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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와 국방/안보 불감증

1592.4.13 부산 앞바다...

 

임진왜란은

조선반도 불행의 시초였다!

 

1592년 4월 13일,부산진성 전투...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1번대 18,700명은 병선 700여척에 분승하여 쓰시마를 출발하여 그날 오후 부산포 절영 앞바다 에 도착했다.

 

포구 주변에 조선군 배는 한척도 보이지 않았다. 첨병으로 하여금 포구 일대를 수색토록 하고 일부 병력은 부산진성 주변으로 정찰을 올려 보냈다. 조선군의 매복을 염려하여 고니시 장군은 어둠이 짙어지자 숨을 죽인체 부산포구를 유심하 살폈다. 불빛도 없고 인적도 없다. 아니? 조선군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밤새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거듭한 고시니는 뜬 눈으로 날을 새고 새벽 6시를 기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안전한 곳으로 판단된 우암동 방면으로 상륙부대를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상륙후 전열을 갖춘 부대는 부산진성을 향하여 첨병을 앞세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산하는 고요하였다. 병사들은 지나가는 길 도로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수색을 하였으나 민간인들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니 민간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조선 수군은? 고니시 장군은 전진하면서도 너무나 조용한 부산진 일대의 모습에 의아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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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종군한 포르투칼 신부 '프로이스'종군기록>


"고니시는 20,000명의 전투원과 함꼐 총 643척의 크고 작은 배에 편승하여 쓰시마섬을 출발하였다. 특히 부산성이라?불리는 요새는 일본인들이 들이닥칠 첫 관문인 관계로 그곳에는 600여명의 병사가 있었으며, 그외에도 마을에서 모은 평민들이 있었다.

 

 연도에는 모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지 앞에 끝이 뾰족한 쇠(마름쇠)들을 뿌려 놓았으며, 요새 내부에는 구리로 만든 작은 포들이 2,000개나 배치되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작은 포환을 발사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크기가 두뼘 정도되는 화살촉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코라이 병사들은 모두가 매우 견고한 가죽으로 만든 흉감을 몸에 두르고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화살을 막아내기 위해 철모를 쓰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궁수들이 많고 또한 미늘창을 쓰는 병사도 있었다.

 

마침내 고니시는 음력 4월 12일에 요새 밖의 모든 마을들을 일차적으로 불지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요새의 대장 앞으로 나아가 항복할 것을 권하고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이 서한을 받은 대장은 이를 비웃으며 국왕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한다면 항복하겠노라고 회답하였다. 코라이 병사들은 훌륭한 무사들로서 왕에 대한 충절이 넘쳐 흘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용감히 싸웠다.

 

수비대장이 앞장서서 처음으로 전사하였으며 아무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가문있는 코라이 여인들은 정결하고, 수절하는 것으로 명성이 나 있었다. 한편 양반집 남녀 자제들은 용모가 반듯하고 교육도 받은 자들인데, 다리를 저는 자나 입을 꼬아 비둘어 지도록 위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포로로도 살려 두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전투는 묘시(5~7시)에서 사시(10~12시)까지 였고, 일본군은 부산진성 점령후 남자, 여자, 개 그리고 고양이 할 것없이 모두 살해했다고 "吉野日記"는 적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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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성 앞에 도착하니 성벽위에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깃발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고 조선군들이 무장을 한채 성벽위에서 일본군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장수깃발 옆에 갑옷을 입은자가 분명 성주인 정발 첨사 임을 고니시는 조선을 드나들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대는 계획대로 삼면으로 포위를 하고 고시니는 부산진 성주에게 사자을 보냈다. '일본국은 명을 치로 가는 길이니 조선은 길을 비켜달라!' 그러나 사신은  ' 선조임금의 명 없이는 불가하다는' 라는 조선 성주 정발의 답신을 갖고 사자가 돌아 왔다. 동행한 독전관은 허악한 얼굴로 고니시 장군을 노려보며 당장 공격을 서두라는 엄명을 내리고 있었다.이미 예측한 일이지만 일단 절차상 예의였다. 그토록 일본이 공격할 것이라고 수차 이야기 했건만 조선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었다. 고니시의 공격신호에 따라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조총소리가 콩볶듯이 울리고 부산진성에서도 조선 포대가 불을 뿜었다. 3면의 각 공격제대는 4개제대로 편성되어 기병대,조총부대,궁수부대,창검부대가 제대별로 공격이 전개되었다.일본군 병사들이 조선군의 포화에 나딩구르고 있었고 독전대의 북소리,나팔소리가 포연속에 울려퍼지고 ....

