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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갈등의 핵,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12

'갈등의 핵,유대인' 그들은 누구인가? 12

 

 

 

맛사다의 정상. 그 당시의 회의장소, 물저장소, 투석기로 던졌을 돌들이 쌓여있었고 그 유적들.

 

 

6. 유태민족 국가의 종언

 

예루살렘 공방전

지배자 로마와의 전면 항전의 직접적인 발단은 기원후 66년 5월 어느 날 예루살렘 교외의 로마군 주둔지를 일단의 유태인 열혈 단원이며 행동적인 민족주의 항쟁파인 극렬 게릴라들이 급습, 점령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기지가 유태인 독립 항쟁 게릴라들에게 떨어지자 전체 유태인들이 환호했고 전국에 산재한 게릴라들을 자극하여 무력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유데아, 이두메아, 사마리아, 갈릴리 전지역의 게릴라들이 로마 점령군에 대하여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무력 봉기 첯 해는 게릴라군의 연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의 결사적인 항전은 주둔 로마군의 열세로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군은 식민지 유태민족들이 로마 정규군의 요새를 공격.점령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유태인들의 저항을 만만히 보았을 뿐만아니라 주력 부대를 시리아 지역에 투입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소수 치안 유지 병력만 남아 있었다.

 

로마군이 각지에서 피습을 당하자 이 급보를 보고 받은 시리아에 주둔 중이던 '케스터스 갈루스' 장군 휘하의 군단이 급파되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네로' 황제가 급히 보낸 장군으로 당시 로마의 가장 유능한 '베스파시안' 장군의 로마 최정예 군단이 진군하게 된다. 로마 최정예 군단이 진주하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유태인 게릴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력의 열세로 일소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시작된 것이 예루살렘 공방전이 3년간 계속되었다.

 

종군기록 사학자 '요세프스'

로마의 예루살렘 공방전 와중에 두 사람의 유태인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요차난 벤 차카이'와 '팔에비아스 요세프스'이다. '차카이'는 인멸 위기에 있던 유태인의 민족종교와 문화유산을 지킨 사람이며, '요세프스'는 당시 유태인들의 피어린 저항사를 낱낱이 기록한 역사학자이다.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면서도 한편 유태인들로부터는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기도 하다.

 

요세프스는 부유한 제사장 가정에서 태어나 토라.율법 등을 익혔으며 로마로 유학하여 일류 교육기관에서 수학한 히브리어는 물론 희랍과 로마 고전의 일인자였다. 특히 역사학에 깊은 지식이 있었으며 로마 시민권자였다. 요세프스는 투항했다는 설과 본래 로마군 중간급 장교로 근무했다는 설이 있으나 베스파시안 사령관이 요세프스를 종군 전쟁 기록자로서 자기 군단에 근무토록 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가 후세에 남긴 주요한 저술로는 <유태인 전쟁사>, <유태인 고대 제도 및 풍습>, < 마사다 항전사>가 있다. 그는 강한 로마를 잘 알고 있었으며 유태인들의 저항이 결국 유태민족의 멸망을 초래하는 무모한 항쟁임을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군 종군 기록자이지만 객관적으로 싸움의 전말을 기록하였으며 오히려 로마군보다 유태인의 항쟁 모습을 잘 그려 놓았다고 한다. 그를 전쟁 수행 기록관으로 채용한 것이나 기록에 대해 일체의 간섭도 하지 않았던 베시파시안 장군의 인품과 지적 수준도 대단하였던 인물이었다.

 

베시파시안 장군의 로마군은 저항하는 유태인은 물론 눈에 띠는 건물은 거의 모두 파괴하면서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수도인 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압박해 갔는데 68년 중반 경에는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지역이 평정되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도 일거에 점령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성 밖을 포위하고 성 내의 유태인들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지구전을 펴기로 하였다.

