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여름 17
한국민속예술축제
한국민속예술에 대하여...
민속예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매일 국립국악원을 지나오다보니 관심이 조금씩 생기게 되었다. 지난 9.10일부터 13일까지 국립국악원에서는 한국민속예술축제(50회)와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16회)가 열렸다.옛날에는 민속경연대회로 치렀으나 지금은 축제로 명칭을 바꾸어 매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민속축제를 둘러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마지막날 일요일 오후에 등산을 갔다가 일부러 들렀다. 오후 4기경 시간은 거의 마지막 전북팀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평소 국립국악원의 분위기를 지나다니면서 느끼고 곳곳에 부착된 공연스케쥴을 보면서 정부나 관련단체에서 민속예술을 계승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것 같으나 아직까지 대중들의 마음속에 크게 차리메김을 하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마음에도 민속예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없는지라 별로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민속예술이 민족고유의 전통풍습이나 내가 자라나는 동안 고향마을에서 보아왔던 봄철 풍악놀이,지신밟기,굿 정도만 보아 왔다. 그 이후에는 주변에서 자주 보았던 것도 아니기에 민속예술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문외한인 내가 느끼기에 지금은 단절되었던 민속예술이 되살아나고 있으며 많이 확산되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수한 무형문화재,연예인들이 나타나 민속예술을 한단계 격상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오늘날의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가슴에 쉽게 와 닿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조선 500년 동안 유교사회에서 고려시대 부패하였던 불교와 무속인이 같이 천대를 받게 되지 최하층민으로 전락하면서 하나 둘 사라지게 되었고, 그후 일제 36년간 일제의 문화정책 말살로 말미암아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으며 해방 후 역대 정부에서도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못했고 서양에서 버림받고 쫒겨난 종교들인 천주교,기독교가 사랑과 봉사,희생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하층민에게 파고들어 국민들에게 전파되면서 기존의 전통민속신앙은 무시되기에 이르며 무속과 국악에 대한 홀대로 이어져 민간생활에 제대로 이어오지도 못했다.
또 정부의 미온적인 문화정책과 남북의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민족예술은 더욱 도외시되어 왔으며 문화예술의 관련단체도 서로 파벌싸움에 열중하여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였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념이 다른 정부에 따라 문화정책이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예산도 열악한데다 효율적인 집행도 제대로 못해 왔다고 생각한다. 또 민속에술의 특성상 각종 음율속도가 느릴뿐만 아니라 예술적 표현에는 재능있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야 하고 해당 인간무형문화재의 특출한 재능이 필요하며 무대설치와 장치들이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문제점 등으로 현대적인 각종 예술표현에 비해 어려운점이 많이 내포된 단점도 있었다. 특히 미국.유럽 등 서양에서 들어온 서양음악의 템포에 비해 민속예술은 대부분 느린 음율로 조화하지 못하였고 바쁜 현대인에게 적응하지 못한 점도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생각된다. 물론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헌신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 전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부족한 점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민족에게 잊혀졌던 한국민속예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장려정책이 추진되어야 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민속에술은 반드시 부흥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이념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인적자원 문제,정부지원 문제,관련단체 문제, 예산확보 문제, 공연공간확보 문제, 현대음악과 조화문제, 개발.발전.계승문제 등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이는 이조 500년,일제 36년,해방 65년 도합 600년 가까운 장구한 세월동안 천시 받아온 민족예술의 정체기를 겪어온 결과이지만, 지금이라도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외국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우리사회에서 민속예술은 설자리를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정부, 관련단체,학계,전문가,연예인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민속예술 전승.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민속예술의 현대화 등 새로운 범민족적인 대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민속예술의 기원 및 발전
고대 및 삼국시대
고대 원시시대부터 인간들은 씨족이나 부족단위로 하늘이나 땅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주요한 생활의 한부분으로 차지하여 왔다. 정착민들에게 가믐이나 흉년은 많은 아사자를 속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지도자는 모두 제사를 주관하는 우두머리였다. 자연재해는 엄청난 재난을 몰고 왔으며 이러한 재난을 극복하는데는 제사를 통해서 하늘과 땅의 신에게 노여움을 풀어 달라고 기원하는 의식이 중요한 행사였다. 제사장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지도자로 추앙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왕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민간인들은 부족단위나 마을 단위로 제사를 올렸으며 각가정마다 각종 지신들에게 가족의 소원을 기원하는 민간무속신앙이 발전하여 왔다.
