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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5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5

 

강남의 봄 5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5

 

 

                                                                                         새벽 여명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4월은 어느새 다 지나갔다. 곱게 그리고 화사하게 피던 봄꽃들이 강풍이 불고 비가 내리는 불규칙한 날씨에 낙화유수. 길바닥에는 하얀 눈처럼 꽃잎이 떨어져 쌓여 있다. 한마디로 젊음을 마음껏 펴 보지도 못하고 자연의 심술과 사회적 고통으로 생을 마감한 소중한 인간의 생명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잔인하다는 4월은 누구도 비켜거지 않고 지나갔다.

 

반세기 동안 북한 주민을 고통과 가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로지 북한 정권의 일당독재와 김씨 세습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한반도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한국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과 재산, 그리고 국토를 초토화시킨 원흉들이 결국 개성공단을 폐쇠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햋빛정책과 남북정상회담은 아무런 의미도 찿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그들의 능멸전술에 미국과 한국은 끌여왔고 그 사이에 그들은 핵무기와 미사일까지 개발하여 국제적 발언권의 수위를 높여왔다. 한국의 대미 미사일 족쇄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핵재처리시설 협정은 한국의 핵무장을 우려하여 진전이 없다.

 

역사 이래로 힘이 없는 나라는 언젠가 힘이 강한 나라에 당하고 말았다. 찢어진 핵우산 아래서 언제까지 북한과 주변국의 위협아래 전전긍긍하며 목숨을 걸 것인가. 한국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을 위해 전초기지에 불과하며 우리의 허약한 군사력으로 그들의 지원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꼭두각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 땅은 그들의 재고무기 처리장이요 음으로 양으로 한국의 국부는 소리소문없이 태평양을 건너 흘러가고 있다.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싸이의 춤과 노래가 음원차트 상위에 올라 열풍을 불러 일으켜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허울도, 북한의 미사일 한 방이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진정 미국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은 자주국가인가.

 

신라, 고려, 조선의 멸망과 붕괴는 외침보다도 내부적인 부패로 붕괴되었다. 백제,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결국 멸망당하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내부적인 붕괴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은 역사를 통해서도 여실히 보여주듯이 내부적인 체제정비 없이는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힘들다. 정치적인 혁신, 경제적인 양극화 해소, 사회적인 불평등 개혁, 문화적인 전통성 확립, 군사적인 자주국방력 향상, 정신적인 개혁을 통해서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가진자들이 솔선수범하는 부패와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군을 천시하고 군대가기를 꺼리며 공정과 정의가 사라지고 불법과 탈법이 당연시되고 또 사회 구석구석에 비리와 부패가 만연한 지금, 지역과 자신의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사회적인 마인드가 상실된 오늘의 현실이 개혁되지 않는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는 힘들다.       

 

아래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적 의의와 쟁점, 그리고 역사적인 평가와 관련된 두 가지 논문을 싣는다. 우리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역사적 의의와 쟁점

 

 

서언
  

한국사상의 고대사분야 중 현재 크게 부각되고 있는 여러 쟁점들 중 하나가 발해의 성격규명에 맞춰진 남북국 시대로의 전개 그리고 그에 맞물린 신라의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로 귀결지을 수 있다. 즉 발해사의 입장을 강조하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는 축소될 것이고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를 강조하면 발해사의 입지는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관점은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먼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보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 가 멸망한 이후, 신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은 三韓一統意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사실을 자기만족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씌어진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식내용은 『삼국사기』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삼국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편찬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 통감』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고 있던 개화·일제시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 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친일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滿鮮史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 었던 것이다.

 

