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순리적이고 상식적인가? 오늘날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만적(혹은 고도화된) 침략전술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결코 상식의 바탕 위에서 흘러가지 않는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기술(記述)된다고 해도 그리 큰 비난은 받지 않을 것이다. 몽골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바투는 칭기즈칸의 첫째 아들 주치의 둘째 아들이다. 그러니까 칭기즈칸의 손자인데, 칭기즈칸의 힘이 아직 미약하던 시절 아내 부루테가 이웃 부족 족장에게 능욕당해 낳은 아이가 주치이므로 바투 역시 아버지처럼 정통성을 갖지 못하고 몽골 본국과 거리를 두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바투는 주치의 영지였던 러시아 지역의 초원을 물려받아 동유럽 정벌에 힘을 쏟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필자는 이 가정만큼은 해보고 싶다. 만약 바투가 계속 서벌(西伐)에 나섰더라면….
1220년, 일 년 안에는 누구도 정복할 수 없다는 호레즘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단 3일 만에 초토화시킨 칭기즈칸은 몽골 제국의 가장 유능한 장군인 제베와 수베에테이에게 2만 병력을 주어 서쪽을 정벌토록 했다. 도주한 호레즘의 술탄 무하마드 알라 앗딘을 추격하는 것이 외형의 이유였지만, 속뜻은 유럽을 정찰하고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몽골 최초의 유럽 원정은 저승사자 제베와 수베에테이가 이끄는 2만 군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카스피해 서쪽의 아제르바이잔 기사단을 초토화시킨 다음 헝가리 군대도 쉽게 물리쳤다. 이는 칭기즈칸 사후 바투의 원정으로 이어졌다. 바투의 유럽 원정은 헝가리는 물론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의 연합국마저도 무너뜨리고 독일과 러시아 지역도 유린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2백 년간 몽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러시아 각 공국의 영주들은 때마다 킵차크칸국 칸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했다.
만약 이 와중에 바투의 작은 아버지인 오고타이칸(두 번째 칸)이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바투의 서진은 계속되었을 것이고 동유럽마저 몽골제국과의 전쟁에 휘말림으로써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사가 씌어졌을 것이다. 헝가리와 폴란드, 독일뿐만 아니라 이태리, 프랑스와 바다 건너 영국까지 몽골 기마병의 말발굽에 무너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고타이칸 죽음에 따른 회군과 함께 유럽 원정은 중단되고 이곳에 킵차크칸국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몽골의 역사는 우리 세계사에서 외면 받았고, 지금도 외면 받고 있다. 여전히 세계사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과 동유럽을 중심에 놓는 세계관이다. 심지어는 몽골제국을 야만과 약탈로 설명하는 중국과 서양의 가치관까지 그대로 옮겨놓고 가르치고 있다.
자신들만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은 몽골을 무지몽매할 몽(蒙)자에 오래된 옛 고(古)자를 써서 몽고라 칭한다. 터무니없이 하찮고 모욕적인 표현이다. 투루크를 뜻하는 돌궐(突厥)역시 ‘날 뛰는 켈트족이란 뜻이다. 훈족을 칭하는 ‘흉노(匈奴)’ 역시 ‘시끄러운 종놈’이다. 그들 위에 군림했던 몽골제국에 대한 서양인들의 증오심 내지 비뚤어진 열패감은 다운증후군을 발견한 영국인 의사 랜던 다운이 이 병을 엉뚱하게도 ‘몽골리즘’이라 명명한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몽골제국과 그들이 건설한 실크로드를 안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에 눈을 뜨는 것이다. 아울러 동유럽 중심의 세계사 교육이 얼마나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역사는 자연발생적이지만, 상당수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제국주의 발흥 이후 세계사는 서구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오도된 경우가 태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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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몽골에 5월8일과 9일 양일간 국빈방문을 환영하는 몽골시내의 입간판 |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5월 7일부터 15일까지 몽골,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3개국을 순방하고 돌아왔다. 지구본에서 보았을 때 몽골의 서쪽으로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쳐 천산산맥과 사마르칸드를 건너면 카스피해가 나오고, 그 서쪽 연안에 아제르바이잔이 자리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면(비행기로 3시간 거리) 페르시아만의 아랍에미리트가 나온다. 전형적인 실크로드다.
위에서도 설명되었지만, 중앙아시아 독립국가연합(CIS)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은 몽골제국의 식민지로서 중앙아시아와 서유럽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한 중간 거점이었다. 따라서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순방은 과거 실크로드(천산북로)를 죽 가로지르는 여정이다.
실크로드는 그냥 문물교역의 동선만이 아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의 문물이 서로 만나고, 섞이고, 교환되면서 흘러 다녔지만, 실크로드는 한 부족, 종족,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전쟁터이자 치열한 격전지의 성격이 더 짙다.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국운이 달라질 수 있었기에 한족과 북방의 훈(흉노), 투르크(돌궐), 여진족 등은 실크로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고, 이 싸움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서유럽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결코 서유럽이 동아시아보다 우월한 문명이나 위치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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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눈이 내린 울란바타르 중심가, 번화가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70년대 초반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노무현 대통령 방문 환영 입간판이 보이다. | 오늘날 실크로드는 새로운 주목을 요구하고 있다. 실크로드는 부산에서 몽골을 거쳐 모스크바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두바이까지 연결된다. 유럽연합(EU)이나 북미 경제권을 능가하는 거대한 경제권이다. 특히 석유 등의 자원전쟁이 격화되는 작금의 세계정세에 따라 실크로드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대통령의 갑작스런 아제르바이잔 방문 역시 이 나라가 지니고 있는 석유자원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실크로드에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중앙아시아 지역은 새로운 ‘블루오션’이다. 실크로드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과거 몽골제국이 형성했던 광대한 단일경제체제를 재현할 수도 있고, 이 바탕에서 우리의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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