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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우면산의 여름 25 : 한 장애인의 죽음

 

 

우면산의 여름 25 : 한 장애인의 죽음

 

 

                                                                                  비내리는 서울 새벽길

 

 

지난 초복날 장애를 겪으며 살아오던 처형집 딸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나이 40세 여자, 선천성 심장병을 가진채로 태어나 자라면서 당뇨가 나타나면서 청각을 상실하고 발육도 부진하여 매번 병원을 제집드나들듯이 지내오던 딸이었다. 수시로 혼절하고 집 밖을 나가면 집을 찿아오지도 못하고 언어나 대화 능력도 거의 전무하여 항상 누군가 데리고 다녀야하는 실정이었다. 약은 물론이려니와 심장 수술도 여러번 했고 중환자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던 딸이었다. 그래서 처형집은 돈도 돈이려니와 40년간 전 가족이 갖가지 어려움과 모진 고통속에서 지내왔다. 

 

딸뿐인 처형집은 딸 셋을 두었는데, 둘째 딸이 그랬다. 큰 딸은 10여년 전 시집을 갔으나 아기가 없어 한동안 병원을 드나들며 시댁 사람들로부터 애를 낳지 못한다고 갖가지 모욕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밀 검사를 한 결과 남편이 씨가 없다는 것이 나중에야 판명되었다. 자기 자식이 씨가 없는 줄 모르고 애기를 낳지 못하는 며느리라며 심한 구박했던 시댁은 병원 진단 결과가 나오자 나중에는 아무말도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둘 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부부지만 남편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얼마전에는 주식과 도박에도 손을 댄 모양이다. 아내는 화장품 외판원을 하며 생활비를 힘들게 벌고 있고 지금까지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백수! 돈있는 백수라면 몰라도 돈은 없고 시간만 많은 백수는 수백 만이 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고 부부가 지금까지 부부로 살고는 있다. 막내딸은 미혼으로 아직 직장을 다니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집을 출발하여 한양대 영안실로 향했다. 초복날이라 그런지 지하철에는 그리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동간 사진을 몇장 찍었다.

 

 

 

                                                                                     서초 전철역 

 

 

 

 

 

서초역에서 전철을 타고 잠실을 경유하여 한강을 지나갔다. 멀리 올림픽 대교가 보이고 장마로 흙탕물이 된 한강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시름에 잠겼다. 저 올림픽 대교 탑 꼭대기에 조형물을 세우기 위해 서울시는 육군 항공단에 협조하여 시누크 헬기를 지원받아 조형물을 시누크 헬기로 탑위에 올리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던 중 시누크 헬기 날개가 부딪히면서 균형을 잃으면서 추락하여 조종사들이 죽었던 사건이 있었다. 또 탑 위에는 시위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어떤 노동자는 탑위에 올라가 한동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림픽 대교 탑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말없이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는 듯하다.

 

성수대교가 붕괴돠었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리던 90년대의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수없이 많은 자살자들이 한강에 뛰어들었고 홍수가 나면 서울의 낮은 지대가 침수되었고 제방이 붕괴되어 일산 지역 일대가 침수되기도 하였다.

 

한강 주변은 전망이 좋다. 강변이 바라다보이는 아파트는 같은 아파트라도 전망이 좋아 가격도 더 비싸다고 한다.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88올림픽 도로와 강북 도로, 그리고 많은 한강 다리위로 지나가는 차량의 행렬 등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아파트 창가에 앉아 부부가 커피나 술잔을 기울이는 즐거움이 잇을 것이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가 낀 강변, 비가 내리는 모습, 불꽃놀이 등 강변 아파트는  여러가지 면에서 조망이 좋아 잇점이 많은 편이다.

