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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11

'갈등의 핵, 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11

 

리조트에서 바라 본 갈릴리 호수의 야경

 

5. 두 개의 왕국으로 분열된 남북조 시대

 

209년간 지속된 북의 이스라엘

사울왕에서 다윗왕, 그리고 솔로몬으로 유태인 왕국이 이어지면서 유태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두 개의 왕국으로 나누어 분리하게 된다. 이를 남북조 시대라 지칭해도 좋을 것이다. 분열은 국력의 약화를 의미하는데, 이민족의 침입으로 북의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존속 기간은 불과 209년(기원전 931-722)이었다. 구약을 보면 이 기간 동안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9개의 왕조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5년 전후였으며 어떤 왕은 7일간 재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수명을 다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암살되거나 비명에 갔다.

 

구약의 열왕기를 보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이 죽거나 암살되기전에는 반드시 예언자가 나타나 율법을 위반한 그를 규탄하고 멸망을 예고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이스라엘 건국 후 반 세기가 흘렀을 때 '오므리'가 왕위에 올라 그런대로 나라를 다졌으나,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를 이었다. 아합은 '시도니트' 종족 '이세벨'이란 공주를 아내로 맞았는데, 이 여인이 이웃 종족들의 우상인 '바알'이란 신을 궁중내에서 섬기면서 어린이를 우상의 공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율법에 의해 사유재산제도가 정착되어 있던 관습을 무시하고 이웃 백성의 포도원을 빼았기 위해 그를 모함하여 죽이는 등 예언자 '엘리야'는 "나봇의 피를 핥던 개들이 같은 장소에서 네(아합)의 피를 핥으리라!(열왕기 상 21:19)라고 규탄하며 재앙이 올 것을 예언한다.

 

그로부터 12년 후 아합은 전쟁터에서 죽고 '예후'라는 장군이 전권을 장악, 왕후인 이세벨과 아합의 가족들을 도륙한다. 그래서 또 새로운 예후 왕조가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209년을 지속하다가 강력해진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는다. 앗시리아와 10년에 걸친 싸움끝에 결국 멸망하면서 명맥이 끊긴다. '사마리아'를 앗시리아가 유린하고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을 그 지역에서 쫒아낸다. 이로써 12지족 가운데 10개 지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면서 이웃 나라 타민족에 동화되거나 남쪽의 유대 나라로 흡수되거나 아라비아 반도 남단 예멘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호리에서 북한강변 입구에서 쉬면서 산을 바라보니 벌써 진달래가 피었다. 진달래도 목련처럼 성미가 급하고 참지를 못하는 종류인가보다. 아직 수목들이 잎이 나기전이라 바위 틈 사에에서 피어오른 진달래는 특히 눈이 잘 띤다. 소나무와 바위, 진달래가 어우러진 풍경은 보기에 너무 좋다. 매화도 피었고 생강나무도 꽃을 피웠다. 봄을 알리는 첨병처럼 우리곁에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날씨가 풀리자 북한강변 일대는 주말이라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수상스키장도 만원, 음식점도 만원이다. 자전거길 주변 음식점에도 자전거족은 물론 일반인들이 사람들이 차량을 몰고 와서 주변 풍경을 즐기면서 음식 먹기에 열중하고 있다.

지옥같은 서울, 천국같은 서울을 벗어나서 주말을 조금이라도 자연과 가까이 즐기려는 사람들이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이곳 조안리와 금남리 일대는 춘천이나 강원도 방향을 가는 길목에다가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든다.

물의 정원 일대는 사람도 많고 각종 가족단위로 수레가 달린 자전거나 마차들이 자전거 도로를 달린다. 강변 산책길에는 북한강의 비릿한 물향기를 맡으려는 사람들로 산책로가 붐빈다. 가족, 연인들이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산책을 하면서 자연을 즐기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인간은 자연의 위대한 모습에 항상 겸허함을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 가족이나 연인이 더욱 사랑스럽고 의지하고픈 대상인지도 모른다. 이곳에 봄꽃이 만발하는 때 쯤에는 마누라도 구경시키고 싶다.

