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16
통곡의 벽
4. 유태인들의 생활 영역
유럽 각국의 유태인 추방
디아스포라 시대의 유태인들이 겪은 가장 큰 고난은 거의 전유럽에서 일어난 유태인 추방일 것이다. 먼저 조직적으로 유태인을 추방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유태인들이 영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초반 경으로 상인과 공인으로 활약했으며 부가 축적되자 왕이나 지방의 영주들에게는 돈 줄이 되었다. 그런 차입이 빈번하다보니 부채가 쌓이고 이자까지 늘어났다. 그래서 왕이나 지방 영주들은 부채를 들거나 없애기 위해서 유태인들에게 세금을 배가시키고 트집을 잡아 그 지역에서 내 쫒기도 하였다. 유태인들로부터 돈을 빌려쓴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유태인들이 고리대금업자나 수전노로 보였을 것이며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자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도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1144년 영국 '노르위치' 지역의 한 마을에서 '휴우'라는 한 소년이 결혼 잔치에 다녀오다가 길에서 행방불명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족괴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인근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구정물 구덩이에 빠져 죽은 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누군가가 유태인이 소년을 잡아 피를 뽑아 마시고 구덩이에 쳐 박았다는 소문을 퍼뜨렸는데 이 소문이 삽시간에 마을 전역으로 퍼졌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이 인근에 살고 있던 유태인 19명을 잡아 매달아 죽였다. 이 소문은 영국 전역으로 퍼졌고 유럽 대륙에도 전해졌다. 이 소문은 윤색되기도 하였는데 유태인들이 그들의 명절인 '과월절'에 기독교도들의 피를 포도주에 섞어 마신다는 중상으로 번지기에 이른다.
1272년에서 1307년 사이 영국의 '에드워드왕'의 치세 기간에 대대적인 유태인 추방운동이 벌어졌다. 영국에서 쫒겨난 유태인들은 바다 건너 프랑스로 이주했다. 프랑스도 인식이 좋지않던 유태인들을 반길리가 없었고 그들도 추방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독일로 갔으나 독일도 수많은 소공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들 사회에서도 유태인을 대체로 반기지 않아 유태인들은 마음편한 소공국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살았다.
스페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의 유태인들은 이슬람 국가 시절에는 황금기를 누렸으나 13세기 중반 아랍권이 물러가고 기독교 국가가 세워진 후 유태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받았다. 대대적인 개종 운동은 1319년부터 착수되어 1350년, 1415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고, 약 50만 명에 달하는 유태인 가운데 30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많은 기독교 개종자들은 계속 거주권을 유지하고 상류사회에 속해 살았다. 그러나 위장 개종자들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유태인을 미워한 군중들의 마구잡이식 행패로 피해를 입은 유태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독교 교회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유태교를 증오했으며 군중들은 유태인을 미워하고 싫어했다.
개종을 거부한 스페인 유태인들은 '포르투칼', '북아프리카'와 '오스만 터키' 등지로 옮겨 다녔다. 포르투칼로 간 유태인들은 또 다시 쫒겨나 '암스텔담'이나 남미로 옮겨 갔는데 남미로 간 유태인들이 '카리브 해역'으로 번져 갔고 일부는 그곳에서 '북미 대륙'으로 진출한 첯 번째 그룹이 되었다.
유태인 밀집도시 '게토'
중세 후반부터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 생겨난 유태인 격리 집단 거주 구역인 '게토'는 기독교도들에 의해 개종 압력이 지속되는 한편, 유태인과의 접촉은 가급적 금기시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박해로 유태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벽으로 둘러싸인 집단 거주 지역에 모여 살았다. 이것은 서로의 편의에 의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듯 하다. 게토는 이탈리아와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쪽에 많이 만들어 졌으며 상대적으로 폴란드를 제외하고 동부 지역은 적었다.
게토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주민들의 출입을 위한 큰 대문이 있다. 게토 내에 사는 유태인들은 아침 일찍 대문을 나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지만 날이 저물면 대문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게토 내에는 한가운데 넓은 통로가 있고 양측에 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통로 중앙에는 회관 구실을 하는 건물이 있고 다른 한 끝에 유태인 공동묘지가 자리잡은 형태가 흔했다. 삶과 죽음이 한 선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유태인들의 믿음이 잘 드러난다.
게토의 규모는 적게는 2백 명에서 많게는 5-6백 명으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천 명이 넘는 게토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게토에서는 유태교의 랍비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이 영위되었으며 거주민들의 원활한 자활을 위한 자문 역활을 했다. 가난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고유한 종교와 문화, 그리고 전통을 이어나가면서 안온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었다. 게토는 대게 후미진 곳에 자리 잡았고 그 근처에 집시나 창녀들이 몰려 사는 곳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유태인들은 게토 밖을 출입하려면 가슴에 노란 마크의 별을 달고 다녀 보통 사람인 크리스찬과 구별되게 했다. 노란 마크는 1215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내린 교황령에 의해서인데 유태인들은 열등한 민족이어서 가슴에 '부끄러움의 표시(Badge of the shame)'를 달아야 한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게토는 18세기 말과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나치스 독일 치하에서 가장 악명높은 것은 '바르샤바 게토'로 한때 50만 명의 유태인이 집단적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이슬람권 영향을 받은 스페인 등지의 유태인들을 '쉐파르딤(Separdim)'이라 부르며 독일을 중심으로 동구권 지역의 유태인들을 '에쉬케나짐(Ashkenzim)'이라 부른다. 이들 두 갈래의 유태인들은 오랜 기간 동안 몸 담아 살아온 지역의 문화권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활했기 때문에 각각 다른 유형의 문화적 성격을 가진 유태민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13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서 추방된 유태인들은 독일로 많이 몰려 갔고, 살길을 찿아 동부 유럽으로 옮겨갔다. 수적으로 스페인계 유태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이들은 이 지역에서 오래 동안 살면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언어로 알려진 '이디쉬'를 만들었다. 이디쉬는 독일어와 히브리어와 합성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스페인계 유태인들은 스페인어와 히브리어를 혼합한 '라디노'라는 언어를 개발했는데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방의 유태인들간에 사용되고 있다.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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