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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1,077 : 해방과 건국 37 (김영삼 '문민정부' 4)

 

 

 

 

한국의 역사 1,077 : 해방과 건국 37 (김영삼 '문민정부' 4)

 

 

                                    

 

 

 

김영삼 문민정부(1993.2~1998.2) 4

 

 

 

<해설>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제14대 김영삼대통령은 다음해 2월 25일 국회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1961년 5.16 이후 처음으로 정통성을 가진 민간정부가 32년만에 들어선 것이다.

 

새 정부는 도덕성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사정활동을 통해 5, 6공정부의 비리와 부정을 시정하는데 충력을 기울였다. 그 첯번째 조치로 1993년 3월 정부 차관급 이상 공직자 재산을 공개토록 하였으며, 이;어 이 조치는 국회의원과 4급 이상 공무원에게까지 확대되어 재산등록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부정축재 혹은 비리와 관련된 5,6공 인사들이 공직을 떠나거나 구속되었다.

 

김영삼정부는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는 5.6공의 청산이 주요과제라고 믿고, 신군부를 움직여온 군대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뿌리뽑기 위해 1994년 4월 하나회 소속 장성들의 보직을 해임하였다. 이 조치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세력기반을 무력화시키는 의미도 지니고 잇었다. 군부개혁에 이어 여당인 민자당을 정리하는 작업이 뒤따랐다. 신군부세력과 김종필계 그리고 김영삼계가 연합된 민자당이 김영삼계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이에 불만을 품은 김종필게가 이탈하여 1995년 3월에 '자유민주연합'(약칭 자민련)을 따로 조직하였다. 민자당내 신군부세력은 내란 및 반란죄로 기소되면서 자연히 민자당을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민자당은 재야 민주인사들과 직능인을 새로 영입하고 이름을 신한국당으로 바꾸어 면모를 일신하였다. 한편 1992년 대선에 낙선한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이 다시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하여 다시금 세 김씨시대가 도래하였다.

 

신군부에 의해 12.12쿠테타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도 새 정부가 해결해야 될 과제였다. 이와 관련하여 새 정부는 초기에 12.12사건을 쿠테타적 사건으로 규정하엿으나 이를 사법처리하지 않고 역사의 심판에 맡긴다고 선언하였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처음으로 관민이 합동으로 추모식을 거행하여 명예를 회복하였다.

 

신군부에 대한 사법처리를 유보해오던 정부는 사회여론에 따라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대통령을 비자금조성 혐의로 구속한데 이어 12월 3일에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12.12 및 5.18사건과 관련하여 반란수괴 등 혐의로 구속하였으며, 그밖의 신군부 요인들을 무더기로 구속 기소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12.12사건의 피해자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이미 1993년 7월에 밚란 및 내란죄로 대검에 고소한바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두 전직 대통령의 반란 및 내란죄 이외에도 수천억 원대의 뇌물수수혐의로 추가 기소하였다. 그리고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대기업 총수들이 또한 함께 기소되었다. 특히 뇌물수수혐의는 야당 국회의원의 폭로가 계기가 되어 수사가 진행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 1996년 3월 11일부터 공판이 진해오다 이 해 8월 26일 전두환 전대통령은 사형, 노태우 전대통령은 징역 22년 6월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 해 12월에 진행된 2심공판에서느 전두환 피고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노태우 피고의 형량도 17년으로 줄이는 판결을 내렸다.

 

한편 1995년 6월 27일에는 그동안 유보되어 왔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도지사, 시장, 구청장, 군수 등 245명이 주민의 투표로 직선되어 민선자치시대가 다시금 출범하게 되었다. 이어 1996년 4월 11일에는 15대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여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수에 미달하는 시태가 벌어졌다.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경제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이 1993년 8월 12일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금융실명제'이다. 은행의 가명계좌를 실명계좌로 바꾸는 이 조치로 금융시장이 위축되고 소규모 사업가들의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등 부작용이 있었으나, 장기적으로 경제개혁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93년 12월에 정부는 수년간 끌어오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을 타결지었다. 보호무역주의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은 국제경쟁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피해를 주는 것으로서, 우리나라는 이 협정으로 상품, 금융, 건설, 유통, 서비스 등 모든 분야에서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정부는 시장개방정책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96년 9월 12일 서방 선진국들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시장개방정책에 맞추어 낙후된 분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계화'를 강조하고 1995년 1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한국경제는 1995년 10월 현재 수출사상 처음으로 1천억 달러를 돌파하고, 1996년 말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하여 선진국을 바짝 뒤쫓는 수준에 올라섰으나, 무역역조가 갈수록 심화되고 경제성장이 둔화되어 1996년의 경재성장률은 7%를 밑돌게 되었다. 이러한 수치는 1990년의 9.6%, 1991년의 9.1%, 1992년의 5.0%, 1993년의 5.8%, 1994년의 8.7%에 비하여 침체기에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보였다. 정부는 1993년 3월 19일 공산주의자로서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이인모 노인을 무조건 북한으로 보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태도로 북한과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를 기대했다. 그 후 예비접촉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그러나 김일성주석이 7월 8일 갑자기 사망하여 회담이 무산되었다. 엄청난 충격 속에 일부 재야 인사들과 학생들이 조문을 표하자 정부는 이를 제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남한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하였고 남북관계는 다시금 냉각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부터 진행되던 남북경제교류는 계속되었다. 특히 나진.선봉 지구의 자유시 건설에 우리 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도 1996년 여름에 타결되어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5년 북한의 수해로 인해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인도적 차원에서 쌀 수만 톤을 무상 지원하였다.

