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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941: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6

 

 

한국의 역사 941: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46 

  

                                                                        서울 성벽 전 

 

 

 

 

 

 8.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제사와 행사로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조선의 국력이 소진된 이유

 

우리나라 보물 제1430호이기도 한 정조의 <화성행행도 팔첩병풍> 그림을 보노라면 실로 장업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참배를 자주 다닐 때 그린 이 병풍 그림은 1795년 정조 19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행차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보고 단지 화려하고 장엄하구나, 그렇게만 느꼈다면 가령 당신은 고위 공직자와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시장거리의 서민 물가에는 관심이 없고 화려한 한국은행 수출 지수만 꿰고 있는 그런 공직자 말이다.

 

윤 2월 중순이라면 아직도 날이 차가운 날씨였을 것이다. 이 행차에 동원된 군졸 숫자가 약 5천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온갖 무거운 깃발을 들고 묵묵히 따라가고 있는 저 하급 군졸들의 모습을 보면 열흘 동안 왕의 행차를 뛰따라 다니다가 수당 한 푼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관례대로 자신이 먹을 밥을 자신이 가지고 와서 먹어면서 동원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8도에 걸쳐 6, 7백만 남짓이었다. 서울, 경기 일원은 많아봐야 백만 남짓, 지금의 수원시 인구보다도 적었다.

 

왕궁의 행사에 동원되는 군사는 모조리 경기, 황해도 지역에서 징발했다. 수원, 강황, 해주 등지가 단골 징집 대상이었는데 당시는 상비군은 거의 없고 군역 대상자들은 연간 순번에 따라 동원되어 각종 경비나 성 쌓기 등을 했다. 동원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민들이었다.

 

광해군 당시 광해군의 생모에 대한 성묘를 위해 대궐 밖으로 나가려고 한 달 전 동원 군졸을 점검하는데 병조에서 난색을 표했다. 그렇게 징집하려면 순번에 따라 강화도와 수원에서 동원해야 하는데 숫자도 3,4백 명밖에 되지 않아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해주 군사는 전번에 동원되었고 그렇다고 호남이나 경상도에서 불러 올 수도 없었다. 그러니 '행사를 자제하소서' 하고 건의했다. 당시 서울의 상비군은 훈련도감의 3,4백 명뿐이고 대궐 수직군사들 약간 명이 보태진다. 그러니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대궐을 장악하는 데 내응한 장수도 있었지만 이처럼 수도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이 미약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라 인조는 쉽사리 반정에 성공이 가능하였다.

 

병자호란이 났을 때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총동원된 군사가 1만 3천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몇백 군졸과 사대부가의 노비들, 대궐 안의 노비들 숫자였는데 그들은 남한산성으로 가서 10만 청나라 군대와 대적하다가 결국 식량이 떨어져 손을 들고 말았다. 호남과 경상도 지역에서 지원군이 올라왔지만 대부분 오합지졸 상태였고 훈련이나 무기도 변변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장수들 또한 문관들로 전쟁 경험이 일천한 무능한 지휘관들이 대부분이었고 서로 상하 지휘계통이 제대로 수립되지도 않아 우왕좌왕하다가 그만 기습한 청나라 기병 수백 명에 졸지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각지에서 올라온 근왕군은 대부분 나중에 책임추궁을 면하기 위해서 올라온 흉내만 내었고 강건너 청군을 쳐자만 보다가 근왕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자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시 전국의 인구가 7백만이라는 숫자도 신빙성이 높지 않다. 당시 시책이 지방의 인구 늘리기, 농지 늘리기, 학교 늘리기였기 때문에 지방 수령에게 항상 당부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당연히 수령들은 인구를 부풀려서 보고했고 허위로 과장된 보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의 인구도 고작 십여 만 명 정도였다.

 

서울에서 수원 화성까지는 백 리 길이 넘는다. 한강을 건너려면 큰 배 36척이 동원되어 어려운 배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배 가진 사람들의 원성과 고달픔이 하늘을 찔렀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또 지름길은 노량진인데 강을 건너 과천을 거치는 것이지만 대신들의 건의가 있었다. 정조의 부친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인데 당시 그 죽음에 찬동했던 역적 김상로의 형 김야로의 무덤이 과천에 있으므로 그 길을 피하여 더 먼 금천과 안양을 잇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그 건의를 받아들였다.

 

행차는 단순히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팎에는 번잡한 일이 수없이 발생한다. 나무 다리였던 안양 만안교를 돌다리로 개축하는 일, 그리고 중간에 왕이 숙박해야 하니 시흥에 행궁을 새로 지었다. 길을 닦느라 인근 백성들이 총동원되었다. 왕의 행차라 행군도 하루 4, 5십 리가 고작이었으니 초봄 추위에 수행하고 호위하는 무리들의 고생이 오죽했을까.