다음에 살펴볼 내용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회의적 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방한 인식경향이다. 이 경향은 민족사의 차원에서 발해 건국의 정당성과 발해사 서술의 당위성을 인정 하는 입장이다. 발해는 『삼국사기』에 북국으로 표현되어 그 상대인 신라가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 조선 전기까지의 어느 역사서도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발해의 멸망 이후  그 옛 땅에 대한 연고권을 상실한 전근대사회의 역사학이 보인 무관심과 인식능력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근대사회의 지향으로 성격이 규정되는 생산관계에서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실학사상을 배태시킨 현실적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실학계열의 역사인식에서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의 역사 서술에서 이른바 통일신라와 상대적 관계에 있었던 발해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계열의 역사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신라삼국통일의 긍정론을 수용하면서도 발해의 역사를 신라사와 더불어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상황 속에서 유득공은 「발해고」의 서문에서 『삼국사기』에 신라 중심의 삼국사만이 서술되어 있고, 발해의 역사가 배제된 사실을 고려왕조의 취약성과 결부시켜 비판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회의론을 제기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한국사의 서술공간에 신라와 함께 발해의 자리도 인정하는 남북시대론의 단서가 열렸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적 인식의 시작은 한국사의 인식지평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9세기의 인물인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남북국시대론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아예 언급치도 않고, 고려 태조에 의한 남북국통일론을 제기함으로써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역사인식상의 변화는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으므로 개화기의 전통적인 유가사학자인 김택영도 그 내용을 수용하여 『역사집략』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사학의 요체는 서술방법과 같은 형식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내용의 본질적인 전환에 있는 것이니 만큼 새로운 역사가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 근대사학의 발달과정에서 이 과제는 신채호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는 역사이해의 중심축을 민중과 민족에 두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사료로서 『삼국사기』의 봉건성과 사대성에 대하여 철저한 비판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료비판에 입각하여 신라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 마저 극복하고 부정론을 심화시킴으로써 역사인식의 전환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신채호의 부정적인 인식논리는 삼국시대에서 백제를 병합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의 상황변화만을 인정하는 양국시대론 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인식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제시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통사에서나마 '삼국시대와 남북국' 또는 '남북조'를 표제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북한학계는 고구려·발해중심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심지어 신라보다 발해를 앞세우는 발해 및 후기 신라사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나라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다르게 나타났다. 이에 좀더 심화하여 부정론의 대표로 북한의 역사인식을 선정하여 기술하고 그에대한 비판, 신라의 삼국통일의 배경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북한의 역사인식
  처음 북한학계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긍정론적인 견해를 보여왔다. 그러나 1962년판 『조선통사』상권에서 매우 새로운 인식틀을 제시하게 되었다. 제 6장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의 발해국의 성립'은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한 결과로 이해된다. 또한 발해국의 성립문제를 종래의 절의 단위에서 장의 단위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그와 상대적 관계에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국토 남부의 통합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민족주의 사학계열의 부정론적인 인식과 궤를 같이 하였다. 이 시기의 북한학계는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이 갖는 한계성은 신라가당나라를 동맹자로 여기고 연합함으로써 야기된 역사적 과오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반면에 신라가 삼국의 전체를 통일 하려던 동기와 희망만큼은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60년대에는 발해사가 민족사의 차원 에서 올바르게 자리 매김 될 수 있었으나, 신라의 국토남부 통합이 갖는 역사적 부당성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아직 미흡하였다. 그러나 이 과제는 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신라와 발해를 병렬적으로 파악하는 60년대의 인식구도는 77년판『조선통사』상권에 그대로 계승 되었다. 다만 1962년판에서 독립된 단위의 장이었던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발해의 성립'이 제 4장 '8∼9세기 봉건관계의 발전'속의 한 절로 격하되었음이 외견상 눈에 띄는 차이점 이다. 다시말하면 북한학계가 역사해석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기본논리의 하나는 대내적인 계급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인 민족문제이다. 이 두 조건의 모순관계에서 우리나라와 그 인민의 발전이 역사의 올바른 도정이라면, 그와 반대의 경우인 봉건통치배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타난 역사현상은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에 신라의 봉건통치배가 당나라의 세력을 끌여 들여 같은 겨레의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은 반민족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봉건 통치배의 반역사성도 역시 통렬하게 비판될 수밖에 없었다.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신라의 역사를 재해석한 북한 역사학계에서의 인식변화는 1979년에 출간된『조선전사』4권에 총화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를 전기신라로 규정하고, 여기에 제6장 '당나라 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이란 표제의 장을 설정함으로써 역사의 주체인 인민을 비로소 전면에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인식내용을 지양시켰다. 즉 이시기의 북한 역사학계는 신라가 인민대중의 반 침략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이해에 얽매인 봉건 통치배의 나약성과 사대굴종 사상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는 데 그침으로써 후기신라로 전환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는 그 유민에 의한 지속적인 반 침략 투쟁의 결과로서 발해국이 세워진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구도의 설정은 신라의 국토 남부 통합과 발해의 성립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종래의 인식방법에서 탈피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전기신라에서 후기신라로의 전환과 고구려 유민에 의한 발해국의 창건을 별개의 사실로 분리함으로써 두 사실의 사이에 개재할 수 있는 내적 연관성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부정은 물론, 국토 남부통합의 의미조차 희석시키는 반면에 발해국 창건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역사해석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조선전사』5권은 '발해 및 후기신라사'로 구성함으로써 종래의 서술방법과는 달리 발해를 신라보다 먼저 서술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는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체계를 수립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는 인식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북한 정권의 현재성과도 무관하지 않는 역사인식으로 여겨진다.

  