 

뒤이은 남쪽 유다왕국의 멸망

남쪽의 유다왕국은 북의 이스라엘보다는 백여 년 더 오래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유다 왕국 또한 345년(기원전 931-586) 동안 유지하면서 내우외환이 그칠날이 없었다. 유다 왕국은 다윗의 자손들이 오랜 기간 왕위를 누렸으며 평균 재임 기간은 17년이었다. 유다 왕국은 이웃인 아라비아 '모압'과 필리스틴 사람들과의 전쟁에 시달리면서 이 나라도 이세벨의 딸인 '아탈리아'란 여자가 왕후로 있었는데, 어머니를 닮아 몹시 사치스럽고 탐욕스러웠으며 그녀 역시 우상인 바알 신을 궁중에 끌여들여 굿판을 벌이곤 하였다. 성격이 포악하고 남편인 '르호보암' 왕이 죽자 아예 권력을 독점하여 다윗의 자손들을 도륙했다. 그 학살속에서 도망나온 일곱 살의 로호보암 손자인 '예호아쉬'가 아탈리아가 피살된 후 왕위를 잇는다.

 

나라는 계속 어지러웠고 우상 숭배는 공공연히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요시아'왕 시절이었다. 우연히 솔로몬의 성전을 수리하던 중 토라의 원전 두루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이 토라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삼시간에 전국을 휩쓸었고 사람들의 눈을 뜨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요시야왕은 저잣거리의 우상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주술사나 무당들을 싹쓸었다. 이렇게 해서 유다 왕국은 제 모습을 찿게 된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유다 왕국은 그 지역 최강자로 등장한 '바빌론'과 대치하게 된다.

 

바빌론은 앗시리아를 먼저 정복하고 유다 왕국에 조공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자 전쟁을 일으킨다. 바빌론군은 에루살렘에 난입하여 성전을 파괴하고 약탈한 후 유다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어 꼭두각시왕을 두기도 하였다. 유태민족의 저항은 16년 간이나 계속되었으나 결국 유대 왕국은 멸망하게 된다.

서후고개 정상에서

지난 30일 주말에는 오랫만에 양수역에서 벗고개-서후고개를 향했다. 이른 봄이라 아직 꽃들이 피지는 않았지만 양평가는 도로가 차단되어 서후고개를 넘어 문로리로 돌아나오기로 했다.

벗고개로 향하는 도중에 반대편에서 젊은이들이 몇 명씩 무리지어 여러 팀이 넘어온다. 어디서 넘어오는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하다. 겨울 내내 참다가 모처럼 주말에 라이딩을 만끽히는 모습이 눈물겹기도 하다.

벗고개에서 헬멧도 안쓴 한 사람을 추월했다. 그래도 내려가는 길에서는 바람처럼 내려간다. 서후고개를 올라가니 또 한 사람이 비틀대면서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정상 부근에서 추월했다. 양수역부터 나를 따라오던 사람이 나를 따라잡으려다 뒤에 처졌는데 서후고개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사람들이 올라왔다. 난 그들을 모두 먼저 보내고 사진 몇 장을 찍고 출발했다.

서후고개를 내려가는 길에는 맨홀 뚜껑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벗고개에서 소나기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나무나 대조가 된다. 도로 공사시 통행을 위해 매우 고심하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문호리로 내려가는 길에는 자전거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도로 상태도 매우 불량하다. 맨홀에서는 지하수가 솟아올라 도로를 타고 흐른다. 방심하면 넘어지기 쉽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사고가 나기 쉽다. 뒤에 차량이 따라오면 정차하여 비켜주고 천천히 내려가는데 소나기 마을 입구가 보인다.

문호리 시내는 한적하지만 주변 도로 상태가 몇 년째 불량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북한강변 입구에서 잠시 쉬면서 둘러보니 산에 벌써 진달래가 피었다. 쌀쌀하던 바람이 아침 태양의 열기로 훈훈해졌다. 주변의 수목들이 물기를 머금고 파란 새싹을 열심히 피우고 있다. 이제 봄이 정말로 찿아오는 모양이다.

 

 

