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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14

 

'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14

 

맛사다의 정상. 그 당시의 회의장소, 물저장소, 투석기로 던졌을 돌들이 쌓여있었고 그 유적들.

 

 

* 유태인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2. 봉건주의 시대의 유태인들

 

장사꾼이 된 '아웃사이드'

유태인 사회가 중동과 이탈리아, 유럽 여러나라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4세기경부터 로마 제국은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그즈음 아시아 유목민 '흉노족'이 중앙아시아를 휩쓸고 유럽으로 밀려들자 그 여파로 '동코트족'과 '서코트족'이 점차 서진을 하면서 로마 쇠퇴의 계기가 되었다. 5세기에 이르러 로마가 동.서로 분리되고 서로마가 코트족에 시달리다가 멸망하자 유럽은 다양한 지역의 봉건주의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런 가운데 유태인들의 거주 지역은 전유럽으로 확산되었으며 당시 국경이 없는 국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곳에 정착해 살았다. 이미 나라가 없어진지 몇 백 년이 흘러 완전한 세계인이 되어 있었다.

 

유럽의 봉건사회는 기독교가 지배하는 세계로 왕/영주.귀족/기사/사제.농노로 계층이 형성되면서 전유럽 지역에 확산되어 갔다. 이런 사회 체제 속에 기독교도가 아닌 유태인들은 끼어들지도 못하고 변두리 지역에서 붙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아웃사이드' 였던 것이다. 당시 교황을 중심으로 기독교 주교들이 유일한 신앙 체계로 정치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는 유태인들은 개종 압력을 받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도시 변두리 지역 유태인 집단촌인 '게토' 속에 갇혀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며 정치.사회적으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러한 여건속에서 장인과 상인을 천시하던 당시의 사회에서 유태인들은 생계를 위해서 물건을 만드는 공인이나 장사에 전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런 직종은 돈을 만지는 직업이어서 거꾸로 유태인들은 부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왕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도 유태인을 적극 이용했다. 물산 장려는 물론 필요한 통행도 세금만 내면 자유로웠다. 한번 이런 직종에 종사하기 시작하자 유탸인들은 전유럽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동족들과 횡적으로 서로 연결되면서 국경을 넘어 무역업을 활성화해 나갔다. 농토를 갖도록 인정되지 못했던 유태인은 무역업.금융업.제조업자로 성장하게 했고 돈 많은 민족으로 발판을 굳히게 만들었다.

 

기독교가 전횡하던 중세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모든 정신 세계가 기독교 일변도 였다. 모든 정치.사회적인 판단의 근거는 교황.주교.사제들에 의해서 농단되고 있었으며 이성을 토대로한 지식 산업의 성장은 불가하였기에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른다. 종교가 인간생활을 너무 관여하게되면 모든 법적인 절차와 판단은 기독교적인 정신에 입각하여 판단되어야 하고 다른 어떠한 이성적인 판단도 허용되지 못했던 시대이다. 이것이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면 발생되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7세기를 넘어서면서 이슬람 국가들이 생겨났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슬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간을 오가며 장사와 무역을 자유로이 할 수 있었다. 물론 양측에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았고 스파이로 지목되어 고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거간꾼으로서의 유태인이 필요했고 그들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기독교권보다 이슬람권이 그래도 유태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서너 세기가 진행되면서 유태인들은 점점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러자 경제적으로 궁핍한 왕이나 귀족들이 돈이 궁하면 으레 유태인들에게 손을 내밀 정도였으며 유태인들은 돈을 꾸어주면 반드시 이자를 받았다. 돈을 빌려간 권력자들이 돈을 갚지 않으려고 갖가지 핑계를 대어 유태인을 쫒아내거나 죽임을 당하는 경우고 있었다. 그러나 유태인은 모든 박해와 질시를 받으면서도 동족간에도 이자를 받는 철저하게 계산적이며 장사 원리를 지켰다. 누구던지 돈을 꾼 후에 원금과 이자를 제대로 갚지 않은 사람은 이후 절대로 상대하지를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로 거래선을 바꾸었다.

