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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시대의 흐름

왕조의 망징

[배명복칼럼] 왕조의 망징
[중앙일보 2006-10-19 09:37]    

 

[중앙일보 배명복] "군주가 강자에 굽히기 싫어해 화친하지 않고, 승부에 집착해 간언을 듣지 않으며, 사직(社稷)은 돌보지 않고 제멋대로 자신의 강성함만 자신한다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책략가 한비(韓非)가 약 2200년 전에 쓴 '한비자(韓非子)'를 다시 읽었다. 이 책의 '망징(亡徵)'편에서 한비는 47가지의 예를 들어 나라가 망할 징조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경고도 있다.

 

"나라는 작은데 자신을 낮추지 않고, 국력이 약하면서도 강국을 두려워하지 않으며…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남들과 사귐에 불편을 주는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는 망할 것이다."

 

유엔 안보리가 대북 제재 결의안을 채택한 지 이틀 만에 북한의 첫 공식반응이 나왔다. 외무성 성명에서 북한은 "누구든지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털끝만큼이라도 침해하려 든다면 가차없이 무자비한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관측도 잇따르고 있다. 과연 강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주의 강성대국'답다.

 

6자회담의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북한 핵실험 직후 "핵을 보유한 북한과는 같은 세상에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이 없어지든 북한이 없어지든 둘 중 하나가 없어져야 한다는 소리다. 스스로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김정일 체제를 끝장내고 말겠다는 '폭탄선언'이다.

 

북한 핵실험 이후 미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용어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다. 북한 정권 교체를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빅딜이 진행 중이라는 추측성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최신호는 미국이 일본의 핵무장 카드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 난민 대량 유입 사태에 대해서는 유엔 기구를 통한 대규모 지원 카드로, 한반도 통일 이후에 대해서는 주한미군 철수 내지 대폭 감축 카드로 중국을 설득 중이라는 설도 있다.

 

북한 접경 지역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사훈련이 빈번해지고 있고, 압록강변에는 철조망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의무를 규정한 '조.중 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의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중국 내에서 높아지고 있다. 핵실험을 계기로 중국이 김정일 체제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게 아니냐는 분석과 함께 갑작스러운 통일에 대비해야 할지 모른다는 희망 섞인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설령 중국이 협조하더라도 김정일 체제 종식이 미국 뜻대로 순탄하게 이루어질지는 미지수다. 압박을 견디다 못한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수도 있고, 쿠데타나 내부 권력 투쟁 과정에서 내전이 발생하고, 이것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와중에 핵무기나 핵물질이 외부로 유출되지 말란 보장도 없다. 모든 구멍을 틀어막고 압력을 가해 내폭(內爆)을 유도하는 것은 무력을 통한 해결만큼이나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시대착오적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북한의 지도자로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근원이다.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종교적 신념처럼 거부하는 사람이 지금 미국의 지도자로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불행이다. 그 결과 주변 열강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역사의 비운이 되풀이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서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으니 기가 막힌 노릇이다.

 

큰 틀에서 보면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사업 중단,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여 여부는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북한 핵은 김정일과 조지 W 부시 둘 중 한 명이 무대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풀기 힘든 난제가 되고 말았다.

한비는 비록 벌레가 먹었더라도 강한 바람이 불지 않으면 나무가 부러지지 않듯이 망징이 있다고 나라가 꼭 망하는 건 아니라고 사족을 달았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에 불고 있는 바람은 분명 초특급 강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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