비빌론에 유폐된 유태인들

바빌론은 유다 왕국의 유태인 대다수를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구약의 기록을 보면 상류사회의 주요 인맥이 거의 잡혀 끌려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유명한 바빌론 유폐생활이다. 그러나 바빌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유태교의 체질을 성전 중심에서 토라.율법 중심의 유태교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빌론의 유다 지배는 불과 50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기원전 536년 비빌론은 신흥 강대국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했다. 이렇게 해서 페르시아의 지배가 시작되는데 페르시아는 바빌론과는 달리 지배하의 각 민족의 종교와 행정 자치를 허용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황제는 비빌론에서 유폐생활을 하던 유태인들의 고토 귀환을 허용하였으며 비빌론이 탈취했던 성전의 온갖 금은제 제기 등도 고스란히 갖고 돌아가도록 허용했다. 유태인들은 엘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기원전 515년) 이것이 솔로몬 성전에 이어 제2성전인데 성전 준공식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고 구약의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시기부터 유다 왕국은 제사장 중심의 행정자치령 형식의 나라가 된다. 구약에는 이때 '예수하', '에스라', '느헤미아'란 이름이 나오는데 이 페르시아가 이집트까지 점령한 이후 첯 귀환팀보다 백 년후에 제2차 고토 귀환팀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에스라는 당시 정상급 사제 출신의 선비였다. 모세 율법에 통달한 학자로 제2의 모세라고도 지칭된다. 느헤미아는 페르시아 황제의 술잔을 바치는 직책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 황제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유다국 자치행정수반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는 뛰어나 행정가로 성전 재건과 성벽을 복구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아는 유태인의 정체성 유지와 유태교의 부흥을 위하여 유태인은 이민족과 결혼을 금지 시키고, 토라를 정비하였으며 그후 수정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런 자치령 형식으로 가다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멸망시켜 이 지역 일대가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페르시아와 희랍계의 지배

알렉산더 대왕의 유다왕국 점령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유태인들에게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의 충격을 주었다. 수준 높은 이민족 문화를 접하면서 유태인은 한층 세련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죽고 광대한 제국은 장수들에 의해 분활 통치되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집트를 점령한 '톨레미' 장군에 의해 백여 년간(기원전 323-198년)통합 지배된다. 그러다가 시리아 지방의 패자로 등장한 또 다른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장군 출신인 '셀레시드'가 시리아에 자기 왕조를 세우고 팔레스타인 지방까지 빼았아(기원전 198년) 셀레시드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새로운 지배자는 톨레미와는 달리 진한 희랍적인 냄새를 풍긴다. 이스라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들여놓는가 하면 할례를 금지하고 안식일을 없애는 등 종교 탄압을 강행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정통파 유태교 사제 계급을 주축으로 한 범유태인 저항군과의 싸움으로 번진다. 24년간 계속된 저항군의 싸움은 셀레시드군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래서 탄생한 왕조가 '하스모니안' 왕조이다. 이 왕조는 80년간 계속되는데 역시 골육상쟁과 온갖 무질서가 판을 치다가 막판의 알렉산드리아 여왕 한 사람만이 바른 정치를 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여왕의 집권기(기원전 78-69년)가 이 정권의 황금기로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여왕 사후 내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운 사이 기원전 63년 로마가 진출하여 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식민지화 했다. 로마가 지지한 헤롯왕이 나왔고 나라 이름도 '유대아'로 바뀌었다. 대단히 혼란한 사회가 계속되면서 헤롯왕의 아들 헤롯이 계승하나 역시 혼미한 사회,종교적인 상황이 계속되다가 기원 원년을 맞는다. 바로 예수가 태어난 시기였다. 그러다가 기원후 70년 로마에 반기를 들고 항쟁하자 로마군의 반격으로 식민국가인 유대아 조차 멸망해 버린다. 로마는 수도 엘루살렘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곳의 유태인을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에서 모두 몰아내 버렸다. 그후 유태인은 길고도 긴 2천 년을 나라없이 전세계를 방황하는 유랑민족이 되어 버렸다.

 

재야 유태교 지도자 랍비

유다 왕국의 예언자들은 대부분 랍비라는 유태교의 지도자로 나라의 장래를 예언하고 종교적 율법을 지키도록 유태민족을 지도하는 정신적 지주들이었다. 그때까지 성전 중심의 유태교가 주를 이루었으나 바빌론 유폐부터 랍비의 역활은 유태민족의 정신적 샘물과 같은 역활을 하였다. 성전없이 유태교를 가정에서 스스로 지키며 율법을 준수하고 토라의 기르침을 따르며 민족의 역사를 배우고 고토 팔레스타인에 대한 향수를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토라를 쉽게 생활화시켜 만든 것이 '탈무드'로 그들은 누구나 이 토라와 탈무드에 의해서 성장하고 자라게 된다. 성년이 되면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토라와 탈무드에 대하여 숙독하게 되며 안식일과 계율을 준수하면서 종교적 민족적 의식을 함양시켜 나가는 주체적인 역활은 각 지역의 유태인 지도자 랍비였다. 랍비는 토라에 대한 전문가이면서 유태민족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민족의 지도자이며 종교적인 지도자로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