고대 중국인들은 우리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으며, 동이족의 춤을 '매리 주리'라 하였고, 춤은 '지모무'라 불렀다.부여에는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이라는 행사를 열었으며,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또한 마한, 진한, 변한의 3한도 그러한 제천의식의 행사로 온 국민이 즐거움을 함께 하였다. 특히 진한에는 '슬'이라는 현악기가 쓰였다고 하는데, 이 악기는 우리말로 '고'라는 악기이며 '가야고'의 원형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제천의식은 음악과 춤으로 제사를 집행하였으며 이 제사는 일종의 굿 놀이로 현재 5월의 강릉 '별신굿'과 10월의 각 지방의 '도당굿'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삼국의 무속은 무당이 주제자(제사를 주관)로서 의무(의술을 가진 무당)와 예언의 직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 고대 삼국의 원시종교에는 신을 숭상하고 존경하는 신도적 신앙과 악령을 숭배하여 제사하는 샤만적 술법 같은 신앙이 혼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무는 박사, 박수, 화랑, 낭중, 양중이라 일컬었으며 화랑은 결국 광대, 창우, 우인, 재인으로 후세에 계승되고 있다.이들의 굿노래가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현재 제주도의 '본향풀'이나 서울 '바리공주'의 가사는 고대 서사시의 계통을 이은 무사 가요로서 고대에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고려시대
고려때는 궁중이나 민간 할 것 없이 무속신앙이 풍미 하였고 '나례'와 '산대잡희'가 있었다. 나례는 한해의 재앙의 근원인 사귀를 쫓아내고 즐겁고 경사스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하여 음력 12월 재야에 궁중에서 행하는 의식이다.나례는 점차 악귀를 쫓아내는 의식에 그치지 않고 관중을 즐겁게 하는 구경거리 즉 '나희'로 변하였는데 여기서 '우인' 또는 '창우'라고 부르는 직업인이 발생하고 이들이 연출한 우희 또는 잡희가 12세기 초에 출연한다. '산대잡희' 또는 '산대잡극'을 대개 '정재무인 헌선도', '가면무인 처용무와 곡예'로서 연출되며 동물의 '모의춤'도 공연하였다. 산대잡희는 '연등회'와 '팔관회' 외에도 임금의 연회와 개선장군의 환영연에도 행하였다.
팔관회와 연등회가 국가적 종교행사로 자리 잡았지만 이 두행사는 겉으로는 불교행사로 보이지만 그 내용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무속의 축제전통을 이은 것이다.양자가 겉으로는 불교적 이름을 취하고 있으나 내용은 모두 호국적 시조제, 기복제의성격을 지니며 군신과 백성이 음주 가무하고, 무당이 천신, 용신, 산신 및 하천신에게 재물을 바치는 등 토속적 신앙의 면모를 보여준다. 비를 내리게 하고 복을 빌며 재앙을 물리치고 병을 고치며 서낭과 산신을 섬기고 비는데 무당이 주재하였고 임금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고려때의 무속은 불교가 흥성했던 중엽보다 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한 중엽이후부터 더 성행하였으나 음악이 어떤 것이었는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때 음악을 수집한 시용향악보에 굿음악으로 보이는 12곡의 악보와 가사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나례가(평조), 성황반(계면조), 내당(계면조), 대왕반, 잡처용(평조), 삼성대왕(평조), 군마대왕(평조), 대국(평조), 구천(평조), 별대왕(평조), 등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는 유교를 국교로 삼은 관계로 조선 초기부터 굿을 단속하는 법을 만들어 세금을 메기고, 무당을 한양에서 쫓아 냈으며 급기야 무당은 노비, 승려, 백정등과 함께 사회 최하층인 8천의 하나로 규정되는 등의 박해가 연이었다.