 

이 시기에 유태인들이 모두가 장사꾼이나 제조업자로 변신한 것은 아니다. 체제밖에서 살았던 유태인은 체제와는 관계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가 있었는데 천성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유태인들에게는 정말 호기였다. 유태인 사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자리잡은 '시나고그'의 '랍비'를 중심으로 한 '토라' 연구 및 '하나쉬' 연구 그리고 이 연구에서 비롯한 '탈무드' 공부가 전성기를 맞았고, 거주 국가의 고전 연구도 활발해 유태인들의 지적인 전통을 이어갔다. 체제밖에서 유태인들은 각 지역을 오가며 새 문물과 지식을 넓혀갈 수 있었으며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학문 영역과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지적인 욕구를 자유로이 채워갈 수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외국어와 외국 문물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갖춘 종족으로 유대민족이 단연 으뜸이었다.

 

 

황금기 누린 이슬람권 유태인들

같은 아브라함 후손이며 모세와 예수까지 선지자라고 모시는 이슬람교는 8세기 후반 '마호메트'에 의해 비롯된다. 이슬람교가 탄생했을 시절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나 디아스포라 생활을 시작한 지도 여러 세기가 흘렀고 유럽 세계는 초기의 온갖 탄압을 승리로 장식한 기독교의 독무대가 되어 있었다.

 

한번 세상에 나오자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또 한손에 칼을' 이라는 구호처럼 기독교의 전도와는 차원이 다른 방법으로 잠깐 사이에 중동, 아라비아 반도, 북아프리카 지역은 물론 지중해에서 인도양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휩쓸었고 유럽까지 손을 뻗는다. 우선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해 스페인을 손에 넣은 다음 피레네 산맥을 넘어 한때 프랑스까지 넘보다가 기독교권과 '뚜르 전투(732)'에서 패해 유럽 진출이 좌절되었다.

 

스페인에 진출한 이슬람 세력이 세운 나라가 '무어 제국'이다. 711년에 탄생한 무어 제국은 그 자리에서 5백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슬람 지배를 유지했다. 정복자 이슬람인들은 정복지내의 기독교도와 유태인들을 똑 같이 대우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타민족, 타종교의 지배 아래서 생활한 습성이 몸에 밴 유태인들이 비위에 덜 거슬렸을 것이며 경제적인 관리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 때문에 유태인들을 더 선호하게 된다.

 

정복지의 이슬람은 유태인들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나 외국 문물 이해 능력이나 항상 책 일기를 습관처럼 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무언가 우수한 민족으로 보았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무어인들 지배 아래 높은 지식인으로 대접을 받았으며 폭넓은 자유가 허용되었다. 여러 지역에 유태인 종교 및 민족 학교격인 '에시바'가 설립되었고 우수한 랍비도 쏟아져 나왔다. 중세의 기독교권의 종교적 구속에 이성은 사라지고 깊은 잠에 빠져 이지의 발전이 정체되어 있던 여타 기독교권의 여러 유럽 지역과는 달리 이베리아 반도의 무어 제국은 이슬람 문화의 꽃을 피움과 동시에 유태인들이 가장 자유롭게 자신들 문화의 꽃도 피울 수 있었던 시대였다.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 문화의 꽃이 활짝 핀 이 시절, 이 지역에서 유능한 유태인들은 이슬람 상류 사회에 속해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수도원이나 서류 창고 속에 잠자고 있던 고대 희랍과 로마의 서적이 아랍어,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유태인 학자들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히브리 문학과 고대 희랍 문학도 모두 이들의 손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토라의 아랍어 번역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유태인들은 디아스포라 시기 동안 이 스페인의 이슬람 제국에서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종교적으로 탄압이 없고 사회적으로 대접 받으며 학문적으로 비약할 수 있는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누린 황금기로 꼽는다. 그러나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은 유태인 집단 촌락인 '게토' 에 갇혀 살면서 모든 자유와 사회 참여가 제한을 받는 등 기독교권으로 부터 많은 학대를 받으며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 한 고비가 성지 회복에 나선 '십자군 원정'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