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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한국의 역사 944: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9

 

 

한국의 역사 944: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9 

  

                                                                        서울 성벽 전 

 

 

 

 

 

 8.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우리는 원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조선에서 이런 풍수와 지관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광해군 때의 명 문장가 이정귀가 대표적인 듯하다. 광해군은 지관 이의신을 매우 신뢰했는데 그는 서울을 떠나서 한강 하류의 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여 광해군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도성의 왕기가 이미 쇠하였으므로 도성을 교하현으로 옮겨야 한다는 이런 주장에 예조판서 이정귀가 상소하기를,

"삼가 이의신의 상소를 보건데,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풍수의 설은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디 믿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성상께서 나라를 세우려고 여러 곳을 살펴보고 여러 해를 경영한 끝에 끝내 이곳에 정하였으니, 깊고 먼 계략을 어찌 미미한 일개 술관과 비교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의신은 임진년 변란과 역변이 계속하여 일어나는 것과 조정의 관리들이 파당하는 것과 사방의 산들이 벌거벗은 것이 모두 서울의 위치 탓이라고 합니다. 왜적의 무도한 침략이 서울의 위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며 무지한 백성들이 국법을 존중하여 도끼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으면 산의 나무는 저절로 무성할 것입니다. 편협되고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왕도를 바로 세우면 조정의 의논도 저절로 통일될 것입니다. 이는 모두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 모두가 힘써야 할 바입니다. 고금 천하에 이찌 그런 것을 이유로 국도를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까.

 

듣건데,  그 사람은 상당히 구변이 있고 문자도 제법 알기 때문에 방서에 의거하여 큰 소리 치고 있으나 실상은 그들의 동료들도 비웃는 자가 많다 하며 사대부의 가문에 묘 자리와 집터를 지정해준 것도 대부분 효험이 없다 합니다.

 

그가 이른바 교하 땅은 복지이고 한양은 흉하다 하고 있으나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일게 필부의 허망한 말을 선뜻 믿어 2백 년의 굳건한 터전과 살고 있는 수많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일거에 떠돌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터전을 장대하게 하고 영원한 명을 비는 참다운 도리는 다만 올바른 정치와 취사를 살피는 것, 백성들을 사랑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는 것, 내정을 잘 닦고 외적으로 물리치는 일뿐입니다. 참으로 이 도리를 반대로 하면 비록 해마다 도읍을 옮긴다 하더라도 위란만 불러들일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4년 11월 15일)

 

이미 중종 때에도 천도에 관한 주장이 일어나자 중종은 이와 비슷한 조처를 취했다. 술수에 관한 그림이나 서적을 엄금토록 명한 것이다. 그런 책을 좀 읽고 와서 종일 떠들어대니 서운관에 명하여 술수. 지리에 관한 서적을 모두 없애 버리게 했다.

 

근래 1980년대의 일이다.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한 풍수 한 사람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박정희 대통령 묘지 아래 상당한 물이 흐르고 있어 천하의 흉당이다. 물이 없다면 내가 지관 노릇을 그만두겠다.' 그런 호언장담을 해서 실제로 시추를 해 보기로 일정이 잡혔다. 방송사에서도 촬영준비를 하고 기다렸지만 정작 그 시간이 되자 지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풍수는 조작된 허황된 학문에 속한다. 조선 시대 당시 최고의 지관들이 고르고 고른 땅이 대부분 왕릉이 들어선 곳이다. 그러나 조선은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강남구 도심 한복판에 선릉이 있다. 여기 기막힌 사연이 있는데, 그 능은 9대 왕 성종과 그 왕비인 정현왕후가 묻힌 곳이다. 그런데 처음 그곳에는 원래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이 묻혀 있던 곳이다.

 

성종이 죽자 당연히 묘지 논란이 일었고 온갖 풍수논쟁이 벌어졌다. 영의정 윤필상을 비롯하여 당대의 풍수 실력가인 노사신 등 5명이 쓸 만한 묘터를 찿아 헤매더니 드디어 광평대군이 묻혀 있는 선릉 자리를 강력히 추천했다. 조선 왕실의 어떤 자리보다도 명당이며 길함이 있을 뿐 흉이 없는 유일한 곳이라고 하였다. 광평대군의 묘는 이장하면 되었다.

