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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1,075 : 해방과 건국 35 (김영삼 '문민정부' 2)

 

 

 

 

한국의 역사 1,075 : 해방과 건국 35 (김영삼 '문민정부' 2)

 

 

                                    

 

 

 

김영삼 문민정부(1993.2~1998.2) 2

 

 

주요 사건 및 업적

 

 

'하나회' 숙청

 

김영삼 대통령의 숙군 작업은 그야말로 김영삼스럽다고 할까, 쿠데타 가능성 그런거 상관없이 앞뒤 안가리고 잘라 버리는 무대포스러운 위엄을 과시했다.

1993년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하나회 출신인 서남수 기무사령관을 보고 "앞으로 대통령과 독대하지 말고 국방장관을 통해 보고하라" 라고 말을 하는 한편,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주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말을 통해 에둘러서 군을 엎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김영삼이 본격적인 숙청에 들어간 건 취임 11일 째인 1993년 3월 8일. 이 순간까지 군 수뇌부는 물론 청와대 비서진들까지도 김영삼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는데, 김영삼은 몇몇 최측근들과 일을 의논하다 이날 아침 국방부장관인 권영해를 불러서 독대를 했다. 권영해 장관은 비하나회 출신으로 6사단장을 거치고 국방부에 근무하다가 진급이 되지 않아 군복을 벗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단장 시절 그 사람의 품성은 기독교인으로 매우 검소하고 지혜로우며 부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매사에 성실한 사람으로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사람이다. 사실 권영해 장관이 국방장관을 거쳐 안전기획부장을 재임하는 동안 사단장 시절 같이 근무하던 참모, 지휘관, 직할대장 중 장군으로 진급된 사람이 많다.  지금 현직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S씨는 당시 작전참모를 했던 사람인데 막차에 권영해씨 도움을 받아 겨우 장군에 진급하여 국회의원까지 승승장구한 운좋은 사람도 있다. 


"장군들은 정권이 바뀌면 사표를 내지 않느냐" 라고 일단 김영삼이 운을 뜨자 국방부 장관인 권영해는 "대통령이 새로 취임한다고 군인들이 사표를 내지는 않는다" 라고 답했고, 김영삼이 "그럼 군 장성들을 언제 바꿀 수 있느냐" 고 말하자 권영해는 "대통령이 통수권을 행사한다면 언제든 가능하다" 라고 했으며, 그러자 김영삼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로 바꾼다고 선언해 버렸다. 장관이 극비리에 육군본부, 기무사, 수방사, 특전사 등의 동향을 체크하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김영삼과 권영해가 수뇌부에 대한 인선에 들어갔고, 비 하나회 출신인 김동진과 김도윤으로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해 버렸다. 여기까지 과정이 단 네 시간에 불과했다.


여기에 이르러서도 이 일이 군 수뇌부 교체 정도가 하나회 숙청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영삼 자신과 몇몇 측근에 불과했다.

 

