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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여름 39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1

 

 

 

 

 

 

우면산의 여름 39 : 광복! 그 굴욕의 명칭 1

 

                                                                                           강남 새벽 풍경

 

날씨의 변덕이 심하기 그지없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면서 새벽 자전거 타기도 가늠이 어려울 지경이다. 우중충한 날씨지만 우산과 비옷을 챙기고 새벽길을 달렸다. 음악소리를 들으며 새벽을 달리는 기분은 나의 유일한 기쁨이기도 하다. 특히 내리막길을 달리는 경우에는 너무나 기분이 좋다. 강남을 돌아 고속터미널 쉼터에 도착하면 대략 40분 정도 걸린다. 

 

며칠전 내 방의 컴퓨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며칠동안 밤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 컴닥터를 연결하여 기사를 불러 그래픽 카드를 바꾸려 하였으나 메인보드가 이상이 있는지 고장은 계속되어 결국 큰 결심을 하여 새것으로 바꾸기로 하였다. DAMON DM-200S, 35만원 거금을 들여 바꾼 컴퓨터는 생생하게 화면이 잘 돌아갔다. 나처럼 팬티엄 4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를  기사에게 물었더니 찿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7~8년을 사용했으니 그동안 고장으로 돈을 들인 것만 해도 엄청나다.  ㅎㅎㅎ 돈이 무엇인지 이러한 인간의 욕구 환경을 충족시켜주니 사람들이 돈에 미칠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요즘 우리집은 아들 장가문제로 집안이 분주하다. 예단비가 오고 한복과 예물을 준비하려 동대문 시장을 가고 예단비를 나누어 건네고 청첩장을 준비하면서 연락처를 확인하고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하였다. 30중반이 넘어가고 있는 자식을 아직 장가보내지 못한 지인들은 부러워하면서도 한편 축하해 주었다. 주변 지인들에게 가급적이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이미 부조를 한 곳은 꼭 연락해야 한다면서 마누라가 더 열심이다. 초.중.고.대학.군.동향. 사회 등 동기생들이 많지만 초.중.고 동기들에게는 생략하고 그 중 꼭 연락하고픈 사람에게만 개별적으로 연락하기로 했다. 또 장소가 대전이라 서울이나 지방에서 추석이 지난 일요일이지만 쉽게 올 수도 없으며 관심이 있거나 잊지 않았다면 마음을 전해 올 것이다. 예식장도 저렴한 곳으로 선택하고 간소하게 하자고 했다. 화환도 가급적 없애고 가족.친지 버스대절도 반대했다. 올 수 있는 사람만 오도록 하고 신혼여행도 가까운 곳으로 하도록 했다. 자신과 양가 부모들의 능력 범위내에서 하도록 권유하고 쓸데없이 낭비하지 말고 그런 돈으로 종자돈을 만들어 모아라고 했다. 일생에 한 번 뿐인데...하며 말끝을 흐린다. 못내 아쉬운 구석이 많은 모양이지만 나의 강한 권유에 조금은 생각하는 듯하다. 마음 속으로 '그래 너도 쪼달리는 가계가 얼마나 불행한 가정을 만드는지를 경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 가정 불행의 대부분은 경제적인 이유와 불륜일 것이다.  

 

그래도 자식눔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지런히 모은 덕에 대전에 조그만 아파트라도 장만하게 된 아들이 장하게 생각된다. 마누라는 자식이 준 생활비를 모두 적금을 넣고 모아서 이번에 아파트 잔금 처리에 모두 보냈다고 한다. 자식에게 아낌없이 쏟아부어주는 어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노후를 자식이 책임질 거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물론 융자를 끼고 매월 이자를 갚아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의 집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는 셋방살이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과거 나의 신혼 시절에 전기세 몇 푼 때문에 집주인에게 항의도 제대로 못하고 눈물만 찔찔흘리던 마누라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최대한 허례허식을 줄이기를 희망해 본다.

 

 

 

폭우와 산사태, 장마로 씨름하다보니 8월도 어느듯 반이 지나고 광복절도 소리없이 지나갔다. 계속된 장마로 행락철을 준비하고 기다리던 동해안을 비롯한 많은 유원지 장사 특수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울상을 짖고 있다고 한다. 수천 수억을 투자하여 준비했던 사람들이 손님들이 오지 않아 허탈감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도 휴가철이라 가족을 동반하여 가까운 계곡이나 수영장, 어린이 대공원, 고향, 시골 전원주택 등을 찿아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은 지난 황금 연휴 귀경길 고속도로가 정체되는 모습은 이런 것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국경일은 그날을 기리는 날이 아니라 쉬는 날, 여행가는 날, 골프치는 날로 변질 된 것은 사실이다.

 

 

 

 

 

지자체에서 국경일이면 달아 놓는 길거리의 태극기는 때가 묻어 거머티티한채로 바람에 휘날리고 있고 정부 관료 및 광복 관련 인사들만 기념식을 하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냥 쉬는 날이 되었다.

 

 

 

광복절에 돌아보는 역사

 

조선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었다. 중국에는 조공(朝貢)을 바쳤고 일본과 여진에는 회유책(懷柔策)을 폈다. 비굴한 사대주의인가. 아니다. 때로는 허리를 굽혔지만, 때로는 죽을 각오로 싸우기도 했다. 당시의 국력과 국제정세에 비추어 가장 유효적절한 생존전략을 추구해 왔을 따름이다. 중앙아시아와 중국대륙을 군마(軍馬)로 휩쓸던 흉노·선비·거란의 나라들은 오늘날 모두 어디에 있는가.