이와 함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두 기둥인 김유신과 김춘추의 역사적 평가도 흥미롭다. 이들에 대해 북한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봉건통치배'라 규정하고 이에 대한 성토의 도를 높여 가고 있다. 이는 주체사상의 정립과 결부되어 나타난 역사인식으로서 북한 정권을 주체정권으로, 남한 정권을 미제와 결부된 반민족적 정권으로 간주하는 현재적 역사인식이 멀리 7세기사에까지 투영되어 '고구려=주체정권, 신라=반민족 정권'이라는 도식을 성립시킨 것이라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속에서 김유신·김춘추는 '반민족적 범죄행위'에 동참한 신라 '봉건통치배'의 일원으로서 매도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 북한에서 김유신·김춘추는 역사적 '반역아'로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북한의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철저하게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교과서나 각종 서적의 머리말과 장·절마다 본문에 앞서 김일성 교시라든지 김정일 유시의 영향인지 모르나 분명한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경직된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으로 연결되며 그것은 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역사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역사학이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현재적 관점이랄까 현실반영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것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예로「조선전사」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의 통치 기구 및 군사제도 정비를 인민에 대한 봉건적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하고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도' 돈 있고 권세있는 놈들이 인민을 착취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데 써먹은 아편'이라는 논리로 일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문화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배제하고 있다. 즉 편파적 역사서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피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은 "인민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며, "사회 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라는 논점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대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놈의 죽은 노예소유자" "권세있는 놈들" "왕과 지주놈들" "반동적인 양반 지주놈들" "관리놈들"등의 용어를 통해 확인해 볼수 있다. 반면, 일반 서민과 천민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관심 깊은 태도를 견재해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데, 예를 들면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의 난, 만적의 난, 임꺽정의 활동 등을 자세히 서술한 것이 그에 해당한다. 셋째, 전쟁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외세와의 전쟁(대외투쟁)과 내부세력간의 충돌(계급투쟁)이 모두 포함된다. 그것은 이미 "우리나라의 력사는 우리 인민이 반동통치배들의 억압과 예속을 반대하고 외래 침략자들의 침입을 쳐물리친 투쟁의 력사"임을 천명한데에서 분명히 명시되어져있다. 그리하여 전쟁에 관한 서술이 매우 자세하며,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수·당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몽고사이의 전쟁, 조선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봉건통치배들의 수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인민대중이 결국 봉기하게 된다는 논리를 견지함으로써 피지배층이 다수 참여한 반란·민란을 예외 없이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천민·노비·농민군의 활동상을 최대한 자세히 다루면서 반봉건적 계급투쟁임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를 평양에 두고 있다는 사실 이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강조하게 되면서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심지어 3·1운동이 평양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전 시기의 역사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를 고구려사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평양성 건설과 천도를 중시해 "평양이 세계적인 도시이며, 평양성 건설이 고구려가 강대국가이며 경제 문화가 발전된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입장은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 되는 발해라든지, 오늘날의 개성과 평양을 2都체제로 운영했던 고려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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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부정론의 비판적 접근
  신라의 통일전쟁에 대한 북한 역사학계의 부정적 시각은 나름대로 일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고구려 공격에 신라가 소극적이었다든지 그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한 것 등은 신라의 통일의지 를 의심케 하는 요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결과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비판적 시각이 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첫째, 신라가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 했으므로 '통일'이라는 신성한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에 관해서이다. 사실 결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원인과 과정이 옳지 않다면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 어려운 것이 역사이다. 더욱이 우리처럼 단일민족임을 강조해온 나라에서 반민족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득을 취했다면 당연히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당시 고구려·백제 ·신라의 사람들이 삼국을 과연 동족국가로 인식했는가 하는 점이다. '반민족적'이라는 용어를 당시의 신라에 적용 하려면, 우선 '민족적'이라는 용어가 성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들이 '같은 민족' 혹은 '동족'이라는 개념을 가졌다고는 보이질 않는다. 물론 삼국은 혈통과 언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가졌던 듯 하나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짙은 동족의식, 민족의식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구속력이 전혀 없는 다소 막연한 느낌에 불과 했다. 삼국은 수백년 동안 100여 회가 훨씬 넘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 사이 적과 우방은 수시로 바뀌었다. 백제의 세력 팽창에 대항해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했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해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뒤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연계해 양공 작전을 펼쳤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삼국의 목표는 오직 하나, '생존'이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려는 동물적 본능이 정치·군사논리를 지배하고, 국가의 모든 정책을 좌우했을 것이다. 서기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장군 김흠순이 아들 반굴을 그리고 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을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게 한 것은 바로 그 같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따른 것이라 하겠다. 이때 신라인에게 백제는 반드시 쓰러뜨려야 내가 사는 원수국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백년 동안 끊임없는 싸움이 만들어낸 당연한 결과였다. 더욱이 우리의 삼국은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하나였던 나라가 나뉘어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시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삼한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면서 국력을 키워온 것이 곧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과정이다. 이들에게 민족 이라는 개념이 있었을리 만무하다. 상황이 이러할 진데 민족의식이라는 오늘날의 잣대를 신라인 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공정치 못한 일이다. 아니, 달리 생각해보면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유민들을 흡수함으로써 비로소 우리 역사상에 민족이라는 개념, 동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둘째, 신라가 만주지역을 상실하는 등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당나라에 빼앗겼으므로 통일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지적에 대해서이다. 사실적으로 백제의 영토는 모두 신라 차지가 되었지만, 고구려 땅의 대부분은 당나라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후, 당나라에 귀속되었던 땅의 상당 부분은 다시 발해라는 새로운 왕조의 영토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당시의 상황을 홀시 한 채 현재의 가치관과 판단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한 결과라 할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먼저 당시의 영토의식, 영토개념에 접근해야 한다. 신라의 만주 지역 병합은 지금 우리의 소망일지 모른다. 고구려는 광개토왕 때 신라를 도와 신라 영토 내에서 장기간 군사활동을 벌였 으며, 또한 신라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장수왕때 에는 신라의 수도에 고구려 군사가 주둔할 정도였다고『일본서기』「웅략기」는 전한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이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의 국가와 영토개념이 지금 우리의 생각 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라에게 만주지역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신라의 관심은 오로지 국가보존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하다면 신라로서도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이라고 하는 중국 최대의 제국과 국운을 걸고 정면 대결해야 하는 일 이었다. 한반도의 중·서부지역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던 신라였다. 그런 신라에게 만주 지역 병합은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기준 삼아 신라의 통일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너무 인색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당신 사람들에게 '나라'란 곧 왕조를 의미하였다. 그런데 왕조의 기준은 영토가 아닌 왕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이 죽고, 왕실이 몰락 했다면, 그것은 곧 나라의 멸망을 의미하였다. 중국 한나라의 왕실과 성이 다른 왕망이 즉위해 신을 세웠다가 다시 왕족인 광무제가 한을 재건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후한이라 하여 전한과 구별 하였다. 삼국시대 체제·세력·지리적으로 중심이 되었던 왕조는 위나라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단지 한나라 왕족의 일파인 유비가 세운 나라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촉한을 정통왕조로 여겨왔던 것이다. 이처럼 고대의 국가개념의 핵심은 왕실에 있었다. 그런데 신라는 비록 고구려의 영토를 모두 병합하진 못했지만,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과 고구려 재건투쟁의 주역들을 흡수함으로써,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고구려를 신라에 병합하였다. 그것은 발해가 지리와 문화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사실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피는 벗꽃

