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동래는 당시 동래도호부로써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행정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1년전쯤에 동래부사로 '송상현'이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로 '정발'과는 달리 문인출신이었다.동래부사는 경상도 남쪽 반을 관할하는 행정과 군사를 관할하는 자리였다. 물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방어력 개선에 노력했다.
부산진성이 함락되던 그 시각에 송상현은 예하 첨사들과 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던중에 연락을 받고 급거 동래성으로 귀대하게 되는데 애첩이야기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풍류를 좋아했던 낭만적인 선비였던것 같다.어찌하였던 정황을 파악하고 박홍의 보고를 받고는 부산진이 함락된 것으로 판단하고 적이 곧 동래성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전쟁 발발 소식에 울산 병영에 있던 경상좌병사 이각이 군사를 이끌고 입성했다. 이어 양산군수 조영규,울산군수 이언성 등도 군사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들어와 수비군에 합류했다.적정에 대한 구체적인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정찰병이나 적정을 살피는 부대도 내보내지 않았다. 오로지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작전이었다. 성 외곽에 장애물 설치며,매복진지,감시관측 가능한 지형확보,성곽보수,장비/물자확보,화기/탄약 확보 등에 대한 준비는 얼마나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지형을 이용한 단단한 성에 강한 군사와 충분한 물자가 비축되어 있다면 최소한 며칠은 버틸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점령하고 고시니는 바로 정찰대를 동래성으로 보내 정황을 탐지케 하였으며 4.15일 새벽에 본대를 이끌고 동래성으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동래성으로 접근하자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의 접근을 보고받고 양산군수 종영규에게 군사 수백을 이끌고 중간지점에서 일본군을 막도록 지시하자 조영규는 동래성 남쪽 4키로 지점에서 북진하는 일본군 규모를 보고는 황급히 동래성으로 철수하였 보고를 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의 규모에 놀라 송상현에게 성을 지키라고 하고 자신은 밖에서 지원하겠다며 성을 떠나려 하자 송상현이 이각의 소매를 잡으며 함께 싸우자고 하였으나 이각은 "나는 내 진영이 따로 있으니 이곳은 나의 관할 구역이긴 하나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그대의 책임이다"라고 하며 끝내 거절하고 성을 떠나 도망하였다.
고니시는 4월 15일 오전 10시쯤 동래성에 도착하여 3개 부대로 1개부대는 황령산 기슭에,1개부대는 동래성 서쪽 대로에, 1개부대는 남쪽에서 동래성을 포위하고 성문밖에 패목을 세웠는데,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 고 하였으나, 송상현은 "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응수하였다. 이에 고니시는 송상현이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알고 공격개시 신호를 울렸다.
일본군의 공격이 개시되자 조선군은 통나무 등으로 방패삼아 적에게 대항하였으며 적은 적장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조선군 궁수들을 유인하였다. 일본군은 가장 취약한 인생문쪽으로 집중공격하였으며 그곳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하여 결국 일본군에게 성곽이 돌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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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3호선 공사현장, 동래성 유물 발견>
발굴 현장은 당시의 치열했던 전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재호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성을 둘러싼 해자도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깊이 2미터의 유적층에서는 이번 발굴의 최고 성과로 꼽히는 찰갑이 완형으로 발굴됐습니다.가죽 위에다 쇠를 붙인 조선 후기 갑옷과는 달리 쇳조각 만으로 이어서 만든 갑옷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 형태 그대로입니다.
[인터뷰:정의도, 경남문화재연구원 연구실장]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현물로 확인하는 것은 드문일입니다. 이 찰갑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에서 사용된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이외에도 조선시대의 각종 화살촉과 도검류 그리고 생활 자기들이 출토됐고 5명으로 추정되는 인골도 발견됐습니다.
[기자]
이번에 발굴된 인골들은 함께 출토된 유물들로 미뤄 동래성 전투 당시 숨진 사람들도 추정됩니다.
두개골 가운데 한구에는 칼에 의해 손상된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현재 보물로 지정된 동래부순절도에서 처럼 성을 지키다 끝내 목숨을 잃었던 조선 관군의 처절한 싸움을 그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부산교통공사는 발굴 현장인 지하철 역 구간중 일부 공간을 전시장으로 만들어 출토 유물들을 전시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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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성내로 물밑듯이 밀려오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북향을 향해 네번 절하고 부채에 시한수를 남기고 일본군이 주변에 들어닥치는 그 순간까지 꿋꿋하게 좌정하고 있었다. 송상현을 잘 알고 있는 일본군 장수 대마도 출신 노리마스가 피신을 권유하자 송상현은 단호히 거절하며 자신의 목을 치도록 호통치자 일본군이 그의 목을 내리쳤다. 부인이 달려와서 항변하자 부인도 목을 치니 같이 순절하였다. 그의 첩은 일본군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강화회담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비운을 겪는다.
양산군수 조영규,송부사 김희수,대송백 등은 현장에서 전사하고 울산군수 이언성은 자신이 데리고온 군사 500여명과 같이 항복을 하게 되는데, 적장 고니시는 이덕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언성에게 전달토록하여 포로에서 풀어주나 그는 항복이 탈로날 것이 두려워 편지를 전달하지 않고 도망갔다가 강화회담시 사실이 밝혀지는 등 추한꼴을 보였다. 동래성 전투로 조선군 전사 3,000명,포로 500명이였으나 일본군은 전사 100명,부상 400명에 불과했다. 경상감사 김수는 진주에서 동래로 이동중 동래성 함락소식을 듣고 경상도 전 지역에 격문을 띄워 백성들을 피신토록 하였다.
왜군의 진격로와 조선의 방어전
안타까운 점은 경상좌병사 이각의 행동과 경상감사 김수의 행동 그리고 경상우병사 등은 적의 침공을 보고 도망치거나 바라만 보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부산포에 경상도 전력을 집중투입하여 초기에 적의 상륙을 격퇴시키도록 방어계획을 세우거나 종심 주요 이동로 상 험한 요지에 집중적인 대비책과 병력을 배치하였다면 초기에 그토록 일본군에게 참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당시의 황경이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점은 있었겠으나 성곽방어에만 집착한 당시의 전술이 너무나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적이 점령하면 아군이 불리한 지형지물에는 아군의 수규모 부대를 매복하여 두었다가 적의 후방을 기습하는 전술, 그리고 야간급습,화공작전,그리고 각종 총포의 효율적인 활용, 적 병참선 차단, 적 후방 지휘소 기습,다양한 첨병 및 적정수집 등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지 못하고 오로지 성곽방어에만 치중한 조선군의 작전은 무모한 작전이었고 그러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군사적 인물이 없었다는 점은 바로 군사적인 경험이 없는 문관들이 군령권을 휘두르고 있었기에 예하 군 지휘관의 의견이 거의 무시되고 외골수 방어작전만 구사�다는 점이다.
☆-- 아쉬운 미수록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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