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장윤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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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0일 화재가 발생한 서울 명일동 H아파트 참사 현장. 경비원 허모씨는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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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오마이뉴스 장윤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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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요. 기자님, 제발 저한테 말붙이지 마세요. 위에서 다 내려다보이는데…."6일 오후 서울 강동구 명일동 H아파트. 경비초소에 서있던 경비원 A씨는 낯선 이의 출입에 경계심을 바싹 세웠다. 그리고는 재빨리 라디오를 껐다. 누군가 감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표정은 굉장히 긴장돼 있었다.
지난달 30일 관리사무소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에 대해 묻자, 그는 갑자기 고개를 땅바닥으로 푹 떨구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머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사래를 쳤다. 황망하게 가버린 동료의 죽음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마디 잘못했다가 내 목도 달아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묻어났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기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가기 힘들었다.
"언니, 그 얘기 들었어?"
"뭐?"
"OO동 경비아저씨, 잘려가지고 불지르고 자살했대."
"나도 알아. 그런데 어른들이 아무 말 하지 말랬어."
D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여자아이 둘이 아파트 정문에 들어서면서 나눈 대화다. 꼬맹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이니 '관리사무소 화재사건'은 더 이상 쉬쉬할 일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숯덩이로 변한 동료... "오죽 답답했으면"지난달 30일 오전 8시 50분. 관리사무소에서 싸움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경비원 B씨가 뛰어올라갔다. 경비원 허모씨(60)와 관리소장이 콘크리트 바닥에서 서로 멱살을 잡고 분탕질을 하고 있었다. 우선 싸움부터 말려야겠다고 생각한 B씨는 "좋게 좋게 해결하는 게 좋겠다"며 소장과 그를 갈라놓았다.
그 순간, 땅바닥에 주저앉은 허씨가 가방을 내팽겨쳤다. 그 때 가방 속에 있던 물통의 물이 엎질러지면서 바닥이 흥건해졌다. 물은 냉장고에서 금새 꺼낸 것처럼 매우 차가웠다. B씨가 허씨에게 "웬 물을 이렇게 많이 갖고 다니느냐, 나가서 좋게 얘기하자"고 하려던 참이었다.
허씨는 아무말하지 않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당겼다. 순식간에 사무실은 불길에 휩싸였고, 119에 신고하는 사이 허씨는 숯덩이가 된 채로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돼 있었다. 사고 당시를 전하던 B씨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시너였으면 냄새가 지독했을 텐데. 난 정말 물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뭘까. 가연성이 대단했어요. 퍽 하더니 정말 삽시간에…. 그 사람,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어요? 나, 정말 맘이 괴로워요. 불 속에서 사람이 허우적대는 걸 다 봤는데 내 맘이 오죽하겠습니까."
말은 침착하고 차분하게 건넸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날의 잔영은 B씨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단 하루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했다. 입사 3개월만에 이 사건을 겪은 B씨는 사직을 고민 중이다.
그러나 그는 당장 그만두기도 어려운 처지다. B씨의 월급은 107만원. 실수령액은 99만8000원 정도다. 1개 동당 1명씩 하던 일을 2개 동당 1명씩 맡아 처리하니 일은 더 고되다.
정부 차원의 최저임금제 도입 이후 H아파트 동 대표들이 월급을 올려준다고 했지만 언제 실행될 지는 알 수 없다. 최저임금제가 도입된다는 소식 이후 관리사무소 경리직원과 영선주임(아파트 수리 등의 업무관계자)의 임금은 오히려 삭감됐다. 정부 정책의 변화에 따라 고무줄처럼 변화될 수 있는 게 경비원과 관련된 처우다.
일부 주민들 "동 대표들이 도의적 책임 느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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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명일동 H아파트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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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오마이뉴스 장윤선 |
지난 3월 아파트 동 대표 회장단은 경비원 인원감축을 위해 자동문과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하겠다고 나섰다. 경비원을 정리해고하고 자동문을 설치하면 세대별로 관리비를 최소 1만원씩은 줄일 수 있다는 게 동 대표 회장단의 생각이었다. 이른바 '주민을 위한 활동'이다.
한 주민(54)은 "1년 전 이사온 뒤로 이틀에 한번 꼴로 허씨와 마주했다"며 "허씨는 굉장히 착실하고 성실한 경비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리 아파트에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면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사건이 발생했던 지난달 30일 퇴근길에 아파트 현관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경악했다"면서 "동 대표 회장단이 상당히 문제있는 분들이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30일 오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우리 동 관리하던 경비원 아저씨가 관리사무소에서 소장과 싸우다 시너를 뿌리고 자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랐죠. 그런데 퇴근길 현관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더 놀랐어요. '해고에 불만을 품은 경비원이 불을 질러 화재사건이 발생했다'고만 돼있는 거예요. 사람이 그 정도로 될 정도면 동 대표들이 도의적 책임을 느껴야 하는데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죠."