 

그런데 1996년 9월 18일 남북관계를 다시 악회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무장군인 수십 명을 태운 북한 잠수함이 남한을 정찰하던 중 강릉 앞바다에 좌초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남한에 대한 군사도발로 간주한 정부는 무장군인을 중 1명을 생포하고 나머지 군인들은 소탕하고 북한의 사과와 재발 장지를 촉구하였다. 북한은 처음에 정상적인 훈련 중 좌초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사과를 표하여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정부는 집권초기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해외에서 숨진 박은식, 서재필, 전명운 등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해외에서 국내로 모셔와 국림묘지에 안장시키고,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써오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기 시작하여 1996년 11월 철거를 완료하였다.

 

1997년은 김영삼정부이 마지막 해인 동시에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치르게 되어 있는 해였다. 그러나 집권초기에 비교적 민심의 지지를 크게 얻었던 김영삼대통령은 1997년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지도력을 상실했다. 더욱이 경제적으로는 만성적인 외환위기에 시달리던 정부가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에 2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지원을 공식 요청하면서 경제주권의 심각한 위축을 가져왔다.

 

1996년말 여당인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민심을 크게 잃더니, 1997년초에 한보철강의 부도를 계기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구속되고(3.31), 한보 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은 여야 정치인들이 무더기로 조사를 받았으며, 이어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이 한보비리를 비롯한 여러 이권과 국정에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아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5.17).

 

한보사태로 어수선해진 경제를 더욱 혼란에 빠뜨린 것은 2월 12일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황장엽이 망명하면서 가지고 왔다는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사건이었다. 북한과 연계된 정.관계 인사의 명단을 적었다는 이 리스트가 과연 있었는지를 놓고 정계는 긴장감이 돌았다.

 

김영삼대통령은 어수선한 민심과 정치국면을 돌리고 12월의 대통령선거에 대비하기 위해 고건을 총리로 세우고(3.4), 신한국당의 대표에 대법관 출신으로 감사원장을 지낸 이회창을 임명하였다.

 

여당의 대표가 새로 임명되면서 정치권은 선거에 대비하여 숨가쁘게 개편되었다. 우선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7월 21일 전당대회에서 자유경선을 통해 이회창 고문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여당 후보가 자유경선으로 선출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민주주의의 일보 진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경선에 출마하여 2위를 차지한 이인제 경기지사는 이회창 후보가 두 아들의 병역시비로 인기가 떨어지자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독자적인 출마를 선언하고 급히 국민신당을 창당했다(11.4). 그러나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 추종자가 적어 작은 정당으로 주저앉았다.

 

혼란에 빠진 여당과는 대조적으로 야당인 김대중의 새정치군민회의(약칭 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은 선거 후 연립정부 구성과 내각제 실시 등을 약속하고 김대중을 단일후보로 내세웠다(10월). 그 후 대구와 경북지역에 기반을 둔 박태준의원도 자민련 총재가 되어 동참하면서 전라도,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지역이 망라되는 대연합을 형성했다. 이를 세칭 'DJT연대'라 한다. 결국 김종필은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기여하였고 야당의 분열과 IMF 사태가 발생되면서 김영삼정권이 국민들로부터 비난받는 가운데 야당의 입지가 선거 승리에 유리한 ㄱ구면이 전개되었다.

 

야당의 결속에 당황한 신한국당은 11월 21일 민주당(총재 조순)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총재 조순)으로 당명을 바꾸고 선거전에 임하였으나, 이회창 후보는 김영삼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어 여권의 단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대통령선거를 한달 정도 앞두고 뜻밖에 IMF사태가 터졌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대통령과 여당의 인기는 급락하고, 그 책임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제15대 대통령선거는 옥외집화가 금지되고 TV합동토론회와 신문광고 등을 통해 선거운동이 전개된 점이 종전과 달랐다. 그런 점에서 매스미디어 선거라고도 불린다.

 

12월 18일 치러진 선거결과, 김대중 후보가 40.3%의 지지율을 얻어 39만표 차이로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김영삼정부는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김대중 당선자는 취임에 앞서 김영삼대통령과 합의하에 국민화합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수감중인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대통령을 특별사면하여(12.11) 석방했다.

 

김영삼대통령 재임기간에는 대형사고가 잇달아 일어나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1993년 3월 부산 구포역에서 열차가 전복하여 68명이 사망하고, 10월에는 전북 부안 앞바다에서 서해 페리호가 침몰하여 승객 200여 명이 사망, 실종되었으며, 1994년 10월에는 서울의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아침 출근길의 시민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하였다.

 

1995년 4월에는 대구 지하철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누출.푹발되어 100명이 사망하고, 15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이 해 7월에는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갑자기 붕괴하여 500여 명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대형사고는 각종 토목공사의 부실시공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고, 민주화과정에 긴장이 풀리면서 기초질서가 무너진 대에 그 원인이 있엇다. 이른바 민주화세력이 반독재투쟁에는 공이 있지만, 국가 경영능력은 떨어진다는 비판도 일어났다. 결국 김영삼정부는 나라를 망친 무능한 정권으로 후세의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받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