 

전투는 3시간 가량 진행되었는데 조선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서문쪽으로 진입한 일본군에 대항하여  조선군이 백병전을 전개하는등 치열한 접전을 시도하였으나 부산진성은 결국 함락되었으며 성주 정발첨사 이하 모든 조선 관군은 모두 전사하고 일본군 병사들은 살아남은 조선 백성들 뿐만 아니라 동물들까지 살육이 전개되었다.

 

당시 부산진은 부산지역 방어의 보루로 첨사 정발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일본군함이 부산 앞 바다에 나타나자 경상좌수영 박홍에게 보고하고 박홍은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부고하자 경상좌도 일대는 비상사태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부산포와 동래일대의 병력규모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부산포에 병선 33척, 수군 1,779명이었으며 그 예하에 만호영인 해운대진에 병선 7척,수군 589명, 다대포진에 병선 9척, 수군 723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부산진성 관군의 방어병력은 약 500여명 남짖으로 일반 백성 포함 1천여명으로 추산된다.

 

부산진성의 방어준비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성 앞에는 마름쇠가 널리 깔려 있었으며 조선군은 철모와 갑옷, 칼,창,화살로 무장하고 여러문의 대포와 총통류가 성벽에 비치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군은 지역단위 책임제로 주요 전략 요충지에 예하 지역의 병력이 방어임무를 맡아서 방어하는 체계로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제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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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여기에서, 부산진성 전투에 대해서 살펴보자.

 

당시 수군의 부산진성이 일본군에게 공격당하는 그 시간에 나머지 조선 수군은 부산포 방어를 위해서 무슨 역활은 하였던 것인가? 당시 경상좌수영에는 병선 33척과 1,779명의 수군이 있었으나 수군에 대한 전투기록은 다대포진이 14일 적에게 점령되어 첨사 윤흥신이하 전멸당하였다는 기록외에 조선측이나 일본군측에도 초기 수군의 전투기록이 전무하였다. 조선 수군의 부산포 앞바다 해상초계 활동은 물론  대규모 적 선단이 부산포 앞 바다에 나타나도 전투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정발 첨사에게 "적의 수가 너무 많으니 동래부로 가서 그곳에서 같이 힘을 합하여 싸우자"고 하였다 이에 정발 첨사는 " 적이 아무리 많다한들 이곳 부산을 적에게 내주면 적은 계속해서 상륙할 것이라 한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으니 내가 무장으로 죽을 곳을 ?았으니 다행이구나!" 하며 거절하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투활동은 커녕 일본 함대가 나타나자 도망갈 궁리에 전전긍긍 하다가 부산진성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모든 병선을 좌침시키고 온양으로 도주하면서 부산진성에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장계를 올렸으며 언양을 거쳐 경주로 도주했다.

 

만약 경상좌수사 박홍이 병선 33척이 부족하면 경상우수영 원균(하루전 부임)과 합동으로 해상초계는 물론 밤새 포구에 정박중이던 일본군 함대에 대하여 야간기습 공격이라도 감행하였다면? 초기에 적의 예봉을 꺽는 역활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수군의 함선으로 불가하다고 판단된다면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주상륙지역인 견고한 부산진성에 지역의 수군 1,779명중 가용병력을 집결시켜 백성 500여명으로 필사적인 방어전투를 전개하였다면 부산진성의 붕괴는 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제도와 군제의 결함이었으며 방어정책과 전술의 부재였다. 또한 수군으로 하여금 소단위 부대로 편성하여 야간 해상침투를 감행하여 부산포구로 들어오는 적 함선에 지속적인 포격과 자살공격이라도 감행하였다면... 그것도 아니면 육상에서 소규모로 편성하여 게릴라전이라도 감행하였다면 적의 공격속도를 늦추고 피해를 유발시켰다면 어떠했을까? 적과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병선을 좌침시키고 도주한 박홍을 적과 마주한 최전선의 해군장수로 인재라고 등용한 점도 문제였거니와 유교사회의 '충'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을 망각한 조선시대중 특히 임진왜란 시대를 대표하는 탐관오리에 불과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예하 첨사와 같이 모처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던 중 부산진성 침공 보고를 받고 급거 동래성으로 귀대하였다 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요! 그런나 송상현은 일본군의 동래성 침공에 맞서 끝까지 항쟁하다가 순절하는 '충'을 몸소 실천한 충절의 선비였다는 점에서 재평가 되어야 될 것이다.     

 

☆-- 아쉬운 미수록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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