1993년 4월 1일에는 수방사와 특전사의 사령관까지 기습적으로 교체했고, 이런 교체 의도를 권영해 국방부 장관이 알게 된 건 겨우 발표 하루전이었을 정도로 이러한 진행은 김영삼과 측근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단위로 각군 사령관과 사단장급까지 교체하는 일이 4월 동안 벌어졌으며, 이러한 기습적인 교체로 군 주요 보직에서 하나회 인사들이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이어지는 중에 당시 대령이던 백승도(육사 31기로 하나회 회원은 아니었다)가 동기회장 선거 중 일어난 난투극에서 하나회들의 주요보직 독식에 대한 실상을 밝힐 요량으로 하나회 명단을 군인 아파트에 뿌리는 일을 벌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하나회의 깊은 뿌리가 제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하나회 명단 살포 건으로 인해 하나회 숙청이 시작되었다는 말들이 간혹 있으나, 앞선 내용에 있듯이 하나회에 대한 숙청은 이미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단 살포로 하나회 숙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사실이다. 백승도 대령의 이런 행위는 비하나회 상급자 중 누군가의 사주로 추정되고 있으나 백승도 스스로가 저지른 일로 주장하는 바람에 구체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없다. 이 명단 살포는 하나회에 대한 육사출신 동시생을 포함 선.후배 비하나회장교들의 차별에 극심한 불만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수뇌부에 대한 1차 숙청 과정 이후 하나회 출신이 군 내 주요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에서, 하나회 회원이던 이충석(당시 소장)이 국방부 간부 술자리에서 정부가 군을 막 대한다며 술잔을 던지며 소동을 벌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하나회 숙청에 대한 저항이라고 간주한 대통령과 주요 지도부에 의해 하나회 출신의 주요 장성들은 아예 오지 전출, 한직 좌천, 조기 전역까지 당하며 군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당시 이충석 장군도 육본 작전처장, 1사단장을 거치고 합참 작전처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치면서 장차 참모총장, 국방장관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에 하나회 숙청이 시작되자 국방부 회식 자리에서 난동을 부린 것이었다. 그는 차량을 탄채 국방부 청사 엘리베이트에 추락하여 중상을 당하는 등 불운한 군생활을 마쳤다. 이처럼 대부분의 하나회 출신들이 꿈꾸던 자신의 앞날이었다. 12.12군사반란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였던 하나회 장군들이 총장, 군사령관 등 별잔치를 벌이고 군내 주요보직을 돌아가며 독식하고 있었고 일반출신 장교는 물론 심지어 같은 육사 동기생들도 하나회 동기생에게 아첨하며 아부할 정도였다. 하나회 장교들은 주요보직 독식은 물론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로 비하나회 상급자를 우습고 보고 상급부대의 지시나 명령을 거부하거나 독단적인 군사행정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비하나회 상급자가 하급자인 하나회 징군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굽신거릴 정도였다.하나회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는 대형사고가 나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사고보고를 하면 하급 지휘관에게 사망자 처리를 잘 하고 부하들 사기를 올려주라며 돈봉투를 주기도 했다. 잘 나가는 하나회 실세들에게 대기업주들이 연줄대기에 바빴고 하나회 장군들은 거의 매일 기업주들의 향응 접대와 뇌물 수수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앞날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에서 거칠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고려 무신천하를 방불케 하는 하나회 천국이었다. 그들은 이런 호시절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나회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피해를 본 기수는 27기 이후 기수들로 장군 진급도 못하고 대부분 불이익을 당하고 말았다.


90년대초 이후 하나회 출신은 군 승진인사에서 계속 배격당하면서 강원 오지로 전출당하거나 군복을 벗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바람에 장군 진급이 전혀 가능이 없던 비하나회 장교들이 대신 진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주요 직위를 차지하자 하나회들이 군림하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비하나회 장군들은 자신의 입신을 위해서 위만 쳐다보며 몸을 도사리고 모든 잘못된 책임을 부하에게 전가시키는 등 소신없는 부대지휘로 부하 장교들로부터 많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군의 위상은 나락으로 추락되었고 군의 사기가 저하되는 것은 물론 군이 결정적으로 국민들로부터 멸시와 소외받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공군참모총장이 합참의장이 되고 국방부 장관까지도 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하나회 자체가 군대를 실제로 동원할수 있는 군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상황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동안 철야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 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런데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하고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만다.

 

좌우지간 이 일은 금융실명제 실시와 더불어 김영삼 대통령의 주요 업적중 하나다. 이때 하나회와 같은 군내 사조직을 없애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군사정권 시절처럼 군부가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래는 기무사출신 이진웅씨가 기고한 글이다. 참고하시길......

 

 

하나회 숙청에 대하여......

 

93년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표적인 軍內 사조직 ‘하나회’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장성과 장교들이 하나회 멤버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전역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최근에도 “하나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또다시 쿠데타를 모의했을 것”이라는 요지의 비판 발언을 한 바 있다.


