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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42: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7

 

 

 

한국의 역사 942: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7 

  

                                                                        서울 성벽 전 

 

 

 

 

 

 8.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제사와 행사로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인조의 장례 절차에 5개월 걸려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인 것은 이런 허세적인 행사와 예절일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해괴제라는 좀 웃기는 제사가 있었다. 기이한 자연현상이 벌어지면 하늘에 제사를 올려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관습인데 예조에서 단골로 올리는 제사가 이 해괴제였다. 그 내용을 지금 보면  일종의 코미디다.

 

동북면 길주에서 돌이 울어서, 금성이 낮에 나타나서, 삼사동 구리정에서 맷돌 가는 소리가 들려서, 큰 비가 와서, 큰 돌이 움직여서, 부엉이가 울어서, 꿩이 나타나서, 수탉이 암탉으로 변해서, 머리 둘이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서, 대개 이런 식이다.

 

왕에게 보고가 올라가고 지방에서는 예조가 행촉과 제물을 보내 수령이 제를 올리고 대궐 안의 제사는 예조가 주관이 되어 모셨다.

 

대궐 안에 부엉이가 들어오면 불길하다 하여 모셨고 밥상 위의 인기 품목인 꿩이 대궐 안에 날아들면 빼지 않고 제사를 모셨다. 꿩이 무수하게 날아들어 왔기 때문에 해괴제의 태반은 꿩이 원인이었다.

 

나중에 한 대신이 꿩은 대궐 뒷산에서 날아오는 게 당연한데 제사를 모실 필요가 있느냐고 건의하자 드디어 세종이 꿩을 제외시켰다.

 

병에 걸려도 모시고, 자식이 없어도 모시고, 흉년이 들어도 모시고, 장마가 들어도, 도적이 들어도 모셨으니 조선은 제사의 천국이었다. 무당과 점쟁이가 대궐 안에 상주하다시피 했고 일기예보를 하기 위해 오늘날의 천문대격인 관상감에는 소경 점쟁이를 정식 관헌으로 채용했다. 이들은 주역으로 일기예보를 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국조오례의>라는 서적은 이러한 조선의 각종 예법을 규정해놓은 책인데 모두 8권 8책으로 되어 있다. 그중 집안 제사인 가례만 해도 모두 50개조로 되어 있을 만큼 복잡하다. 예조라는 부서는 과거와 학교, 외국사신 영접을 담당하지만 진짜 주 업무는 이런 각종 제사였다.

 

<국조오례의>는 세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신숙주 등이 완성했는데 여기에는 모든 시향 절차도 포함되어 있다. 국가에서 올리는 제사로는, 종국 황제에게 올리는 망궐례, 산천에 올리는 경우, 종묘사직에 올리는 경우, 선옹제, 기우제, 석전제 등이 대표적이다.

 

장례절차야 말로 조선 관료 행사의 클라리막스라 할 만하다. 흉례라고도 하는 장례의 복잡성은 <오례의>에서 모두 91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복, 삭망, 발인, 발우 등으로 이어지는데 세계를 통틀어 으뜸으로 번잡하다.

 

인조는 1649년 5월 8일 재위 27년 만에 승하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철 내내 대궐 안에 석 달 열흘이 넘도록 시신이 부패한 채 안치되어 있다가 9월 11일에야 발인이 이뤄지고 모지인 장릉에 묻힌 것이 9월 20일이다.

 

우선 능을 선정해야 한다.

 

좌의정 심지원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능 터를 잡기 위해 사방을 뒤지고 그 결과 보고를 가지고 날마다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첨지 윤선도는 산행을 가는 데 성의가 없고 뒤에 앉아 건방지게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다는 식의 타령만 한다는 보고가 올라가자 결국 파직을 당하고 귀양을 갔다. 거의 날마나 능에 대한 토론이 벌어져 그곳은 안 좋고 이 곳도 안좋고 해가면서 올라온 보고서가 반려되었다. 당시의 대신들은 풍수에 대한 식견이 대단하여 회의 내용을 보면 풍수지관 회의처럼 되어 있다. 왕까지 가세하여 의견을 내놓는데 두어 달간 논란 끝에 어렵사리 능 자리가 정해지면 이제는 다시 거창한 산역을 벌여야 한다.

 

그동안에도 궐내의 시신에 하루도 빠짐없이 조석전을 올리고 참배가 이뤄지며 제사가 거듭되는 가운데 효종이 병이 나고 말았다.

 

이 5개월의 장례 기간 동안 일반 국사가 제대로 집행되었을 리가 없다. 왕의 복색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발인 절차를 두고 벌이는 다툼, 즉 <오례의>대로 해야 한다는 측과 그건 너무 번잡하므로 다소 생략해야 한다는 측의 설전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예가 효종이 죽고 난 뒤에 벌어진 '예송논쟁'이다.