그에 따르면 명일동 H아파트는 주차시설이 넉넉하지 않다. 적은 공간에서 효율적인 주차관리를 하기 위해 이 아파트의 경비원들이 직접 주차관리를 한다. 입주민들의 자동차 열쇠를 모두 보관하고 차량관리를 한다는 것. 경비원이자 파킹맨(주차요원)인 것이다.
총 700세대가 사는 이 단지에서 근무하는 경비원은 모두 14명(허씨 포함 6명 4월 30일자로 해고). 이 경비원들은 24시간 격일 근무를 한다. 하루 근무자는 7명. 7명이 700대의 차량을 관리하는 것이니, 결국 1명이 하루 100대의 차량을 관리하는 셈이다. 경비업무 이외에 주차업무만으로도 벅차다고 할 수 있다.
이 주민은 1세대당 1만원씩 내면 700만원인데 이 돈을 줄이자고 경비원들을 해고하고 이런 사고를 낸다는 게 참 어리석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되짚어봐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단지 안에서 접촉사고 나서 차 한번 긁히면 1만원만 들겠냐, 아파트 동 대표 회장단은 인원감축만 생각했지 이 아파트의 고질적 병폐인 주차문제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힐난했다.
"관리비 1만원 줄이자고 경비원들 해고하다니"다른 주민은 "그날 아침에도 반갑게 인사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면서 "옆에 있었다면 아마 뜯어말렸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허씨 아저씨는 말없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분이었다"며 "동 대표 회장단은 해고된 6명의 경비원 아저씨들을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평가한 것인지 주민들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일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했던 경비원 아저씨가 동 대표 회장단에 의해 해고돼 분신자살 했다는 사실도 신문을 통해 알게 됐다"면서 "그 뒤로 누구 하나 나서서 사건의 배경과 경과, 사후 문제 등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조차 없는 것도 그 자체로 경악할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착실하게 열심히 일하시던 경비원들을 별안간 다 내쫓고 아르바이트생을 쓴다는 것 또한 웃기는 일 아니냐"면서 "동 대표 회장단이 주민들과 괴리된 채로 힘없는 경비원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주민도 "허씨가 사건을 내기 전날 경비초소에서 억울하다고 하염없이 울더라고 다른 경비원 아저씨가 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허씨가 관리소장을 찾아가 억울함을 성토하다가 우발적으로 사건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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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명일동 H아파트는 주차 문제가 심각하다. 경비원들이 주차요원이 돼서 모든 차량의 주차 관리를 맡고 있다. 입주민들이 자동차 열쇠를 경비원에게 직접 맡길 정도다. 한 경비원이 차량을 이동시키려고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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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오마이뉴스 장윤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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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회 전 간부 "100만원에 목숨 걸다니"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H아파트 부녀회의 전 간부 김모씨는 "인원감축 과정에서 나이 많은 사람이 잘려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니냐"면서 "다 좋게 하고 끝냈는데 유독 허씨만 앙심을 품고 그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김씨는 "세대별 관리비를 줄이는 것은 모두 주민들을 위한 것"이라면서 "60대 가장이 그깟 돈 100만원에 목숨을 걸다니…, 바보 아니냐"고 비꼬았다. 또한 "인간적으로는 불쌍하지만 그렇다고 100만원에 목숨을 건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한 주민은 "현관 자동화 장치가 설치되면 경비원 인원 감축은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나이순, 근무성적이 안 좋은 순, 불성실 등을 이유로 6명을 해고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H아파트에서 3년째 경비원 생활을 하면서 허씨와 함께 했던 경비원 C씨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달 말일부터 두 사람 몫을 혼자 하고 있는 그는 일이 벅찬 것도 숨기지 않았다.
"여기 다 중산층 이상이 살죠. 고급 차들 많아요. 많이 가졌지만 내놓기 싫어하는 사람들이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어요. 똘레랑스? 한국사회 뭐 그렇죠. 성격이 아주 차분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는데. 조용하던 허씨가 목숨까지 걸고 싸웠다니 마음이 아주 무겁습니다. 나는 허씨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이번에 용케 살아남았어요. 다음 계약 땐? 당연하지요,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