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권하는 사회
기업, 가계 공기업 부채 급증
주요 경제주체인 기업과 가계 뿐 아니라 공기업들까지 부채가 급증하면서 대한민국이 부채 1400조원 시대에 들어섰다.
국민 1인당 2883만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빚의 늪'은 오르는 금리와 맞물려 소비여력을 축소시킴으로써 경기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1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가계와 기업이 금융회사에서 빌린 돈은 1409조원을 기록했다. 지난 5월말 처음으로 1400조원을 넘어선 부채는 2개월째 사상최고치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를 통계청이 추정한 올해 인구(4887만5000명)로 나누면 국민 1인당 대출액은 2883만원에 달한다. 가계대출 잔액(652조4500억원)을 기준으로 본 순수 가계 대출액도 1인당 1334만원을 기록했다.
개인 대출 중 60% 이상은 금리가 비교적 낮은 은행권 대출로 446조6700억원(68.5%)을 기록했고 비은행권 대출액은 205조7800억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비은행권 증가율이 5.6~6.5%로 은행권의 증가율 3.8~4.8%를 앞지르고 있어 향후 금리인상이 이뤄질 경우 서민층 가계의 시름이 깊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대출 잔액은 756조6700억원으로, 은행권이 634조2700억원으로 83.8%를 차지했고 비은행권 대출액은 122조4000억원을 기록했다.
올 들어 기업과 가계의 대출은 급격하게 증가해 지난 5월말 사상 최초로 1400조원을 돌파했다. 증가속도도 빨라져 지난 2월 1.4%에 이어 4월 2.5%, 6월 3.9%로 증가폭이 커지는 추세다.
특히 미래 사업을 위한 투자 목적으로 대출을 늘리고 있는 기업보다는 주택에 대출의 대부분이 묶여 있는 가계의 대출 증가가 더욱 위협적이라는 분석이다.
박승환 한국은행 금융통계국장은 "기업의 경우 부채의 절대 금액보다는 재무구조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반면, 가계는 증가세가 우려된다"며 "정부가 쉽사리 총부채상환비율(DTI)을 풀지 못하는 것도 가계대출 규모가 추가적으로 확대될 것을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상로 산은경제연구소장은 "우리 가계의 높은 부채비율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국내외 금융위기와 부동산위기가 진행되는 현 상황에서 소비심리를 크게 위축시킬 수 있다"며 "재테크의 제 1전략을 '무조건 빚 갚기'로 두는 현명함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한편, 최근 잇따라 재정위기를 맞고 있는 지자체의 금융회사 대출금은 6월말 현재 은행·비은행을 통틀어 2조4900억원을 기록, 사상 최초로 2조원을 넘어섰다.
이지은 기자 leezn@
빚 권하는 사회
벤처캐피털의 본산인 미국에서도 아무런 실적이 없고 신용등급도 낮은 벤처기업가가 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초창기 벤처기업가에게 돈을 대주는 곳은 오로지 '3Fs'뿐이란 얘기가 벤처업계의 불문율로 통한다. 여기서 3F는 가족(Family), 친구들(Friends), 그리고 바보들(Fools)이다. 가족과 친구들은 떼일 것을 각오하고 돈을 대주는 사람들이다. 돈을 빌려주는 데 따르는 위험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자를 제때 물지 않아도 괜찮다. 처음부터 이자를 받아 돈을 불리자고 빌려준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가 아닌 '남'들 가운데 돈을 빌려줄 사람은 '바보들'밖에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선뜻 돈을 빌려줄 사람은 사실상 없다는 뜻이다.