 

<오례의>에는 발인 당일 궁문과 성문, 모든 교량에 제사를 모시라고 되어 있다. 종묘 등 50개 신위에도 각가가 제사를 모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너무 무리하므로 궁문과 큰 다리에만 올리게 하소서"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효종은 얼른 이를 허락했다.

 

산릉을 조성하는 일도 모두 민간인을 동원하는 것이 원칙인데 일꾼들이 도망치는 사례가 빈번하여 자수를 받고 용서해주자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으니 도망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이 간다. 또 동원될 기미가 보이면 백성들이 행방을 감춰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현종 조에는 승군 1천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강제 소집된 승군들 역시 불만이어서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가 버리고 늙은 중들만 남아 있었다. 신하들이 왕에게 고하여 관련자 가족까지 잡아 처벌하였다.

 

형세가 이러할진데 왕의 죽음에 백성들이 곡하고 슬퍼 하였다는 것은 서울 사대부들의 임무였을 뿐이다.

 

전국 각지의 모든 수령들이 집무를 중단하고 천 리 길 서울로 올라와서 곡을 하는 것도 정해진 규정이다. 이 때문에 예조에서는 올라오지 못한 관헌들을 조사하여 처벌하는 등 번잡을 떨었다.

 

이런 소란을 벌인 끝에 능이 조성되고 간신히 발인을 해도 능에 도착하여 관을 내릴 때까지 또 열흘이나 걸린다. 가는 도중에 도처에서 노제를 올리고 현장에서도 각종 제사가 또 꼬리를 물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효종은 장례현장에 참석하려 했지만 건강을 염려한 대신들의 반대로 단념하고 가져 온 신주를 성 밖에서 맞이했다.

 

영사전에 별전이 모셔지고 칠우제까지 모셔지며 다시 졸곡제가 모셔진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 조문 사절이 와서 동향대제를 모시는 데 참석해야 하고 그 사신들을 접대해야 한다. 거의 한 해 내내 대궐의 주 업무는 장례에 관한 것이 되고 만다.

 

그동안 궁 사람들의 고초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거기 들어가는 엄청난 음식, 제기, 의복 등의 비용과 백성들의 피해는 말해 무엇할 것인가.

 

왕만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다. 왕비, 왕세자, 왕자, 공주, 옹주, 왕비의 부모, 왕세자빈의 부모 등도 그와 똑 같지는 않아도 엇비슷한 절차를 거쳐 장례를 치른다. 3년상, 1년상, 9개월상, 6개월상 등 상복을 입는 것도 직위와 품계에 따라 달라진다. 장자냐 차자냐 삼자냐에 따라 달라진다. 효종이 죽자 효종이 소현세자 대신에 차자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장자로 할 것인가 아니면 차자로 할 것인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 바로 예송논쟁이다.

 

인조의 장례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사신 대여가 나가는 도중 능을 얼마 앞둔 지점에서 상여대가 부러져 버렸다. 급히 임시변통을 하여 도착하였으나 보고가 올라가자 효종이 대노했다.

 

상여대의 나무에 흠이 있어서 그런 것인데 그것을 사전에 찿아내지 못했다 해서 만든 사람, 감독관은 물론이고 국장도감의 총 책임자인 제조까지도 하옥되고 말았다.

 

이런 내용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왕의 복식 하나를 가지고 내내 다투고 사신 접대 형식을 가지고 벌이는 논쟁, 기우제를 올리는 문제로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 등 행사와 예법 문제로 벌이는 갈등만 무수하게 남아 있고 절실한 민생을 가지고 다투는 논쟁은 거의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화에서 여야가 벌이는 대부분의 논쟁과 갈등도 민생보다는 당을 위한, 집권을 위한, 명분을 위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조선 5백년 내내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고 전염병, 수해, 가뭄, 지진 등으로 언제나 곤궁하게 살아왔다. 그런 시절에 왕조는 이런 행사에 온 국력을 쏟아 붓고 있었으며 그것을 간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장레가 치루어졌지만 제사 또한 엄중하여 왕들에 대한 제사나 능 참배가 중대한 행사였다. 능 참배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파직되었다.

 

조선이 처음부터 이런 행사나 제사에 열중한 나라가 아니었다. 태조의 장남 이방우가 죽었을 때 대궐은 3일 동안 조회가 정지되었고 죽은 다음 날 신하들이 조문을 했지만 그다음 날 장례 행렬이 궁을 떠났다. 오늘날의 3일장을 치른 것이다. 태조가 죽었을 때는 100일 남짓 궁 안에 있다가 영구가 떠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왕을 제외하고는 왕자라 하더라도 3일장에 그친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점점 제사와 장례 절차가 까다롭게 변질되었고 그런 허례허식이 조정의 중요 업무로 자리메김 한 것이다. 명분과 가식에 멍든 나라가 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