 

Ⅲ.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
  신라의 삼국통일은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민족사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할 것이다. 첫째, 고구려·백제·신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체제 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신라의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체제, 하나의 문화를 누리는 가운데 뚜렷한 국가공동체 내지 민족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통일신라의 지배체제가 붕괴되면서 고구려와 백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또 한번의 삼국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후)삼국 모두 통일을 당연한 과제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정복전쟁이 일단락 됨으로써 국력이 배가되어 국제사회에서의 국가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과거 고구려의 경우 에도 중국 측의 왕조가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자랑했고, 또 실제로 수 차례의 대 규모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그 힘을 실증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지리적 조건과 전략·전술에 의존한 군사 분야에서의 힘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통일 이후에는 평화로움 속에서 전쟁 으로 인한 인적·물적 피해가 최소화함으로써 정치·경제가 매우 안정되었으며, 그것은 곧 국제사회 에서 신라의 위상을 높이는 기반이 되었다. 셋째, 하나의 국가체제 속에서 국민의 응집력을 기반 으로 자랑스러운 문화의 꽃피웠다는 점이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각기 독특한 기술·문화를 가꾸어온 삼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체제하에서 결속됨으로써 이제 더욱 세련되고 풍요로운 문화의 꽃피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이 통일이 가져다준 평화는 한동안 기술·문화의 발전을 가속시키고 신라 사람 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언

 

  지금까지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라는 의문적인 주제를 놓고 부정적인 견해로써 북한학 계의 동향을 서술하였고 그에 대한 비판과 신라의 삼국통일이 지니는 의의를 서술하였다. 현재 남한학계의 경우는 이제까지 긍정론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극소수의 부정론적인 시각도 보여지고 있다. 이는 현재 우리의 상황. 즉 남북이 양단된 채 국토의 협착, 인구의 과밀, 산업구조의 미성숙 등에서 오는 국가·민족적 진통 속에서 신라에 의한 통일보다는 고구려에 의하여 삼국통일이 이루어 졌었더라면 우리의 현재는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졌을까 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공통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가정을 하지 않기 위하여 역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역사를 보는 기본 시각을 역사관이라 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역사라는 따뜻한 가슴도 필요하지만 철저한 객관성과 고증을 필요로 하는 차가운 머리도 필요한 것이다. 비록 신라의 삼국통일이 고구려 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지 못한 그래서 고려·조선으로 이어져 북진정책이라는 역사적 인연을 만들고 현재에까지 고구려를 그리워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지만 그 시대에 존재했던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의 차가운 현실인식이 바탕이 되지 못한 따뜻한 가슴에 의한 논리로는 역사를 서술할 수 도 역사가 존재해야 하는 그 당위성 마져도 의심케 할 것이다. 국사는 어머니와 같다. 모진 풍파를 많이 겪은 우리의 어머니는 그 사이에 한쪽 눈과 한쪽다리를 잃으셨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시고 밖에 나갈라치면 가끔은 남의 눈이 신경에 거슬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속이고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않은가. 어머니의 초상화를 만들 때 두눈을 예쁘게 그려 넣고 두 다리를 멋있게 그려 넣거나 긴 치마로 다리를 가리는 방법은 옳지 않은 방법이다. 그것은 또한 역경을 이겨온 어머니의 삶 자체에 대한 왜곡·부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어머니의 자식들은 역경을 꿋꿋이 이겨오신 그분의 삶과 자식들을 훌륭히 성장시킨 그 사실을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상권에 수록된 삼국통일의 의의 부분을 삽입하며 이 글을 끝낸다.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삼국통일은 민족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구려, 백제 문화 전통의 수용과 경제력 확충으로 민족 문화는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재평가

 

Ⅰ. 머리말

 

   한국사상의 고대사분야 중 현재 크게 부각되고 있는 여러 쟁점들 중 하나가 발해의 성격규명에 맞춰진 남북국 시대로의 전개 그리고 그에 맞물린 신라의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평가로 귀결지을 수 있다. 즉 발해사의 입장을 강조하면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는 축소될 것이고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를 강조하면 발해사의 입지는 약화되기 때문이다.

