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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좋은 책, 요약,그리고 비평

조선왕 독살사건...

 

조선왕 독살 사건들...

 

 
 
'조선왕 독살사건' 저자 이덕일씨는 1961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우리 역사>를 � 책으로 본격적인 역사서를 쓰기 시작하여 <사도세자의 고백>,<우리역사의 수수께끼> 등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학문적 깊이와 인간 중심의 사관을 바탕으로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사 서술에 주력, 2000년 이후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아나키스트 이희영과 젊은 그들>,<역사에 길을 묻다>,<오국사기>,<정약용과 그의 형제들>,<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과 실패한 개혁> 등을 내놓았다. 현재 한가람역사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저서 중 2005년에 출간한  '조선왕 독살시간'을 보면 이씨 조선의 27명의 임금 중에 무려 8명의 임금, 2명의 세자가 독살설에 휘말렸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과 당시 사료를 기초로 이러한 이론을 펴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인 특색이 있는데, 독살설의 배후에는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 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 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는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擇君)이라 하는데, 국왕 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 치우는 것이다. 왕을 갈아 치우는 것을 '반정(反正)'이라 한다. 연산군을 내쫓은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데타였다. 그나마 '정도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살'이다. 반정과 독살은 둘 다 신하들이 임금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반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덜 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이자 왕조 국가 조선이 말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 국왕과 세자 중 독살설에 휘말린 인물은 예종,인종,선조,소현세자,효종,현종,경종,사도세자,정조,고종이다.
 
조선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느 왕조보다 임금의 독살설이 많다. 여러 이유가 있으나 왕조의 역사가 유달리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이러한 장기집권의 정치형태의 특징은 중국과 일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왕권과 사회체제였다.
 
조선은 1392년 건국되어 1910년 일제에 점령당할 때까지 무려 518년이란 긴 시간 동안 존속했던 왕조였다. 특히 한반도의 역사를 보더래도 고구려.백제.신라.고려 왕실이 모두 500-800여 년씩 존속했다. 이처럼 왕조의 생명이 긴 경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의 왕조는 200-300여 년을 주기로 생성과 멸망을 거듭했다.
 
일본은 1500여 년의 존속기간 동안 고대 벽제계 유민이 원주민을 점령하여 천황가를 세워 통치했던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제사장 수준에 머물렀고 실제 권력은 '다이묘'나 '막부'의 '쇼군'(장군)이 행사했다. 막부의 장군도 세습체제였는데 실제적인 국왕이었으며 막부는 왕조였다.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 '카마쿠라' 막부가 1185년부터 150여 년간, 그 뒤 '무로마치' 막부는 240여 년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260여 년간을 존속했다. 가마쿠라-->무로마치-->에도 막부의 교체는 우리나라 고려-->조선왕조의 교체와 마찬가지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다는 징키스의 원나라가 집권한 기간은 1206년부터 1368년까지 160여 년에 불과했다. 그 뒤의 명은 1368년에 건국되어 1662년까지 약 300여 년간 존속한 것이며, 만주족이 세운 청은 명과 각축하는 기간까지 포함하여 1616년부터 1911년 신해혁명으로 멸망시까지 약 300여 년 동안 존속했다.
 
국가나 왕조는 '창업기-->성장기-->발전기-->쇠퇴기-->소멸기'를 거치는 사이클을 지닌다. 그런데 조선은 쇠퇴기,멸망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였다. 지배계급인 사대부들이 피지배계급인 농민들 위에 군림했던 주선의 사회 체제는 임진왜란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한 셈이었다. 조선의 지배체제는 사실상 붕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개국 초기 조선은 사대부,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모두 병역의 의무를 지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로 바꾸면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 개국후 2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양반계급은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으면서 지배층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훈구.주자.명분론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권리만 있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나라로 병자호란,임진왜란시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이미 생명을 다한 나라였으며 순리대로라면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만 했다. 인조반정후 '이괄의 난'이나 선조시 '정여립 옥사 사건'을 계기로 이씨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어야 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사대부들은 무려 300여 년이란 세월을 통치자로 군림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왕권의 유지에 불과 하였고 권력은 사대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이러한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로 생명을 유지하였는데 '국왕독살설'이 선조 이후 본격적으로 다발되었다는 점이 시사를 해주고 있다. 식물 인간같은 왕을 왕좌에 앉혀 놓고 사대부들은 저희들끼리 권력쟁탈을 위한 붕당을 조직하여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전개하였으며, 세자와 왕자, 심지어 왕비,후궁까지 무차별 공격을 일삼았으며 임금이 바뀔때마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 잔개되었으며, 각종 사화가 발생할 때마다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지방 유림세력까지 1000여 명이상 관련자와 반대파들에 대하여 참수,장형,태형 등 살륙과 귀양을 보냈다. 
 
조선.중국의 임금과 일본의 쇼군은 권력 행사 크기가 달랐다.
 
일본은 막부 장군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정복한 지역 영지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했고, 다이묘들에게 할복을 명할 수도 있으며, 할복을 거부하면 군사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살륙전을 전개했다. 막부 장군의 힘이 약해지는 순간 언제라도 예하 장군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중국의 황제권은 절대적이었다.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모든 권력기구를 황제가 직접 통제하는 체제로 변경시키고 절대권력을 행사하였다. 중국이 대신들보다는 환관들의 전횡이 문제가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보니 황제와 지근거리에 있던 환관들이 힘을 가진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왕조 국가인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왕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 황제처럼 절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절대권이었을 뿐 실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끓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무조건적인 숭배나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도 많았다. 조선 국왕은 정승 한 명 임명하는데도 신하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조선에서 왕권이 위협받고 심지어 독살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은 당론이었다. 당론이 정해지면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이 아니라 당론을 따랐고, 당론이 치열해지면 신하들은 왕명이 아니라 당명을 따랐다.숙종같은 왕은 당파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한 전형적인 예도 있었으며 왕비와 후궁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왕비에 대한 각 당의 당론까지 왕권강화 수단으로 사용했다. 남인쪽 장희빈을  총애할때는 남인을 집권시키며 서인을 내쳤고, 서인쪽 인형왕후 민씨를 총애할 땐 남인을 내치고 서인을 중용했다. 그때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정쟁이 계속되면서 숙종은 당쟁을 통해서 스스로 왕권을 강화한 인물이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조선은 일제에 침탈되는 왕조멸망의 길을 초래했으며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통치는 한반도 곳곳 산하에 민족정기를 말살할 목적으로 쇠못을 박고 막대한 자원 수탈을 일삼았고 수많은 생명을 전쟁터로 내보내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힘없는 나라는 결국 두동강 나고 그것도 모자라 민족간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래서 이 강토는 풀뿌리 하나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 되었고 수백만 백성들이 산화했다. 후손들이 평화롭고 안락하게 살아가지 못하게 만든 열성조 시대의 불행한 역사가 두번 다시 이 땅에 재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나라 상황은 아직도 당쟁과 권력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사대부 같은 공리공론으로 권력만 휘두르고 의무는 없는 지도층들이 조상의 역사를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편협한 사상과 편가르기로 자신만 이득을 챙기려는 지도층이 득세하는 한 나라는 망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행동으로 이나라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며 이땅에서 우리들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 서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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