하나회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문민정부 당시 규정된 ‘부패하고 무능한 장교들의 사조직’이라는 식으로 굳어져 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대부분 비하나회 출신들이나 군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하나회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나하면 하나회는 군내 엘리트 그룹으로서의 자부심을 넘어 인사와 보직을 농단하며 절대다수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단합을 저해했으며, 결국 12·12 하극상과 5·17을 통해 국민과 국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핵심들은 율곡비리사건 등에서 보듯 심각한 부패상까지 연출함으로써 결국 6·25와 월남전을 통해 국민의 군대로 전통을 세워가던 군의 명예를 송두리째 실추시켰다. 특히 79년 12·12 이후 하나회 세력의 행태는 나로 하여금 거의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갖게 했다. 그들은 80년 집권과정에서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휘관 중 한명이었던 강창성(71∼73년 보안사령관)


장군에 대해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며 투옥했다. 심지어 삼청교육의 일종인 ‘특수순화교육’까지 시키는 것을 보고 나는 주변의 가까운 분들을 만나면 하나회 비판과 매도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조직 내에서 모셨던 하나회 출신 여러 지휘관과 참모들, 그리고 일반부대에 근무하던 하나회 회원들과 업무상 잦은 접촉을 하면서 그들의 또다른 모습을 하나둘씩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결국 나는 지난날 내가 가졌던 하나회에 대한 생각이 상당부분 편견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물론 하나회라는 조직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들의 죄과는 크다. 그들은 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사조직을 결성하였고, 12·12에서 보듯 군의 정상적인 명령계통을 철저히 유린하였으며, 요직을 독식하고 각종 특혜를 누리는 등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자행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한때의 판단착오로 하나회에 몸담았을 뿐, 군 지휘관으로서 지휘철학과 국가관, 그리고 역량면에서 군의 중추적 엘리트라 할 만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93년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수많은 유능한 장군들이 단지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예편조치되었다. 나는 그때 현역과 예비역을 가리지 않고 하나회 출신 장군들을 다수 접촉하면서 ‘이분들이 한때의 잘못으로 인해 무차별적으로 군에서 숙청되는 것은 군과 국가의 큰 손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는 최근 “월간중앙”(99년 8월호)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 먼저 IMF 환란을 초래한 정권의 최고책임자로서 수많은 노숙자들과 실직자들 그리고 고통받는 절대다수 국민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은인자중해야 할 인물이다.

나는 ‘그가 지금 이런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가’라는 감성적인 의구심을 갖고 있을 뿐, 국정 전반에 걸친 그의 실패와 잘못을 조목조목 논할 입장이나 능력이 못된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인터뷰 중 “(하나회를 정리 안했다면)쿠데타했을 게 뻔하다. 하나회를 몇명 정리했는지 지금도 숫자까지 기억하고 있다. 하나회 말고도 유능한 군인들 많다”는 요지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자신 군 수사관이라는 객관적 위치에서 하나회를 접하고 전모를 파악한 입장에서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그릇된 부분을 지적해야만 하겠다는 필요를 절감했다. 다시 말해 독자들의 알 권리 차원에서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막중한 의무감을 느꼈던 것이다.


◆ 非하나회 실세들 하나회 뺨치는 잡음 일으켜

단적으로 말하자면 하나회는 항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파렴치하고 부패하며 군을 사조직의 희생물로 만들 만큼 타락한 탕아들만의 집단이 아니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수의 장성들은 투철한 국가관을 갖고 멸사봉공의 길을 초지일관 걷고 있다고 본다. 특히 김영삼 정권 당시 하나회 척결이라는 군 전체적인 차원의 조치에 의해 불이익을 받았던 장군들 대부분은 불평불만은커녕 오히려 국가가 잘되기만 항상 마음 속 깊이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개인적으로 확인했다.

또한 73년 이후 보안사령관(기무사령관)으로 부임한 하나회 출신 지휘관들이 나를 면담할 때 역대 지휘관 중 누가 훌륭한 지휘관이냐고 물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스스럼없이 “강창성 장군”이라고 답했다. ‘반(反)하나회’의 선봉이자 하나회 출신들이 적으로 생각하는 지휘관을 훌륭한 지휘관이라고 답한 것이다. 그랬어도 나는 군 생활 중 진급·보직은 물론 어떤 측면에서도 불이익을 받은 일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92년 나의 막내동생이 육군 헌병 중령으로 대령 진급심사를 앞두게 되었을 때, 나는 당시 하나회 실세로서 평소 안면이 있던 O소장(육본 인사참모부장)에게 선처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방부 인근의 일식집으로 나를 불러 동생의 인사자료를 보여주면서 “도저히 이 사람을 진급시킬 수는 없다. 만약 동생을 진급시키면 전 육군의 진급심사가 잘못됐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절대로 부탁하지 말아 달라고 한 일도 있다.