 

 "신라는 매소성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크게 격파하여 일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어서,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도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통일에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한 사실은 삼국 통일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1

 

 위의 글은 우리가 배웠던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비단 교과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시각을 달리 해 보면 위의 내용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여태까지는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삼국 통일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비록 ~ 한계점이 있지만” 이다. 신라의 승리로 인해 영토의 75%를 상실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신라가 처음부터 “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위해 전쟁을 시작한 것인가를 비롯한 근본적 문제에 대해 먼저 생각 해봐야 할 것이다. 또한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할 때는 자국의 주체성이 가장 팽배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종일관 당에게 저자세를 취하며 한 나라의 주체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연호까지 당나라의 그것으로 바꾸는 신라의 태도는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세우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실리외교의 수준을 넘어선 지나친 사대주의(事大主義)로 일관한 신라의 태도에 관해서도 재고의 필요가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보는 관점은 크게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먼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보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 가 멸망한 이후, 신라 경주 중심의 골품귀족은 三韓一統意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사실을 자기만족적인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씌어진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식내용은 『삼국사기』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삼국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편찬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 통감』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고 있던 개화․일제시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 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친일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滿鮮史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었던 것이다. 다음에 살펴볼 내용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회의적 또는 부정적인 입장을 표방한 인식경향이다. 이 경향은 민족사의 차원에서 발해 건국의 정당성과 발해사 서술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발해는 『삼국사기』에 북국으로 표현되어 그 상대인 신라가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 조선 전기까지의 어느 역사서도 그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발해의 멸망 이후  그 옛 땅에 대한 연고권을 상실한 전근대사회의 역사학이 보인 무관심과 인식능력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근대사회의 지향으로 성격이 규정되는 생산관계에서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실학사상을 배태시킨 현실적 조건이 되었기 때문에 실학계열의 역사인식에서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의 역사 서술에서 이른바 통일신라와 상대적 관계에 있었던 발해도 당연히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계열의 역사학자인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신라삼국통일의 긍정론을 수용하면서도 발해의 역사를 신라사와 더불어 서술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대상황 속에서 유득공은 「발해고」의 서문에서 『삼국사기』에 신라 중심의 삼국사만이 서술되어 있고, 발해의 역사가 배제된 사실을 고려왕조의 취약성과 결부시켜 비판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에 회의론을 제기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한국사의 서술공간에 신라와 함께 발해의 자리도 인정하는 남북시대론의 단서가 열렸으며,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적 인식의 시작은 한국사의 인식지평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9세기의 인물인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남북국시대론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아예 언급치도 않고, 고려 태조에 의한 남북국통일론을 제기함으로써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역사인식상의 변화는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의식과 무관하지 않았으므로 개화기의 전통적인 유가사학자인 김택영도 그 내용을 수용하여 『역사집략』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사학의 요체는 서술방법과 같은 형식의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내용의 본질적인 전환에 있는 것이니 만큼 새로운 역사가의 등장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국 근대사학의 발달과정에서 이 과제는 신채호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는 역사이해의 중심축을 민중과 민족에 두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사료로서 『삼국사기』의 봉건성과 사대성에 대하여 철저한 비판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료비판에 입각하여 신라삼국통일에 대한 회의론 마저 극복하고 부정론을 심화시킴으로써 역사인식의 전환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신채호의 부정적인 인식논리는 삼국시대에서 백제를 병합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의 상황변화만을 인정하는 양국시대론 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인식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제시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통사에서나마 '삼국시대와 남북국' 또는 '남북조'를 표제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북한학계는 고구려․발해중심의 역사인식에 입각하여 심지어 신라보다 발해를 앞세우는 발해 및 후기 신라사로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우리나라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다르게 나타났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첫째, 우선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을 알아보고 “통일 신라” 용어의 등장 배경과 문제점을 살펴 본 후 ‘통일신라시대’ 대신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로 대체해야함을 주장하며  이에 좀더 심화하여 부정론의 대표로 북한의 역사인식을 선정하여 기술하고 둘째, 김춘추의 대고구려․대당 청병외교를 통해 신라가 과연 통일에의 의지를 가지고 전쟁을 치렀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셋째, 신라의 대당외교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실리외교를 넘어선 주체성 상실의 사대주의임을 짚어보고 넷째, 신라가 실시한 민족융합정책의 내용을 통해 당대인의 생각을 알아봄으로써 “삼국 통일”이라는 용어를 비롯한 내용의 부당성을 지적하도록 하겠다. 또한 <승자의 역사와 가려진 패자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삼국 통일의 타당성을 위해 왜곡 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와, 반대로 부풀려진 신라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만개한 벗꽃

  

 

Ⅱ. ‘삼국 통일’의 실상

 

   (1)통일 의지의 유․무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7세기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함으로써 고구려 영토 대부분은 신라와는 별개의 것이 되어 버린다. 현재 남북한 영토의 기본이 설정되는 시점이 이 때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상당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신라는 왜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신라가 과연 처음부터 삼국을 통일 할 의지를 가지고 삼국 전쟁을 시작하였는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642년 겨울, 김춘추는 평양성(平壤成)을 방문하였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과 마주 앉은 김춘추는 “양국의 오랜 상쟁을 중단하자”고 제안하면서 백제 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그 해 여름, 백제는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 해 신라 서부지역을 공략하여 대야성을 포함한 30여성을 함락시켰다. 대야성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과 그의 아내는 백제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상심한 나머지 지나가는 사람도 알아보지 못한 채 하루종일 기둥에 의지해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2 게다가 김춘추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위험해진 상황이었다. 폐위 된 진지왕의 손자였던 그는 냉담한 진골 귀족 사이에서 김유신과 사돈을 맺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정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굳힌 상태였는데 그것이 백제의 공격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비단 개인적인 원한과 불안감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언제 다시 쳐들어  올지 모르는 백제군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힘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옛 땅인 한강 유역3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파견하겠다”고 답함으로써 사실상 거절한다.