 

 

                                                                                        탄천 배수시설

 

                                                                                   88올림픽 도로

 

비가 개인 날씨는 청명하다. 비가 오락가락하기를 반복하고 기상 이변이 계속 심화되고 있는 듯하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도 언젠가는 모두 죽음의 문턱을 넘어갈 것이다. 더 많은 부귀를 위해, 출세를 위해, 뽐내기 위해 달리고 있으며 위선과 가식, 그리고 거짓말, 사기, 불법, 탈법, 위장, 편법, 폭력, 강절도, 강간, 마약, 도박 등을 일삼으며 일생을 보내기도 한다. 88도로 저 빗길에 차량을 타고 달리다가 어이없이 마주오던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들이받는다면 개죽음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살아있는 것이 죽은 것이요, 죽은 것이 살아 있게 아닐까?  고관대작이 되고 대기업을 이루고 사회적 저명인사가 되고 유명 연예인이 되고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부귀와 영광을 누리더라도 한 장애인의 죽음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40 평생 남에게 피해 한 번 주지 않았고 죄 한 번 짓지도 않았던 한 소녀가 평생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속에서 살다가 간다면 천국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일까?  죄를 짓는 것이 무엇이며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다 부질없는 허망한 삶이 아닐까?

 

 

 

                                                                             한강 고수부지

 

 

                                                                             현대 아산 병원

 

 

 

요즘 블로그에 고려의 역사를 올리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다. 역사에는 성군만 남는게 아니라 폭군도 남는다.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들의 의도적인 승자의 기록이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삶의 원칙만은 변하지 않는 듯하다.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욕심과 자만은 격룩 멸망의 길로 가는 길이요 인간은 누구나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출세와 권력, 재물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아무리 큰 권력과 재물도 물거품 같은 것이며

 

고려 태조 왕건은 궁예, 견훤과 패권을 다투면서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운좋게 삼한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29명의 처첩들로부터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그 줄충하던 아비 왕건에게 태어난 자식인 태자 무는 태조가 죽고나서 태조의 유명을 받은 박술희의 지원하에 왕위를 이어 즉위하였다. 마지막 왕건은 죽음을 앞두고 수많은 처첩들과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렇게 말했다. " 인생이란 이렇게 다 덧없는 것이야!" 

 

즉위한 혜종은 왕위는 이었지만 무능하기 짝이없는 왕이었고 세력을 가진 호족들에게 시달리다 결국 병마를 얻어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었다. 혜종이 죽을 즈음 시중 왕규의 전횡을 제거하기 위해 왕요, 왕소, 왕식렴, 평산/충주 호족들 등 서경파들이 반란을 일으켜 개경에 진입하여 궁성을 점령하져 시중 왕규와 충신 박술희 등 300여 명의 반대파를 처형하고 정종이 즉위하였지만 그도 결국 왕식렴 등 호족들에게 시달리다가 병마를 얻어 얼마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죽기전 자신의 아들이 어린 탓에 동생 왕소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자신의 자식 목숨을 보장해 줄 것을 왕소에게 약속받고 죽었다. 왕소가 호족들의 지원에 힙입어 정종을 이어 욍위에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한 광종 왕소는 7년간 호족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지내다가 후주 사람인 쌍기를 등용시키면서 그에게서 노비안건법, 과거제라는 획기적인 정책을 건의 받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밤잠을 설치면서 고심하다가 드디어 개혁의 칼날을 뽑아들었다.노비안건법으로 노비를 해방시키면서 호족들의 수족을 자르고, 과거제로 신진관료를 등용하여 호족들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키웠다. 당연히 호족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광종은 개혁에 반대하거나 걸림돌도 작용하였던 사람이나 고변으로 반정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누구던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였는데, 혜종의 아들, 정종의 아들 등 왕족까지 포함하여 수많은 호족들과 신하들이 죽임을 당했다. 광종은 자신이 항상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근위병을 증강하여 배치하였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태자까지 의심하여 죽이려했을 정도로 역모에 민감하였다. 이러한 광종도 16년이란 세월동안 재위하면서 고려 사회의 안정적인 기반을 조성하고 죽었다.

