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가을 44 : 안보강국의 길을 묻다 14
병역근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종
NSC 위원 8명중 3명이 군대 안가… 지도층 ‘병역불감’ 심각
고대 로마 공화정의 귀족들은 전쟁에 자진해 참여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으로 16년간 이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에 귀족을 대표하는 최고위 관리인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병역의무를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집정관이나 호민관 등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었다. 사회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이르는 말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로마 귀족들에게 불문율과도 같았다. 그들은 자신이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2011년 대한민국 사회지도층에게는 이 말이 공수표가 되고 있다. 병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 현실과 문제점을 짚어본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종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국가안보와 관련한 주요 현안을 결정하는 최고 의결기구다. 1일 세계일보가 병무청 자료를 확인한 결과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총리, 외교통상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정원장, 대통령실장, 외교안보수석 등 NSC 위원 8명 중 3명이 질병 등의 사유로 군대에 가지 않아 병역면제 비율이 37.5%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징병제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안보를 책임지는 최고 컨트롤타워의 병역 이행률이 이같이 낮게 나타난 것은 병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고위공직자 자녀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종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국방위원회 김옥이 의원(한나라당)이 병무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 7월 현재 58개 정부 부처와 기관 등의 4급 이상 고위공직자 아들 1만5581명 중 병역 면제를 받은 이는 774명이었다. 기관별 고위공직자 자녀 병역면제율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33.3%로 가장 높고, 한국은행(27.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12.5%), 기상청(12.3%), 기획재정부·한국방송공사(8.3%), 금융위원회(8.1%), 문화체육관광부(8%) 등의 순이었다. 고위공직자 본인의 경우 병역 면제 비율이 가장 높은 기관은 국가정보원으로 5명 중 2명(40%)이었고, 이어 여성가족부(20%), 문화재청(18.8%), 국회(14.7%), 대검찰청(13.8%) 등으로 나타났다.
병역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경향은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병역을 고의로 기피한 병역면탈자 532명 중 체육인과 연예인, 의사, 유학생 등 이른바 사회관심자원이 49.9%(265명)에 달했다. 체육인이 118명으로 가장 많았고, 유학생 11명, 연예인 31명, 의사 3명 등이었다.
군 입대 후 보직도 문제가 된다. 군대에서 쉽고 편해 선호도가 높은 보직을 ‘꽃보직’이라고 부른다. 고위공직자들의 자녀가 이 꽃보직을 받아 서울·수도권 등에서 근무한 비율이 높게 나타나 일반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국회 국방위 소속 안규백 의원(민주당)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청와대 수석비서진 12명의 아들 가운데 군복무 중이거나 최근 전역한 11명 중 꽃보직에 배치된 경우가 9명(81.8%)에 달했다. 이 가운데 3명은 서울·수도권 복무라는 이중 혜택을 누렸다.
지난 8월 현재 장차관급 고위공직자의 아들 중 군대를 다녀왔거나 복무 중인 37명 가운데 15명은 꽃보직 복무기록이 있고, 서울·수도권 근무자도 15명에 이르렀다. 천영우 외교안보수석의 장남은 육군훈련소 정보병으로, 백용호 청와대 정책실장 장남은 경기도 56사단 부관병으로 근무했다. 권재진 법무부장관의 장남은 지인이 운영하는 경기도 소재 기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차남은 서울 내곡동에 있는 52사단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한만희 국토해양부 1차관의 장남도 52사단 행정병 출신이다. 김대기 경제수석의 장남은 서울 소재 기업체의 산업기능요원으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장남은 교육사령부 부관병으로 일했다. 이용걸 국방부 차관의 두 아들은 서울과 경북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국민들은 병역 의무가 불공평하게 부과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병무청이 최근 실시한 공정병역 국민의식 조사 결과 “사회관심자원에 병역의무가 불공정하게 이행됐다”는 답변이 75.8%에 달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이 병역 등 국민의 의무나 사회적 책임을 모범적으로 실천하라는 요구다. 사진은 서울지방병무청 검사장에서 신체검사 등급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입영대상자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재벌가의 병역면제 현황
재벌가의 병역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점차 실종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창업자의 3, 4대째로 내려올수록 병역 면제가 많아지는 현상이 눈에 띈다. 최근 한 언론이 조사한 결과 국내 11개 주요 재벌가 성인 남성 가운데 올해 초 현재 미정인 경우를 제외한 20대 연령층 115명 중 병역 면제자는 37명으로, 면제율이 32.2%에 달했다. 올해 초 병무청이 조사한 일반인 면제율(29.3%)보다 2.9%포인트 높은 수치다.
범삼성가의 경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군 복무를 마쳤으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질병으로 면제받았다. 이 회장의 조카인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군에 가지 않았다. 이인희 한솔고문의 세 아들 동혁(한솔그룹 명예회장), 동만(전 한솔아이글로브 회장), 동길(한솔그룹 회장)씨는 나란히 면제됐다. 범현대가에서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등이 모두 군에 다녀왔지만,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은 병역 면제자다.
LG가에서는 구본무 LG그룹 회장,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등이 정상적으로 병역을 마쳤으나, 구본진 LG패션 부사장,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 구자준 LIG손해보험 회장의 장남과 차남 등은 면제됐다. GS가의 경우 허창수 회장의 아들 등이 면제됐으며, SK가에서는 최태원 회장, 최재원 SK E&S 부회장 등이 군에 가지 않았다.
이밖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현준 효성 사장, 한진가의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 등도 병역 면제를 받았다.
◆노블레스를 부끄럽게 하는 자원입대
병역을 면제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질병을 고쳐가며 병역을 이행하는 경우도 있다. 시력 이상으로 4급 공익 판정을 받았다가 렌즈삽입 수술을 받고 입대한 조성혁 일병은 “군대에 온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 일병처럼 병역면제대상자 중 면제사유(질병, 학력 등)를 개선해 자원입대한 사람은 최근 5년간 2087명에 달한다. 병무청이 지난 4∼6월 실시한 자원병역이행자 대상 설문조사에서 자진해 복무하려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55.6%가 “병역의무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주변의 권유 없이 본인 스스로 자원입대를 결정한 경우는 62.8%에 달했다. 200만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질병을 고친 뒤 신체검사를 다시 받아 입대 판정을 받은 사람은 71%나 됐다. 자원입대 결심에 대해 “잘했다”는 응답 비율은 89.2%였다. 사회지도층의 병역 이행 실태와 비교되는 결과다. 한석희 병무청 현역입영과장은 “최근 자원이행 입대자들이 늘어 병무청이 이들에게 최대한 병역을 마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며 “일부 사회지도층의 병역기피 행태에 자원이행자들의 사례가 경종을 울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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