 

 고구려에서 실패하고 돌아 온 김춘추는 이번에는 당으로 눈을 돌린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삼국간 동족의식4은 보이지 않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의사를 표방하는데 있어 단지 삼국 각각의 국익으로 표방된 지배층의 이해관계만이 존재 할 뿐이었다. 따라서 민족의식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면 신라에게는 고구려나 당이나 외국이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희 나라는 그간 천조(天朝, 천자의 나라, 즉 당나라)를 오랫동안 섬겨 왔는데, 백제가 교활하고 강하여 침략을 거듭하다가 입조(入朝:당에 사신을 보내는 일)의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폐하께서 천병(天兵)을 내어 그 흉악한 적을 물리쳐 주시지 않으면 저희 백성은 다 사로잡히어 다시 조공하지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품었던 당 태종에게 북방의 돌궐과 연합해 당을 위협하는 고구려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난 644년 당 태종이 친정(親征)을 나섰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직접 찾아와 백제와 고구려를 치자며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김춘추의 청을 거절할 리 없었다. 마침내 김춘추와 당 태종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기로 합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조에 따르면 전후(戰後)영토분할약정의 내용도 상의를 한 듯 보이는데, 평양 이남과 백제지역은 신라가, 평양 이북 지역은 당나라가 차지한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676년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몰아냄으로써 당과의 전쟁을 완전히 끝낸 신라가 차지한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신문왕대(681~692)에 개편된 지방제도를 살펴보면 당시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로 나누고, 수도의 치우침을 보완하기 위해 전국에 5소경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행정구획에 따라 군관구(軍管區)6와 같은 성격의 10정을 설치하였는데, 국방상의 요지인 한주(漢州)에는 두 개를 설치하였다. 한주의 치소(治所)는 오늘의 경기도 광주지역에 있는데, 두 개 가운데 하나인 남천정(南川停)은 지금의 이천, 다른 하나인 골내근정(骨乃斤停)은 여주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서북 일선의 중심이 대략 한강 이남지역에 치중된 것으로 보아 신라는 한강 이북지역을 거의 방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 후 735년(성덕왕 34)에 당나라로부터 패강(浿江)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공인 받아 영토를 넓혔다.7 당시의 패강을 예성강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사기』지리지 고구려조의 “평양성은 지금(고려시대)의 서경(西京)이고 패수는 바로 대동강인 듯하다. 무엇으로서 이를 알 수 있는가? ...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 것은 명백하며 바로 서경이 평양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는 기사로 보아 이 강이 대동강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헌덕왕대(809~825)에 이르러서야 취성군(取城郡) 등 4군현을 새로 설치하면서 비로소 대동강 남쪽 연안을 신라의 영토로 확정시켰다. 결국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150여 년이 지나서야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국경선을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도 평양은 대동강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영토에서 제외되었다.

 

 신라가 정말 처음부터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백제 공격을 도와달라고 김춘추가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한 전쟁이 끝난 후 고구려의 상징인 평양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8 이 사실은 바로 신라가 애초부터 삼국 통일의 의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단지 백제에게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자국의 생존을 위해 고구려와 당나라로 군사를 빌리러 다닌 것이고, 당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백제가 사라지자 고구려의 영토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2) 신라의 당과의 외교관계

 

    현재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삼국 통일”에는 외세인 당나라의 힘이 컸다. 머리말에서도 언급했듯이 신라가 정말 `통일 의지`를 가졌다면, 당시는 스스로를 중심으로 하는 주체성이 가장 팽배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종일관 당에게 저자세를 취하며 연호까지 당나라의 그것으로 바꾼 신라의 사대주의(事大主義)적 태도는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세우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신라가 당의 도움을 받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와 그에 따른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교류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교류는 수․당 시기부터이며, 수가 36년만에 멸망하면서 그 전통은 당으로 이어졌고, 한국과 중국의 본격적인 교섭은 바로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부터 삼국은 경쟁적으로 당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며 당과 수교를 맺었는데 648년 김춘추가 구원병 요청을 위해 당나라를 방문하면서 나당관계가 본격화되었다. 김춘추는 훗날의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을 당의 볼모로 두고 귀국하는 것을 시작으로 당에 대해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취하는데 이 같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문화적 저자세로 인해 나타나는 부정적인 측면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정치적 측면에서의 자주성 상실이다. 나당 교섭기 고대 동아시아세계는 조공과 책봉을 통한 당 중심의 정치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책봉체제(冊封體制)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 중심의 단순히 의례적이고 이념적인 하나의 질서체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지나치리만큼 충실하였다. 정기적인 조공은 말할 것도 없고, 신라에서 새로 왕이 즉위하면 대부분의 경우 사신을 보내 그 사실을 당에 알리고 왕과 왕비 등의 책봉을 요구하였다. 심지어 헌덕왕은 자신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즉위한 사실을 4년 동안 당에 숨긴 채 애장왕의 사인(死因)을 병으로 죽은 것으로 거짓으로 알린 후에 책봉을 요청 할 정도로 비자주적이였다.  