 

'베시파시안' 장군과 '벤 차카이'

벤 차카이는 화전을 주장한 바리사이파계의 랍비였다. 그는 일반 서민 대중들로 부터 존경을 받던 인물로 명성있는 학자겸 랍비였는데 주전파들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그의 말을 들으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로마와의 이번 전쟁으로 자칫하면 2천 년 유태민족과 유태민족 유산의 종말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로마군의 결의로 보아 예루살렘 함락과 함께 전체 주민의 죽음이나 노예화는 뻔한 것이었다. 그리고 유태문화의 인멸이었다. 그는 자신의 속 뜻을 제자들에게 털어놓고 방법을 함께 강구한 결과 죽은 시체로 위장해 성 밖으로 빠져나가기로 하였다. 우선 전염병 같은 돌림병이 걸린 자신을 주변에 알리고 자기가 죽었음을 위장하여 관속에 들어갔다. 제자들이 관을 호송하여 성문에 도착하였다. 제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설치는 주전파에게 들키는 날이면 피살될 것은 뻔한 일인지라 싸움에 정신이 없던 주전파들을 겨우 속이고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거짓말 같은 실화이야기다. 그는 성 밖으로 나오자 즉시 베시파우스 사령관을 찿아갔다.

 

그는 베시파우스 사령관을 만나자 먼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그의 관상을 보았는데, 머지 않아 로마 황제가 될 상이라 했다. 사령관은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청이 무었이나고 물었다. 차카이는 팔레스타인 어느 한적한 곳에 유태민족 문화유산 연구소 같은 곳을 제자들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했다. 베스파시안 사령관은 쾌히 승락했다.

 

차카이는 어떻게 그와 같은 예언을 할 수 있었을까? 네로 황제가 죽고 후계자가 없어 세 명의 인물이 황제에 올랐으나 번갈아 암살되는 등 정국이 불안정 하였으며 그런 상황이라면 군대의 강자가 반드시 혼란한 정국을 바로 잡을 수 있으니 베스파시안 장군이 거의 확실한 황제 자리를 차지하게될 가능성을 점쳤던 것이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이듬해인 69년 로마 원로원은 군통수권자인 베스파시안에게 황제 등극을 권유해왔고 그는 마침내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예루살렘 공격은 아들 '티투스' 장군에게 일임하고 로마로 떠났다.

 

베스파시안 황제는 차카이와의 약속을 지켰다. 차카이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곳에 '야브네'란 연구소를 차리고 유태민족의 종교.문화.역사의 중심 연구소가 될 '예시바'의 첯 스타트로 보고 있다. 이로써 유태 문화유산이 인멸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사라진 유데아 왕국

로마군은 후임 티투스 사령관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더욱 가열화시켰다. 로마군이 성을 헐어내고 성내로 진입하여 2주간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으나 로마군이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기도 하였다. 티투스 사령관은 성 외곽 지역에서 유태인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도 하며 성안의 유태인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 한 해가 흘러 3년째가 되는 70년. 마침내 로마군이 성을 함락시킨다. 성에 난입한 로마군은 유태인 남자는 모두 도륙하고 여자와 어린이는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 모든 건물과 성전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되었다. 배신에 대한 보복은 철저하게 하는 것이 로마군의 전통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투입된 로마군은 8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유태인 공성군은 2만3천4백여 명에 불과하였는데 3년간이나 치열한 공성전을 전개하였다는 것은 유태인의 전투력이 얼마나 강력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티투스 사령관의 로마 개선문은 현재도 남아있다. 옛 로마 원로원 건물 옆에 서 있는 이 개선문이 바로 예루살렘 함락을 기념해 세운 개선문이다. 이어 다시 2년을 넘게 계속된 '마사다 요새 항전'은 예루살렘 함락 직후 벌어진 유태민중들의 처절한 마지막 절규였다. 그후 2세기 전후까지 유태인들의 산발적인 저항은 계속되었으며 상당한 전투력으로 로마군을 괴롭힌 '시몬 바 코츠바'가 가장 강력했다. 이에 로마는 '세르베스' 장군의 군단을 파견하여 산발적인 전투를 3년간이나 벌여 135년 결국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일련의 전쟁으로 유태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은 물론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대해 유태인들은 모조리 도륙하였으며 건물은 모조리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이때부터 유태인은 2천 년에 걸친 본격적인 유랑의 시대가 시작된다. 몰론 타지역에 정착하거나 바빌론 유폐시절에 이미 그 지역에 정착한 유태인들도 있었으나 예루살렘 함락 이후 명목상이나마 존재했던 유데아 왕국의 종언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인 유랑시대의 시작된 것이다.

                                                                                                                                                                -서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