바보가 아닌 사람들이 돈을 빌려줄 때는 여러 가지를 따진다. 우선 돈을 빌리려는 사람이 제대로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보고 빌려줄지 말지를 정한다. 확실하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 담보를 잡기도 한다. 잡힐 담보마저 없는 경우엔 신용도에 따라 금리를 높게 매길 수밖에 없다. 돈을 떼일 가능성이 높은 만큼 단기간에 자금을 회수하거나 떼인 돈을 메워야 할 필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돈을 빌리려는 사람 입장에선 야박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상업적으로 돈 장사를 하는 금융회사들은 더욱 까다롭게 신용도를 따지고, 엄격하게 이자를 물린다. 금융회사가 빌려주는 돈은 누군가가 과거에 땀 흘려 번 돈을 맡긴 것이기에 자칫 떼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함부로 빌려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금융시장에선 금융회사별로 담보 확보 여부와 대출자의 신용도에 따라 금리가 촘촘하게 차등 적용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금융시장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서민대출 금리가 너무 높다'고 하자 캐피털사들이 다투어 금리를 내리고, 시중은행과 저축은행들이 연일 서민대출을 늘리기에 혈안이 됐다. 그에 앞서 최하위 신용등급자들을 상대로 하는 대부업체의 최고 상한금리가 낮춰지고, 금융감독당국은 낮아진 대출금리가 제대로 지켜지는지를 확인해 보겠다고 눈을 부라렸다. 그동안 돈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데다 그나마 돈을 빌리더라도 다락같은 고금리에 시달렸던 이른바 '서민'들에겐 그야말로 좋은 시절이 찾아왔다. 돈 빌리기가 수월해진 것은 물론 금리마저 낮아졌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좋아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많아 보인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보수적이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금융회사들이 단박에 서민대출을 늘리고, 금리를 낮추는 품이 여간 수상쩍은 게 아니다. 무엇보다 신용이 낮은 사람에게 대출을 늘리고 금리를 낮춰준다는 게 금융이 돌아가는 근본이치에 맞질 않는다. 금융시장에선 벌써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을 '서민'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금융지원을 하다 보니, 신용도에 따른 금리 차등이라는 기본적인 신용질서가 헝클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용등급에 따른 금리 격차가 지나치게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신용등급이 높은 사람이 이자를 더 무는 금리 역전 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서민'의 자격에 억지로 맞춘 부당대출이 일어나는가 하면, 일각에선 '서민'증명서를 위조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금융의 기본원리에 어긋나는 서민대출 확대가 아무런 문제없이 지속되기는 어렵다. 당장 대부업체의 최고금리를 낮출 경우 한계금리에 급전을 쓰던 최하위 신용등급 계층은 제도권 금융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갈 곳은 초고금리에 불법 채권 회수로 악명 높은 사금융밖에 없다. 서민을 위한다는 최고금리 인하가 가장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더 어려운 지경으로 내모는 것이다. 서민금융이 최소한의 수익도 못 내거나 부실이 늘어날 경우 금융회사들이 이를 얼마나 더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금융원리에 어긋나는 대출제도는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신용등급에 따른 금리 격차 구조가 무너질 경우 그로 인한 금융권의 혼란은 짧은 시간에 수습되기 어렵다.
무엇보다 최근의 서민금융 확대가 불러올 가장 큰 위험은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다. 이번 서민금융 확대로 그동안 돈 빌리기가 어려웠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돈 빌리기가 쉬워지고, 금리부담도 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금리가 낮아도 대출은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일 뿐 하늘에서 떨어진 공돈이 아니다. 쉽게 빌릴 수 있다고 해서 덜컥 돈을 빌렸다간 자칫 더 큰 빚쟁이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저신용자에 대한 고금리는 과도한 대출을 억제하는 순기능도 있다. 자신의 상환능력을 벗어난 무리한 대출을 막는 과속방지턱이자 스스로 엄격한 신용관리를 해야 한다는 무언의 경고장 역할을 해온 것이다.
사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론(비우량주택담보대출)이 부실화되는 과정은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 확대가 얼마나 큰 위험을 안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돕는다며 무리하게 서민대출을 늘린 것이 결국은 서민들을 옥죈 올가미가 된 것이다.
술 권하는 사회도 문제지만 빚 권하는 사회는 더 위험하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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