93년도 대령 진급심사 때 기무사에서는 M중령(ROTC 출신으로 소위 ‘TK’) 진급대상자로 선발해 추천한 바 있다. 기무사의 자체 진급심사 결과는 육본에서 그대로 통과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육본 인사참모부는 ‘M중령 동기생들이 대령→준장 진급 대상자이기 때문에 육본 방침상 진급이 불가하다’고 통보해왔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기무사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조치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S사령관(TK 출신)은 오히려 기무사 진급심사위원들과 인사처장(P대령)을 질책한 후 M중령을 탈락시키는 등 합리적으로 지휘했다.

나는 이런 지휘관들마저 YS 집권 이후 ‘하나회 숙청’의 일환으로 무차별적으로 예편조치당하는 것을 보면서 ‘옥석을 가려가면서 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특히 YS 집권 후 ‘개혁’ 차원에서 군 인사비리를 척결하면서 과거 해군과 공군의 진급심사와 관련된 인사비리가 적발되어 군의 위신을 실추시킨 일이 있었으나 과거 하나회가 주도했던 육군의 인사비리는 거의 적발되지 않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반대로 하나회와 공생하며 성장한 일부 비(非)하나회 장군들이 YS 집권 이후 실세로 부상했다. 이들은 ‘하나회 척결’이라는 미명하에 군 개혁을 단행하면서 하나회를 뺨치는 진급과 인사상의 잡음을 일으켰다. 더 나아가 이들은 대통령 차남을 둘러싼 K고 인맥을 형성하는 등 오히려 군을 사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군 내외에 걸쳐 팽배하였음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김 전 대통령이 ‘쿠데타’ 운운하며 하나회를 들먹이는 것은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서 분별력이 없는, 너무 정략적인 발언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나회 출신 장성들도 YS가 집권하자 국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들은 ‘문민정부 출범을 계기로 이제는 국민정서상 군사쿠데타가 용납받지 못할 것이다. 남북대치상황에서 군의 경솔한 행동으로 혼란이 발생하면 북괴가 전쟁을 도발할 것이다. 이제는 문민정부가 나라를 잘 경영할 수 있도록 군이 충성을 다해야하며, 다른 부류가 쿠데타의 망상을 갖지 못하도록 우리가 순수 민간 출신 대통령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사실이 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장성들은 건전한 양식과 올바른 양심을 소유한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김 전 대통령이 ‘쿠데타’ 운운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집권 당시 정보 계통에서 제대로 된 보고를 받았다면 이런 발상 자체가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다. 또한 이런 식의 발언은 한 국가의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서 품격을 벗어난 언행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접한 대다수 하나회 예비역 장성들은 하나같이 YS 집권 후 불이익을 당해도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한목소리 뿐이었다. 물론 한쪽에서 극소수의 부류가 물의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 늑대 들어서

그들 대부분은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할 정도로 부패한 인물들이 아니며 무능한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일부 부패하고 정치적인 장성 몇몇을 제외하고 그들이 사조직을 결성한 잘못을 논외로 한다면 군내 엘리트 중 엘리트 그룹이라고 확신한다.

YS 집권 당시의 하나회 척결 조치가 정말로 군과 국가를 위한 것이었다면 다음과 같은 조치가 취해졌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다.

첫째, 하나회라는 사조직 자체는 철저하게 해체하되 회원에 대한 숙청작업은 선별적으로 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부패하고 지탄받았던 인물은 숙청하고 하나회 회원이지만 군내외의 신망이 두텁고 충성심이 입증되며 능력이 탁월한 인물은 그들의 역량을 군과 국가를 위해 바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의 소명 기회를 일절 주지 않고 전격적으로 예편시키는 조치는 지나쳤다고 본다.

둘째, 경상도 출신 K국방장관, 또다른 K장관, Y육군참모총장 등이 사심없이 군 개혁작업을 주도했어야 했다(이 부분에 대한 군내 여론은 내가 아는 한 부정적이었다)
.

셋째, 마치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 늑대가 들어서는 것처럼 하나회가 없어진 자리에 또 다른 군내 인맥이 형성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김 전 대통령은 재임시 군통수권자로서 군개혁의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여 엄청난 군내외 비판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마치 자신의 군 개혁은 지고지순한 위대한 업적인 반면, 하나회 세력은 쿠데타나 생각하는 백해무익한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국민에게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크다.