 

 둘째, 의례적인 면에서도 신라는 당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였다. 당 연호의 채용, 오묘(五廟)제의 시행, 제사 범위의 축소 등이 그것이다.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자국이 독립국임을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신라는 진덕왕 4년(650)에 당의 연호를 채용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변함없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당에서 연호를 바꾸면 신라도 따라서 바꾸었는데, 나당간 군사충돌로 인해 공식적인 외교가 끊어진 때에도 연호만은 당의 그것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당의 의례적 책봉체제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던 발해, 일본 등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종묘에 칠묘(七廟)가 아닌 오묘를 설시(設施)하였고 하늘 신에게 제사 지내지 못하고 경내의 산천에만 제사하였던 이유 역시 당을 종주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후대인의 손길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신라의 금석문에, 신라는 자신을 당의 번(藩), 번국(藩國), 제후(諸侯) 혹은 ‘諸侯之外守者’라 자처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 하대에 만들어진 승려의 비문들에서는 그 첫머리에서부터 자국을 지칭할 때 대부분 ‘有唐新羅國’ 혹은 ‘大唐新羅國’이라 하여, 스스로를 당의 속국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처럼 신라인은 스스로를 폄하 시키고 당을 높이 받들었다. 특히 숭복사비문에서는 `聖帝之恩光著矣 吾君之孝理成焉’이라 하여 당의 황제와 신라의 군주에 대한 최치원의 차별적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가 쓰여진 글은 외교 문서와 같이 당 조정에 보내기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닌, 주 독자층이 신라인인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폄하하고 당을 존숭하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여 글을 썼다는 사실은 그러한 인식이 신라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이는 소위 ‘삼국 통일’ 이후 이전의 형식적․실리적 사대가 이념적․실질적 사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신라인은 당으로부터 받은 관작(官爵)을 신라의 관직 보다 더욱 드러내 보이고자 했고, 도당 유학을 신라 문화 계발의 유일한 수단으로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성씨 시조를 중국인으로부터 구하는 경향이 많았다.

 

셋째로, 당에 사대하며 자국을 폄하하는 사회 풍조는 물질 문화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외래품에 대한 숭상이 바로 그것이다. 흥덕왕 9년(834)에 반포된 교서에 의하면, 신라의 풍속이 점점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사치와 호화를 다투게 되어 오직 외래 물건의 진기함만을 숭상하고 토산품의 비야함을 혐오한다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래품이 모두 당나라 제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이 당을 통하여 수입되었다는 점에서 총칭해 ‘당물(唐物)’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이러한 9세기 전반 신라의 외래품 선호 현상은 바로 신라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당에 대한 동경심과 자국의 비하에 따라 나타난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소유 욕구의 표출이라 하겠다.  

 

물론, 이 같이 책봉체제에 철저히 순응하여 당의 제후국임을 자처한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삼국 혹은 남북국이 대치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당의 정치․ 군사적 보호와 조공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 그리고 선진문화의 수입이라는 실리외교의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청병외교 초기에는 물론 신라가 그러한 실리를 얻기 위하여 당을 추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최치원으로 대표되는 당 유학파 지식인들의 글 속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신라는 점차 당의 문화를 좇음으로써 맹목적인 추종자로 변질되어 갔다.   

    

이상에서와 같이 신라는 당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였던 태종 무열왕 대시작으로 점점 당의 문화에 경도 됨으로써 자국의 문화를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나당교섭을 통하여 나타난 이러한 자아상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맹목적인 존화주의 혹은 사대주의로 이어졌다.9

 

 

 

 

(3)신라의 민족통합과 후삼국 시대

 

  마지막으로 신라의 민족융합정책의 내용과, 후삼국 시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삼국 통일 예찬론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백제․고구려 유민을 신라의 관료조직이나 군사조직에 편입시킴으로써 관용을 통한 민족융합의 길을 마련했고, 백제 출신 고승인 경흥(憬興)을 국로(國老)로 맞아들여 민심을 수습하는 등 민족 통합의 당위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또 통일 신라 시대 불교계의 고승들이 모두 고구려계인 것은 사상계와 학계에서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활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무열왕은 황산 전투에서 포로가 된 佐平 상충․ 상영(백제 1등위), 達率 자간(백제 2등위)에게 一吉湌(7등위)을 주어 총관으로 임명하였고 恩率 무수(백제 3등위)에게는 대사마(10등위)에 대감직을 주었다. 이들은 재질을 고려한 임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백제 부흥군 진압에 이용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문무왕 원년(661년) 2월에는, 충상을 아찬(6등위)으로 승급시켜서 사비성을 공격하는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는데 참전시켰다. 또한 우술성에서 항복한 달솔 조복을 급찬(9등위)에 고주야군 태수로 삼고 은솔 파가에게는 급찬에 전택과 의물을 주었다. 이들 백제 장군들은 백제정벌과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시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해 임시로 관등과 관직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무왕 11년부터 백제 부흥군이 평정되고 통합됨으로써 백제 유민에 대한 새로운 처우 방안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문무왕 13년에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한창 나당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유민 가운데 대당전쟁에 동원할 것을 감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백제인은 京位 대나마(10등위)가 최고 관등이었고 귀간 등 외간도 수여하도록 규정하였으나 주목할 점은, 백제의 지배층으로서 진골 이상의 신분층으로 편제된 대상이 없다는 점이다. 또한, 모두 경위를 준 것이 아니라,  7c 이후 사실상 자연 소멸되는 과정에 접어든 상태인 외위를 병행하고 있다는 점은 신라의 민족융합정책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신라가 한민족으로서 일통삼한의 의지로 삼국을 통합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백제의 유력자 역시 신라의 인재로 인정했어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에게는 백제보다는 상위의 관등이 주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의 경우 외위(外位)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융합의 진전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구려 역시 가장 높게 편제된 主簿(3등위)가 신라 一吉湌(7등위)을 수여 받았다. 이는 백제인들과 마찬가지로 6두품 이하의 대우를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신라는 넓어진 영토와 늘어난 인구에 맞는 신분 구조를 성립시키지 못하고 계속해서 골품제를 유지함으로써 삼국민의 융합에 제약을 가했다. 이것은 사로국(斯盧國)이 주변 소국을 병합하면서 최고 지배층을 왕경으로 이주시켜 지배층에 편입시키고 현지에 남은 중간 지배층을 지방인으로 간주하던 전통적인 차별 정책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6c에 들어 이원적 관등제를 성립시켜 왕경인과 지방인 사이에 기본적인 차이를 두던 전통이 삼국 일 직후까지도 신라 지배층에게 하나의 원칙으로 강고히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술은 늘어났지만 여전히 작은 부대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작은 부대로 당장은 견디겠지만 언젠가는 터져 버리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골품제가 존속되는 한 권력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할 여지는 매우 적고, 삼국민의 융합 또한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신라의 차별 속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은 불만을 품게 되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유민들은 망국의 한을 잊지 못한 채 그들의 가슴속에서 여전히 그들의 나라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673년(문무왕 13) 백제 유민들이 세운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사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四面石像)의 명문기사를 보면,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신차원(身次願)은 백제가 멸망했는데도 여전히 백제의 관등인 달솔(達率)을 사용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미 신라가 백제 전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시기인데도 명문에 백제 관등을 적어 넣은 것은, 신라의 관등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인 동시에 자신은 여전히 백제의 백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Ⅲ. 삼국 통일론 재검토

