 바뀌는 지중해에서는 돛을 어느 각도로나 돌릴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노만 사용하는 해전에서는 돛은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이 된다. 그래서 전쟁터가 되는 해역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송선에 돛을 단 활대를 아예 맡겨두는 사령관도 있었다. 전투원만이 아니라 노잡이까지도 배수진을 치고 전투에 임한다는 각오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주에 나가는 요트 선수가 불필요한 물건은 하나도 싣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갑판에 돛을 놓아도는 경우에도, 언제든지 활대를 끌어올릴수 있도록, 활대에 매단 밧줄을 돛대에 고정되어 있는 활차에 끼워두는 짓을 절대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에 탄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다고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 병사들이 아연해진 것은 그들이 올라탄 군선의 돛이 언제라도 펼 수 있는 상태로 돛대 밑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날밤 야음을 틈타 10여 척이 탈영했다. 안토니우스가 배에 올라타고, 행차할 때면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다니는 클레오파트라가 승선을 끝낸 8월 말에는 이미 1개 함대에 이르는 60척 이상의 배가 모습을 감추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