 

조선에서 그래도 평판이 그리 나쁘지 읺은 개혁군주 정조가 그러할진데 다른 왕은 보나마나다. 동우너 군사가 적을 때는 1천여 명, 많으면 5천여 명이 동원되었다. 결국 수원에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한 험난한 요새도 아니요 그냥 호화 성곽이라고 할 만한 화성까지 신축했다. 당시에 국방상 그런 성을 수원에 신축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모양만 화려했지 남공불락의 성도 아니요 화려하기만 했던 성이다. 수원에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여 그 성을 신축하였으니 국고가 탕진되었음은 분명하다. 영조가 지독하고 알뜰하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비축해 놓았던 많은 국고를 그때 대부분 다 사용하였다. 효심이 우선이었고 백성들은 차선이었다. 조선은 이러한 허례와 허식으로 병들어 갔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얼굴 성형에 거액을 투자하고 명품 옷에, 가방에, 신발에, 외제차에, 큰 집에, 자기과시에 헛돈을 사용하는 것도 가정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수원에 행궁을 지어놓고 11년 사이에 12차례나 내왕했는데 매년 한 번 이상 다녀온 셈이다. 가서 제사를 모시면서 통곡하기 때문에 신하들이 놀라서 왕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고 한다.

 

축성공사가 한창이던 중 정조는 돌연 공사를 접을 뜻을 내비쳤다. 흉년에 백성들을 괴롭히고 국고를 소진한다는 뉘우침이 든 것이다. 그러나 웬 걸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고 나섰다. 그 공사 때문에 먹고사는 백성이 많은 데 공사를 중단하고 그들을 돌려보내면 모두 굶어 죽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신들이 완강하게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공사는 그대로 계속되었다.

 

광해군도 생모의 묘에 참배하기 위하여 행차했을 때 양주까지 가기 위해 한 달여 전부터 논의가 벌어졌다. 가는 길이 좋지 못하여 그것을 보수하고 산 위에서 아래까지 참배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추운 겨울이라 공사 중 얼어 죽는 사람도 생겼다. 그런 텃에 광해군은 생모의 묘에도 두 번밖에 가 볼 수가 없었다.

 

왕들은 대궐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정도의 거리인 종묘에 행차한는 데도 그런 식으로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왕이 개인적으로 시킨 것도 아니다. 모두가 왕실의 법도라는 것이 엄정하여 그에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궐을 나서기 바쁘게 그렇게 번잡을 떤 것은 결국 중국의 법도를 베껴온 때문이다. 그 광활한 땅에서 지역 간에 전쟁이 밥 먹듯 일어나고 있던 나라의 규정을 그대로 이 좁은 땅에 적용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귀환한 외규장각 의궤라는 것도 그런 대궐의 복잡한 행사 규범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고서적 자체로는 중요하지만 번잡한 허례허식 내용까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의 이런 행사용 절차 못지않게 번잡한 기록물이 각 종교 단체의 제사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구양성경이다.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제사를 모실 때 갖춰야 할 각종 기물, 배치도, 크기, 차려놓을 음식 등이 상세히 적혀 있고 안치해 놓을 성소의 각종 설계도표가 꼼꼼히 나와 있고 손잡이는 몇 치 몇 푼이며 나무 재질은 무엇으로 해야 하고 제단에서 입구까지 거리는 몇 치로 하고 운반자들의 복장은 어떠해야 하고 몇 시에 출발하고 그런 식이다. 우리나라 제례 때 절차나 홍동백서로 표시되는 제례 음식상과 비슷하다. 누가 처음에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죽은 혼백이 시켰나? 이런 모든 것이 권위적인 종교 집단이나 사회일수록 규범이 엄정하고 복잡하며 번잡한 것이라는 점이다.

 

음식이란 먹기 좋게 배열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왜 그렇게 꼼꼼히 음식별로 놓는 위치까지 지정하여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쌍것인 양 멸시하고 비하하는 사회였다. 아마 앞으로는 제사가 없어지겠지만 죽은 혼백에게 지내는 제사도 허레허식이다. 죽은 뒤 번잡을 떨지 말고 평소 살아 계실때 잘 모시는 게 더 낳지 않을까? 유대인들처럼 조상들의 업적을 주변 나라 신화, 설화, 역사, 민속 등을 좀 차용해 와서 과장하고 부풀리더라도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의 역사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것이 차라리 낳을 것이다. 

 

아마 정조도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그리며 효를 보여줄 심산으로 그런 행사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힘들어 하고 국고가 바닥나는 그런 행사를 삼가겠다거나 아니면 전시도 아니고 위험도 없는 시기라 수하 몇 사람만 데리고 조촐하게 다녀올 수도 있으련만 그런 변동은 일어나지 않앗다. 조선의 국력 대부분은 이런 허례허식에 소진되었던 것이다.

 

왕족의 탄생에서부터 생일, 왕세자의 학교 입학, 졸업, 혼례, 장례 등은 물론 심지어 조선의 상국인 중국의 황제 생일을 맞아 우리끼리 올리는 각종 행사, 때만되면 크고 작은 제사와 행사를 일일이 거론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