과거 순수한 충성심에서 하나회 척결을 시도했다가 하나회로부터 혹독한 보복을 당한 바 있는 강창성 장군조차 이제는 군이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은 철저히 단죄하되 과거 하나회에 몸담았던 장교들에 대해서 포용할 것은 포용하여 화합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제 우리 군이 하나회-반(反)하나회간 군내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화합 단결해 국민의 군대로서 진정한 면모를 갖춰 나가는 일에 매진했으면 하는 충정에서 사심없이 이 글을 기고했음을 밝혀둔다.

이진웅 (前 기무사 삼호회 회장)

 

 

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金融實名制)는 금융 기관에서 금융 거래를 할 때에 가명 혹은 무기명에 의한 거래를 금지하고 실명임을 확인한 후에만 금융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제도이다.

 

 

추진 경위

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저축의 장려를 위해 예금주의 비밀보장, 가명, 차명 혹은 무기명에 의한 금융 거래를 허용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각종 금융 비리 사건과 부정부패사건의 해결을 위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1982년에 일어난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통해 제도 실시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1982년 7월 3일 금융실명제실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때 제정된 《금융실명제에 관한 법률》은 종합과세제도와 자금출처조사 제도가 없었고 비실명 금융자산에 대한 차별적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실명 금융거래의 의무화도 연기되었다. 결국 이 법률은 유명무실한 법이 되어버렸다. 1988년부터 한국 정부는 금융실명제준비단을 설치하여 제도의 실시를 연구하였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와 이 제도의 실시를 우려하는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서 보류되었다.

 

 

긴급 재정 경제 명령 제 16호

제5공화국제6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3년 8월 12일,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대통령긴급명령인 긴급 재정 경제 명령 제 16호를 발동하여 당일 오후 8시를 기해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전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는 혼란을 피하고 부작용을 단시일 내에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이 명령은 대한민국 헌법 76조에 제1항에 의거하여 내릴 수 있는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으로 내려졌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명령은 전시였던 1950년에 많이 이루어졌으며 그외에는 이 제16호 명령과 같은 경제에 대한 특별한 경우로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이 명령전의 마지막 명령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이었다.

 

1993년 8월 19일 국회는 본회의를 개최하여 대통령이 승인을 요청한 긴급 재정 경제 명령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앞서 국회 재무위원회는 8월 18일에 회의를 개최하고 긴급 명령을 심의하였는데 만장일치로 승인하였었다.

이 조치로 시행된 법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비실명계좌의 실명확인 없는 인출을 금지.
  • 순인출 3천만원이상의 경우 국세청에 통보하며, 자금 출처를 조사할 수 있음.
  • 8월 12일 오후 8시를 기해 위 사항을 실시하고, 13일은 오후 2시부터 금융 기관의 업무를 시작.

 

 

평가

 

실시 효과

  • 비실명제의 경제활동은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되는 지하경제를 부추기고 투기성 자금, 부정 부패자금등의 활동 통로가되어 실물경제의 발달을 저해한다. 금융실명제는 이러한 자금의 흐름을 막고, 추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 금융자산소득의 흐름을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종합소득세제의 실시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세수가 늘어나 국가 재정 확보가 쉬워진다.
  • 궁극적으로는 과세의 불공평성을 없애 빈부의 격차를 줄인다.
  • 건전한 경제 활동을 보장하여 사회적 안정을 이룰 수 있다.
경제에 끼친 부작용
  • 생산성 저하
  • 주가 폭락
  • 자본의 해외 유출
  • 부동산 가격 급등
  • 사금융 시장 위축
  • 중소기업의 부도 증가

 

실시 이후

실시 후 한동안 경제적 혼란이 있었으나 유연한 통화 공급으로 우려되었던 유동성 과다 현상은 발생하지 않았으며, 시장 유동성은 약 0.3 ~ 0.6%정도 증가하는 데 그쳤다. 대부분의 가명,무기명 자산들이 실명화되어 지하경제의 규모를 억제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정경유착등 각종 부정 부패 사건의 자금 추적에 큰 도움이 되었다. 금융실명제의 후속조치로서 금융소득종합과세 부과가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