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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매천야록'

 

  '매천야록 (梅泉野錄)'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개화와 망국의 역사... 

 

황현(黃玹, 1855.12.11-1910.9.10) 철종 6년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어 일찍이 스승인 왕석보는 황현이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이라 예견했다. 1878년 24세 때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온 황현은 이건창,김택영 등과 교우하면서 차츰 문재를 떨치기 시작하더니 한말 삼재중 한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1883년 29세 때 부모의 원대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밀려나는 것을 겪고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1888년 34세 때 부모의 구너유로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암담한 정치 현실에 절망하여 벼슬길을 영영 단념한 뒤, 전남 구례 월곡 마을에 은거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동비기략東匪紀略> 등을 썼다. 1910년 56세 때 일제의 의해 끝내 나라가 강탈당한 소식이 전해지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

 

 

<매천야록>은 매천 황현이 1864년(고종원년)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 사십칠 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역사책으로, 6권 7책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개화와 척사의 갈등 속에 망국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환현은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민족의 존망을 걱정하는 지식인의 눈으로 당대의 역사를 기록했다.

 

황현은 서른이 되기 전에 과거 초장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그를 시골 출신이라 하여 둘째로 내려 놓았다. 이에 그는 조정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절감하고, 더는 과거를 치르지 않고 벼슬길을 단념했다. 오 년 뒤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다시 생원 시험에 응시하여 장원했지만, 역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뒤 다시 정권을 잡은 수구파 민씨들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를 보고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 이라 꾸짖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리산 아래 서재를 마련한 황현은 삼천권이나 넘는 책에 파묻혀 독서와 학문에 전년했다. 시대를 걱정하는 그의 고나심은 언제나 역사적인 현실에 가 있었다. 유건ㅁ에 학창의를 입고 돋보기를 쓴 그의 사진을 보면, 정면을 매섭게 쏘아보는 분이 인상적이다. 그는 그 매서운 눈으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본 것이다.

 

그는 동학을 비적이라 표현했고, 의병도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 역시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소식을 듣고 자결하기 직전에 남긴 마지막 시에서"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탄식한 것처럼, 그는 자기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다.

 

대원군의 정치와 명성황후와의 반목, 민씨들의 부정부패, 외세의 침입과 민족의 항거, 개화와 척사, 동학의 봉기와 의병의 투쟁, 고종과 순종의 무능력, 북간도와 미국.멕시코.러시아로 이민간 동포들의 고생과 활약, 지배층과 외세에 시달린 민중의 수난, 독립협회와 민권의식, 강제적인 을사조약에서 한일합방까지 숨 가쁘게 전개되는 개화와 망국의 역사를 오늘날 다시 읽어 보는 것도 값진 일이라 생각한다.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집권자들의 무능력과 부정부패, 우리나라를 합병하기 위해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일제의 악랄한 행동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역자만이 아닐 것이다. 망국의 시대, 그 한 시대를 살다간 지식인의 참모습을 보면서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 서초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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