 

광종 사후에 즉위한 경종은 호족들을 달래기 위해 복수법을 만들어 호족들에게 복수의 기회를 주는 등 웃지못할 사태까지 벌어졌다. 노비안건법은 나중에 다시 노비환전법으로 복귀하였고 과거제는 게속 유지되어 고려가 무신을 무시하고 문민을 우대하는 부패한 유교사회로 변질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는 무신정변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과거제는 조선 시대까지 신진관료를 등용하는 제도로 정착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는 유교경전을 위주로 시험이 실시되었고 공리공론에 빠진 사대부 사회는 명분과 허례허식이 만연하였고 권력쟁탈에 파절을 조성하여 피의 숙청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결국 내실보다 겉모양을 중시하는 사회가 되었고 밖을 바라보지 못하고 문을 닫은체 양반들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나라가 되엇으며 결국은 망국의 길로 갔다. 이러한 그들의 유교사회는 명분, 가식, 출세, 부패, 권력투쟁을 반복하면서 오늘날의 우리사회를 만들었다.

 

 

 

                                                                             올림픽 대교 전경

 

 

 

장애인이 대접받지 못하고, 기능인.기술자가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이공계를 기피하고 편하고 끗발좋은 직장이나 직업이 선호받는 사회가 되었다. 능력과 실력이 있어도 학벌.혈연.지연.선후배가 되어야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다.  못생긴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라 성형수술,피부.미용.화장품이 성업중인 사회가 되었다. 외제나 명품 백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외제차와  큰 집이, 비싼 옷을 입어야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다. 엄청난 돈을 벌거나 정치인, 권력층 등 고관대작이라야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다.

 

또 과거제는 우리 나라 부모들의 자식 교육열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대학을 나와야 인간다운 대접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것도 지방대가 아닌 명문대를 나와야 겨우 취업이라도 되니 간판 위주의 사회가 되었다. 부모들의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과외다, 학원이다, 영재교육이다, 지방 껍데기 대학이라도 나와야 대접받은 사회가 되었다. 박사라면 다접받는 사회라 가짜 졸업장과 박사들이 활개를 쳤고, 그것도 국내가 아닌 외국의 대학 학위라야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다.     

 

 

                                                                       한양대 의과대학

 

드디어 한양대역에 도착하여 계단을 올라가면 본관이 나오고 비탈길을 올라가면 한양대 의과대학이 나온다. 비는 그쳤으나 바닥은 물기로 가득하다. 한양대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환자를 방문하거나 간호하기 위해서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다.

 

 

                                                                             한양대학 병원

 

                                                                                  종합검진센타

 

                                                                                장례식장으로 올라가는 길

 

                                                                     복도에는 조화들로 가득하다

 

조화는 개당 10만원을 웃돌고 있다. 돌아가신 분의 권위와 위세를 나타내는 조화는 장례문화에서 가장 빨리 없애야 할 문제이다. 배달하는 업체는 리본만 교체하여 재탕하기 일쑤고 꽃집들의 거품은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고 있다. 조화가 없으면 가문이 빈한하고 보잘것 없다는 사고가 팽배한 한국의 유교사회가 빚어낸 외형문화가 가져다주는 병폐이기도 하다. 마음이 중요하지 겉치레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화를 보내는 것보다 차라리 돈으로 부조를 하는 게 유가족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3일간 장례를 치르고 벽제 승화원에서 화장을 한 다음 분당의 스카이 케슬 납골당에 안치하였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벽제 승화원에는 각종 상조회사 버스와 리무진들이 즐비했다. 승화원에는 화장하는 화구가 20개 정도 있는데 하루 종일 사망자를 처리한다고 한다. 순번 대기표를 받아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면 관을 이동하여 화구에 넣는다. 유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복도 가득하다. 한시간 반 정도 지나면 휴게실 화면에 완료가 표시되고 유골함을 유가족들이 들고 나온다. 수많은 유가족들이 울고불고하면서 유골함을 들고 나올때는 숙연해지기도 한다. 나이를 불문하고 한 줌의 재로 변한 육신의 잔해를 들고 나오는 가족들의 심정은 오죽할 것인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찿아온다. 나도 언젠가는 저처럼 한 줌의 재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은 아니라는 마음이다. 모두의 얼굴에는 시름과 한숨,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것이라는 마음에 부자도 빈자도, 사악함과 탐욕도, 고관대작과 실업자도 모두가 똑같은 모습으로 같은 길을 간다는 사실이다. 죽음은 유가족들 뿐만 아니라 친지, 친척, 친구 모두에게 자기반성과 슬픔을 가져다 준다.