 

왕은 망설였지만 이런저런 논리에 눌리고 말앗다. 좌청룡, 우청룡이 뭐며 사유를 다 갖다 붙이고 사람의 복이 미약한데 왕의 땅에 묻혔으면 오히려 흉한 것이다며 옛날부터 명당은 옛 무덤을 파내지 않은 곳이 없다며 현란하게 주장하여 광평대군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성종과 왕비가 묻혔다.

 

그 결과는?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연을 듣고 폭정이 계속되었고 많은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나고 말았다. 지금 선릉에는 성종과 왕비의 시신이 없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묘지를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서 모두 불살라버린 것이다. 그 대신 쫓겨서 내려간 광평대군의 후손들은 번창하여 화가 복이 되었다.

 

대원군은 집권하기 전까지 지관 정인만에게 부탁하여 전국의 명당 터를 수소문했다. 드디어 지관은 최고의 명당 터라면서 덕산의 한 산기슭을 알려 왔다. 대원군이 직접 그곳에 가보니 그곳에는 가야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었다. 그는 가보로 내려오고 있던 귀한 단계 벼루를 팔아서 충청감사에게 뇌물을 주고 절을 헐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연천 남송정에 묻혀 있던 선친 남연군의 시신을 상여에 담아 5백 리 길을 모셔와서 매장했다.

 

그 결과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고 훗날의 고종이 되었다. 그러나 쇄국정책을 펴던 대원을 궁지로 몰 요량으로 외국 군대가 상륙하여 남연군의 묘지를 파헤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이 유택을 보고 연구하려는 풍수를 연구하는 지관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과연 그 터가 명당 터일까? 오백 년간 긴 왕조가 망해버리고 왕비 민씨가 일본놈들 손에 죽었고 왕 역시 비운에 죽었는데 그 터가 명당 터란 말인가? 자손은 일본으로 끌려가고 후손도 모두 흩어져 버렸으며 정작 자신도 평화롭게 죽지 못했다. 이처럼 나라를 망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으니 그 터가 명당이 아니라 지독한 흉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전북 모악산 최고의 명당에 긴일성 선조의 묘가 있다. 그 묘 때문에 5백 년 뒤에 민족의 숙적 김일성이 태어났단 말인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아프리카 케냐가 고향인데 그곳의 명당에 선조가 묻혀 있단 말인가?

 

1980년대 국내 최고 재벌이었던 한 사람도 지관을 동원, 명당에 선조들을 모셨지만 얼마 후 회사는 망하고 말았다. 그때 지관의 해석이 가관이다. 명당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사람의 사주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도 풍수관행이 뿌리 깊이 남아 있는 시대지만 잘  된 사람들이 조산의 무덤을 잘 써서 그리된 것은 아니다. 모두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강하고 풍수지관들의 현란한 말 쏨씨에 넘어가 잘 된 사람들의 묘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현혹시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지관들은 또 이렇게 과학적인 이론을 제시하기도 한다. 시신이 아무리 썩어도 대퇴부의 큰 뼈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기가 살아 있는 자손들에게 텔레파시를 교환한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살아 있는 사람도 자손을 도와주기 힘든 터에 죽은 시신의 텔레파시가 도와준다는 이론이 허망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묘지를 잘 쓰면 몇백 년 후에는 왕이 나오고 재벌이 나온다? 하긴 태조부터 그런 걸 신봉했으니 후손들이 별 수 있었겠는가?

 

이런 풍수이론이 등장한 것이 바로 조선의 매장문화 때문이다. 화장을 하면 이런 풍수가 나올리가 없을 것이고 명당이론이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우리 사회가 매장문화에서 화장문화로 장례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헬기를 타고 한번 우리 나라 땅 상공을 날아보라, 온 산천이 묘지로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온 국토의 산들이 종기난 산처럼 부스럼이 더덕더덕 난 모습이다. 이 모두가 나라를 병들게 만들었고 허송세월을 보내게 했으며 허례와 허식에 빠진 사상인 조선 시대의 유교사회의 산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