고려의 국가적 제례인 연등회와 팔관회를 낭비로 본 까닭도 있지만 보다 더 큰 이유는 유교 이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세계관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지배층이 종교를 핑계로 구시대의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목표가 정말로 무당 천대에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왕실에서도 19세기 말까지 꾸준히 굿을 벌인 기록이 남아있으며 나례와 산대잡희도 고려에서 조선조에 전승되어 태종, 세종, 성종, 중종대를 이어 광해군때 나례도감, 산대도감을 설치하여 이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민으로 떨어진 무당에 대한 사회적 천시는 매우 심각하였고, 이와 함께 무속예술도 배척 당하던 불교와의 융합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 하였으며 무신도 석가모니, 무학대사, 삼불제석 등이 주요한 신령으로 모셔지기 시작하였고 불교 역시 무속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받아들여서 원래 불교에는 없었던 삼신각, 칠성각등을 지어 민간신앙인 무속까지 받아 들여서 포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영조 정조조에 이르러 나례도감이 그 명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예속되어 생활하고 놀았던 많은 창우. 광대들을 비롯한 가기와 재인들은 실질적인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외에 이들보다 더 천직이며 원래 무녀의 혈통을 이은 파행적인 집단인 '사당패'라는 집단이 있었다.
이사당패는 처음에는 여자들로만 집단을 이루었는데 어느 시기에 가서 남사당의 무리도 있게 되었다. 광대와 재인들은 일정한 주거지가 있어서 활동무대가 사당패 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다. 반면 사당패는 이와는 달리 그들 끼리 무리를 지어 정처없이 다니면서한 마을에 다니면서 풍물을 잽힐 때는 반드시 그 고을의 고로를 찾아가서 허락을 받았는데 이들 향리인 아전들은 현대의 기획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조선후기는 무속예술 속에 녹아있던 노래와 춤 기악 반주 등이 종교와 관계없이 무속의 영향을 받아 파생 된 새로운 장르의 예술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제시대의 우리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무속도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현대에 와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장려 때문에 무속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서 무속의 많은 영향을 받은 우리의 전통예술 역시 한때는 침체기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무속에서 독립된 민속예술
1). 판소리
판소리는 조선조 후기의 숙종 말에서 영조 초에 생겨났다고 한다. 판소리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전라도의 무속, 무악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가장 옳다고 본다.무당과 박수들은 인간과 하늘 사이를 주술과 기원과 음악과 무용으로서 연결시키는 안내 자이자 사제였다. 무격들은 부부 또는 고부로 팀을 이루는 수가 많았다.아내 또는 시어머니는 주술과 기원을 맡고, 남편 또는 며느리는 징, 북, 장고 등을 두드리며 소리와 춤으로 굿의 분위기를 조성한다.무격들은 슬픔과 근심에 젖어있는 굿을 청한 가족들과 구경꾼들에게 근엄한 의식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에 뜸을 들여서 위안의 장을 마련한다, 덕담, 재담, 춤, 노래, 소리 등으로 위로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덕담과 재담은 아니리가 되고 노래와 소리는 창이되고 춤은 발림이 되어서 판소리라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이 탄생되었다고 보여진다. 또 이 판소리는 굿의 마당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명절에 장과 놀음판의 곡예에 함께 등장하기도 했고, 양반댁의 잔치에 여흥으로 나타났다. 판소리는 처음에는 서민층의 애환이 흥이나 한으로 표출되었지만, 차츰 양반의 관심사가되었고 특히 그 지방의 향리인 아전들에게는 좋은 소일 거리가 되었다.
아전들은 양반은 아니지만 백성들 사이에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식견은 넉넉한 편이었다. 따라서 무격들과 광대들에 의해서 짜여진 조잡스런 판소리는 양반층의 관심사와 함께 아전들에 의해서 기획되고 다듬어 졌다. 그중에서도 오늘날의 판소리가 남아 있도록 가사를 정리한 양반이었던 신재효는 판소리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판소리는 원래 12마당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전,강릉매화전, 옹고집타령, 장끼타령, 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어었지만 지금은 판소리 5바탕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말하며 가끔 박동진 선생께서 변강쇠전을 부르기도 한다.
요즘은 유관순전, 예수전등의 창작 판소리가 불리워지기도 한다. 판소리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그 동편인 운봉, 구례, 순창 등의 소리로 웅장하고 씩씩한 우조로 되어있어 이를 동편제라 하고, 그 서편인 광주, 나주, 보성, 장흥의 소리는 대체로 섬세하고 감칠맛이 있는 계면조로 이루어져서 이를 서편제라고 하며,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쯤되는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많이 부르는 중고제로 되어있다.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정정열, 김창룡 등을 조선 5명창이라 하였다.