비분강개해 목을 꼿꼿이 세운 채 자진(自盡)하는 것은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괴로운 나날들을 견뎌내는 삶이야말로 지혜와 용기 없이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대륙과 해양의 강대국들 틈에 낀 비좁은 반도에서 창의적 문화, 고유한 언어, 독창적 문자를 지니고 겨레의 터전을 꿋꿋이 지켜온 우리 민족의 삶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기적 같은 생명력의 분출이었다.

국제정치학을 배운 적이 없는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국가의 존립이 '이념의 논리'가 아니라 '힘의 생리'에 의해 좌우되는 냉혹한 현실을 통찰할 줄 알았다. '동북아균형자'의 거창한 꿈은 없었어도, 민족의 역사를 자손만대에 이어가는 지혜를 품고 있었다. '자주'와 '주체'를 입에 달고 사는 오늘의 누군가가 모르는 그 통찰, 그 지혜를.

사회주의 깃발 아래 신(新)국가자본주의를 추구하면서 짝퉁 시장의 물량경제(物量經濟)로 G2 강국에 오른 중국은 몽골·티베트·위구르 등 이민족(異民族)의 땅을 강점하고 그들의 독립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할 뿐 아니라, 오만불손한 언동으로 옛 식민제국의 패도(覇道)를 그대로 밟아가는 중이다. 일본의 교활한 독도 야욕만으로도 울화가 치미는 터인데, 이제는 중국이 우리의 이어도를 넘보려 한다. 제주 해녀들의 '이어도타령' 속에 절절한 한(恨)을 품고 있는 숙명의 섬,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에서 시퍼런 영겁(永劫)의 혼을 뿜어내고 있는 한반도 남쪽 끝 섬, 그 이어도를.

신생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짓밟았던 중국이 지금은 북한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삼고 종주국 행세를 하면서 소위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역사를 중국 변방사(邊方史)에 흡수하려고 안달이다. '굴복을 모르는 고구려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주체'의 북한이 정작 고구려 역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중국에는 입도 벙긋 못하고 있으니, 도무지 고구려의 후손답지 않다.

북쪽만이 아니다.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티베트의 현자(賢者)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만까지 방문했지만, 아직 한국 땅은 밟지 못했다. 중국의 눈치를 살피는 역대 한국 정부의 용렬한 태도 때문이다. 백령도에서 불과 30분 거리인 북한의 공기부양정 기지에는 입을 꾹 다문 사람들이, 해양주권과 무역항로의 요충인 제주해군기지 건설에는 '중국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극력 반대한다.

미국산 쇠고기에는 실체도 없는 광우병 혐의를 덮어씌우면서,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산 불량식품에는 그 흔한 촛불 한 번 켜든 적이 없다. 탈북자들을 붙잡아 북한의 집단공개총살 형장(刑場)으로 묶어 보내는 중국의 반인륜적 행태에도 그저 무덤덤하기만 한 옛 인권투사들의 모습에서 홍위병들의 '반문화적' 문화혁명에 박수를 치던 반달리즘(vandalism)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서글픈 아이러니다.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살아 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시인 롱펠로의 충고다. 미래의 비전도, 역사의 교훈도 모두 외면하라는 뜻일 리가 없다. 낡고 병든 이념의 환상에 눈멀어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읽힌다. 또한 억압과 빈곤밖에 남지 않은 '껍데기 사회주의'를 동경(憧憬)하면서 제 나라의 정체성(正體性)과 건국 역사를 헐뜯는 자기부정(自己否定)에 대한 질책이기도 할 것이다.

이 땅의 옛 어른들은 중국의 성당(盛唐)시대에도 슬기로운 용중(用中)의 길을 모색하며 고뇌했을지언정, 얼빠진 종중(從中)의 그늘로 움츠러들지 않았다. 일제 암흑기에도 처절한 항일(抗日)의 투쟁 너머로 찬란한 극일(克日)의 꿈을 품고 있었다.

선인들의 숨결을 이어온 광복과 건국의 달이다. 나라의 가장 큰 명절인 8·15가 언제부터인지 기념식을 따로따로 치르는 우울한 국경일, 갈등의 건국기념일로 변질되곤 했다. 8·15를 또다시 우울한 축제로 맞을 것인가?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광복! 그 치욕스런 명칭!

 

일제 식민지로부터 우리 민족이 해방된 날이다. 그러나 그 명칭은 우리들에게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명칭이다. 오죽 못났으면 나라까지 망해 먹고 36년 동안 잔학한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전 민족이 노예처럼 살다가 제 힘도 아닌 남의 힘에 의해 해방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명칭인가! 광복은 축하할 일이 아니라 부끄러운 국치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광복의 그날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앞으로의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역사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에 이어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갔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은 우리 민족에게 36년 가까운 오랜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이래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등의 승리에 힘입어 동남아 전 지역과 태평양 지역으로까지 제국의 길을 확대해나갔다. 그렇지만 미국과 벌인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일본 군국주의 체제는 막을 내리고 동아시아 전역에서 일본 식민지 체제도 해체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등 추축국들 형성하고 일본의 대외팽창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미국은 참전을 꺼리며 지원자 역활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화와이 진주만이 일본 함재기들의 의해 기습을 당하자, 미국은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미국은 홀로 일본을 상대하여 태평양에서 전쟁을 치루었는데 처음에는 열세를 면치 못하다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이오지마 전투 등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오키나와 섬까지 진격하였다.

 

맥아더와 니미츠 제독 휘하의 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만 2만 5,000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는 등 일본과 거의 4년 동안 총 30만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는 참흑한 전쟁을 치루면서 일본 본토 공략을 눈앞두고 있던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그동안 비밀리에 개발해온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등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추축국들이 패망함에 따라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의 연합국 국가 수반들이 참석한 1945년의 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은 이미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부터 원론적 수준에서나마 독립을 약속받고 있었지만, "적절한 절차를 밟아' 이루어진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