 

해병대 군복을 입은 장병들이 여럿 보였다. 아마 이번 총기 및 자살 사고로 죽은 병사의 전우들인 듯하다. 대위 계급장과 부사고나들, 수사관들, 유가족들이 같이 바깥 휴게장소에 둘러 앉아 연신 소주잔을 들이키며 무언가 대화를 하면서 설득작업을 벌이는 모양이다. 젊음을 어이없이 전우의 총기에 사망한 병사들에게 애도를 보낸다. 유가족들의 참담한 아픈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드디어 우리도 화장이 완료되어 모두 버스에 올라타고 다시 빗속을 한 시간 이상 이동하여 분당 남골당으로 향했다.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다가 그치고 또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장마의 마지막을 시위하는 듯하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피곤한 얼굴에 잠들고 버스는 빗속을 똟고 납골당으로 향하고 있다. 분당을 지나 광주가는 길 고개를 넘어 조금가다가 좌측으로 꾸불꾸불한 마을 길을 올라갔다.

 

드디어 도착한 곳이 '스카이 케'슬이라는 납골당. 현관에는 직원들이 모두 나와서 일렬로 서서 공손히 절을 하면서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현관에 보니 이 곳은 얼마전 자살한 SG 워너비 리더 채동하가 잠든 곳이라 했다. 지하층부터 위로 5층까지 1,2층을 제외하고 수천 구의 납골함을 모실 수 있는 아파트형 납골당이다.

 

팜프렛을 살펴보았는데, 각층은 1단에서 8단까지 구분되며 지하층은 명칭이 무지개, 3층은 봉황, 4층은 황제, 5층은 천상으로 부르며 각 단에는 개인단과 부부단이 있다. 안치단가표에 의하면 처음 등록비가 지하층 1단은 개인단이 180만원에서 부부단이 360만원, 3층은 개인 300-400에서 부부 600-800만원, 4층은 개인 400, 부부 800-1200, 5층은 개인 800, 부부 1600만원이며, 단별로는 지하층은 1단이 180, 4-5-6단은 450, 7-8단이 250-350, 3층은 1단이 300-800, 4-5-6단이 750-1700,6-7단이 600-1700, 8단이 450-900,  4층은 1단이 400-1200, 4-5-6단이 1000, 7-8단이 700-850, 부부단은 1층이 800-1200, 4-5-6단이 2000-2200, 7-8단이 1400-1800, 5층은 1단이 개인 800, 부부1600, 4-5-6단은 개인이 1500-1750, 부부가 3000-3600, 7단이 2500만원이라 했다. 결론적으로 지히층-3층-4층-5층 순으로 비싸지며, 각 층에서 1단이 가정 저렴하고 2-3, 7-8단이 비슷하며 사람 키높이의 4-5-6단은 가장 비싸다. 납골당을 경쟁적으로 만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던지 경쟁적으로 달려드는게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혐오시설로 지을 지역이 마땅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정말 자식을 위한다면 상조회사에 가입하여 납골당 비용까지 미리 예치해 놓던가 아니면 능력이 없으면 행방불명되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장례식장 비용, 장례용품, 차량 임대비, 화장장 비용, 점심값, 납골당 비용을 합치면 선택 사양에 따라 다르겠지만거의 최소한 수천 만원을 웃돌 전망이다. 자연장, 수목장이 있으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돈이 없으면 납골당은 커녕 땅에 묻히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강물이나 산에도 뼈 가루를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고 하니 기가찰 노릇이다. 죽어서도 유가족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죽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살기도 힘든데, 수천 만원이라니...... 

 

 1층에서 간단히 교회 목사 주관하에 예식 절차를 마친다음 안치할 장소로 올라갔다. 1층부터 위로 갈수록 더 비싸고 처음 등록비용도 수백 만원에서 수천 만원까지이며 매년 관리비를 별도로 납부하여야 한다. 관리비도 일반실은 최저 년 5만원에서 특별실 7만원이다. 5년씩 선납이란다. 조카는 다른 곳에 장소가 없어 가장 비싼 5층으로 올라가 안치되었다. 조카야 힘들었던 삶 모두 잊고 부디 고이 고이 잠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