2).산조음악과 시나위
ㄱ). 산조음악 : 남도 서사무가에서 종교와 무관하게 독립되어 새로운 장르로 탄생된 민속성악곡 판소리의 가사를 떼어내고 멜로디를 연주하면 바로 산조가 된다는 판소리에서의 산조 파생설이 있다. 맨 처음 가야금 산조를 김창조가 만들어서 여러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제자들이 스승의 가락에 자기의 가락들을 덧붙여서 그의 이름을 내세운 류파가 형성되었으며 지금은 성금연류, 김죽파류, 최옥산류 등의 여러유파가 전해지고 있다.
장단 구조는 가장느린 진양조부터 시작하여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기본장단에 류파에 따라서 굿거리, 휘모리, 단모리등의 장단이 보태지거나 빠지거나 하고 산조의 장단은 곧 악장을 뜻하기도 한다. 산조의 선율구조는 평조, 우조, 계면조로 구성된다. 그후 최근에는 아쟁산조, 대금산조, 해금산조, 거문고산조, 피리산조 등의 모든 악기들이 산조음악을 만들어서 연주하고 있으며, 주로 독주의 형태로 많이 연주되지만, 때로는 드믈게 합주로 연주 될 때도 있다.
ㄴ). 시나위 음악 : 이와 함께 남도무속 춤반주였던 시나위는 각 악기별로 단잽이들이 장고 장단에 맞춰서 즉흥적으로 연주하게 되며 각기 다른 멜로디로 연주하여도 종지부분에서는 서로 만나서 조화를 이룬다. 특히 산조와는 다르게 선율구성이 계면조로만 되어있다.
ㄷ). 남사당놀이 : 이들의 공연 종목은 풍물(농악), 버나(쳇바퀴 돌리기), 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덜미(꼭두각시 놀음) 등의 보통 여섯마당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외에 얼른(마술) 등도 공연하였다.
그 이외에도 경기 도당굿에서 파생된 경기민요와 경기잡가, 대감놀이, 무용은 도살풀이 무당춤, 무당춤에서 파생된 우리 한국무용의대표적인 춤의 하나인 부채춤, 신칼대신무, 진쇠춤 등이 무대화 되어 공연되고 있으며, 남도씻김굿에서 파생된 남도민요와 남도 살풀이춤, 지전춤, 불교의식 춤인 무구를 들고 추는 바라춤 등의 많은 전통무대 예술종목이 있다.
그림으로는 산신화, 신장도와 같은 탱화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예술 속에는 무속의 영향을 받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되고 새롭게탄생되어 발전하고 보존되고 있는 예술 작품의 곧곧에 무속의 영향력이 녹아있다.
이러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전통예술들을 발굴하고 보존하여야 하며, 각종 경연대회와 문화재 전수소를 통하여 배출되는 문화예술 인력들을 사장시키지 않도록,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하여 주고, 우리의 문화예술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도록 정부차원의 정책적인 배려도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유. 무형문화재의 지정을 하여 많은 문화 정책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던 전통예술에 대한 가치관이 조선시대의 유교정책으로 인한 무속에 대한 홀대와, 일제 때의 우리문화 말살 정책으로 더욱 그 위상이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아 우리의 문화예술이 무속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재인식 하여야 할 것이다.
종교는 개인의 자유이니 만큼 외래종교의 숭상도 좋지만, 우리의 토속 종교인 무속에 대해서도 가치관을 바르게 세울 팔요성이 있다고 본다.오늘날에도 인간은 항상 나약한 존재여서 미래의 불확실한 불안에 대해서 초조해 하며 다종교인 우리나라 현실로 볼 때 각자 나름데로선택한 종교에 마음을 의지한다.
이러할 때 무속인들도 자긍심을 같고 책임있는 사제의 도리를 다하여 혹세무민 하는 일이없도록 반성하고, 괴롭고 슬픈 외로운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바른길로 인도 한다면, 우리의 무속도 보다나은 종교적인 입지를 세우고, 무속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국의 전통예술인들도 한층 훌륭한 환경 속에서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활동하게 되리라고 본다.
한국민속예술축제(경연대회) 발전과정
우리 겨레의 정신문화유산인 전래되어 오는 각 지방의 고유 향토민속예술을 발굴, 재현하고 이를 보존, 계승하기 위하여 매년 여는 전국 규모의 민속행사를 해오고 있다.
본래 이 행사의 명칭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였는데 1999년 한국민속예술 경연대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58년 8월 대한민국수립10주년기념행사의 하나로 개최하여, 1959년과 1960년 두 해를 거른 뒤 1961년부터 공보부(현재의 문화관광부) 주최로 오늘날과 같은 대회의 성격을 띠고 매년 개최하게 되었다. 그 뒤 1966년까지는 공연장·재정상태 등을 고려하여 서울에서 계속 개최하였으나, 1967년부터는 지역간의 문화격차 해소방침에 따라서 지방의 대도시를 돌면서 개최하였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전국민에게 문화혜택을 더욱 폭넓게 누리게 하기 위하여 공연장소 등 제반 여건을 어느 정도 갖춘 지방의 중소도시에서도 개최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1989년에는 대회 개최 30주년을 기념하여 ‘화합의 한마당’을 행사주제로 특별행사 성격의 해외동포예술단공연까지 벌임으로써 국내외 동포간의 유대강화 및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하는 계기로까지 이 대회를 발전시켰다.
이 경연대회는 이북5도를 포함한 특별시·직할시·각 도 사이의 경연형식으로 벌어지는데, 매년 10월 중 3일간 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사정에 따라 약간의 변동은 있다.
한편 1994년 제35회부터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민속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전승, 보급을 위해, 제1회 전국청소년민속예술경연대회를 춘천에서 개최한 이래, 매년 본 행사와 병행하여 개최해 오고 있다. 1999년 제40회부터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를 한국민속예술축제로, 전국청소년민속예술경연대회를 전국청소년민속예술제(2009년 현재 한국민속예술축제는 50회,전국청소년민속에술제는 16회)로 변경하였다.
경연종목은 초기에는 농악과 민속놀이의 두 종류로 시작하였으나 뒤에 민요와 민속무용을 추가하였다. 경연장소는 실외로 한정되어 왔으나, 제28회 대회(1987) 때부터 마당종목은 실외, 무대종목은 실내로 나누어서 경연하게 되었다. 참가 연희자의 자격은 연희를 생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연희시간은 30분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시상내용에는 대상인 대통령상을 비롯하여 국무총리상(내각수반상에서 바뀜)·문화관광부장관상(공보부장관상·문화공보부장관상·문화부장관상을 거쳐 바뀜)·개인상·공로상·장려상 등이 있다. 이 대회의 연도별 개최지와 주요 상의 수상현황은 〔표 1〕과 같다. 심사기준은 원형보유도, 연출방식, 연희의 짜임새, 연희기교, 연희자의 진지성, 멋과 흥취의 보유도, 관중의 호응도 등에 두고 있다.
이 경연대회를 통하여 거두어진 성과는 일제하의 우리 문화탄압과 6·25전쟁 등으로 인해 사라져가던 우리 전래 민속예술을 다시 발굴, 재현시킨 데 있다. 그 결과, 1998년 제39회대회 때까지 총 416종목을 발굴, 재현하였고 그 중에서 특히 가치가 크다고 인정되는 광산고싸움놀이·안동차전놀이·남사당놀이 등 35종목은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그리고 동래학춤·정선아리랑 등 53종목은 시·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존하게 되었다.
이 경연대회의 문제점으로는 민속예술이 생활현장을 벗어난 곳에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연희됨으로써 원형이 변질될 수 있다는 점과 이 대회를 통하여 발굴, 재현된 많은 민속예술들이 생활현장에 널리 보급,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또 경연대회에 지자체들의 과다예산투자로 운영과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전문경연장부족과 예산부족으로 지속적인 계승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경연대회도 돌아가면서 나누어 받는식의 시상관행과 참가자들의 열악한 대우와 보수로 인하여 참여의식이 소극적이다. 또 무엇보다도 일반생활에 접속하지 못하는 관계로 일반인들의 관심이 멀어지고 있으며 현대문화와 융합이 저조한 실정으로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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