  

   (1)‘통일 신라’ 용어상의 문제

 

    우리 사회에 통설(通說)로 자리잡은 신라의 삼국 통일. 그 예찬론의 시작은 당대 신라인들로부터였다. 686년(신문왕 6년) 청주시 운천동에 세워진 신라사적비에는 “삼한을 통합하니 나라의 땅이 넓어졌다”고 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는 호국불교사상이 담겨 있다. 또한 신라하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면서 골품제의 모순과 폐단을 지적하는 등 진보적 지식인상을 보여 주었던 최치원 또한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 “삼국이 이제야 장하게도 한 집안이 되었구나”라고 적고 있다.(924)

 

 고려시대로 이어지는 예찬론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145년(인종 23) 김부식이 편찬한『삼국사기』는 “유신이... 상국(중국)과 함께 모의해서 삼국을 한 집안으로 만듦으로서 빛나는 업적과 명성을 남기고 자신의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김춘추에 대한 평가로는 “중국에 사대의 예를 잘 취하였고 그 문물을 받아들여 거친 풍속을 개량하였으며, 당 군의 위엄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하여 성세를 이룩한” 뛰어난 임금이라고 하였다. 김부식의 이러한 예찬론적 성격은『삼국사기』열전의 구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열전 10권 69명을 언급하는 가운데 3권을 김유신 개인 열전에 할당할 만큼 열렬한 삼국 통일 예찬론자였던 김부식이,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중국을 어버이의 나라로 섬기며 사대(事大)의 예를 중시하였던 보수파의 대표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려시대 예찬론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왕(김춘추)이 유신과 함께 신통한 계획으로 힘을 합하여 삼한을 통일하고 국가에 큰 공로를 세웠으므로 묘호를 태종이라 했다”

 

 이러한 삼국 통일 예찬론은 조선시대에 편찬 된『동국통감(東國通鑑)』,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충(忠)과 사대(事大)의 논리에 따라 그대로 이어졌다. 이렇게 몇 백년 동안 이설(異說)이 제기되지 않은 채 예찬론 일변도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조의 교체는 있었지만, 역사 인식의 변화를 유발할 만한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동은 수반되지 않은 중세사회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부식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왕조에서도 신라의 승리를 예찬하기는 하였지만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삼국 통일’이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그 배경을 알아보자. 일제강점기 하야시 다이스케는 저서『조선사』에서 삼국의 불완전한 통합을 `신라의 삼국 통일‘로 규정했다. 그 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신라의 반도 통일’이란 이름으로 정의했고, 해방 이후 우리 학계에서도 이 논리는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렇다면 일본 학자들이 신라를 예찬하고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까지 우리에게 선물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전략적 목표, 즉 만주지역을 지배하던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에서 배제하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산물인 것이다.13 만주를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우리의 역사를 축소시키고 만주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통일 신라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옛 고구려 땅은 더 이상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는 논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한강 전경

   

(2) 남북국 시대론

    

  그렇다면 잃어버린 고구려의 영토는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진 것인가? 아니다. 고구려 멸망 30년 후에 고구려 땅에서 당당히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나선 발해가 있기 때문이다.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은 부여 계통의 고구려 장군으로서14 고구려가 멸망한 뒤 강제로 영주에 옮겨가 있었다. 그러다가 거란의 이진충이 당에 대항하여 영주를 점령하자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동모산에서 진국(震國)을 건국하였다(698). 이런 발해를 우리 역사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로 다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발해인 스스로의 인식이다. 일본의 역사책 『속일본기(續日本記)』에는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의 3대 문왕은 자신을 `고려국왕‘으로 칭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만의 독특한 의식체계인 `천손(天孫)사상‘을 일컬음으로써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 역시 이를 인정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발해인 스스로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로 주변국의 인식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본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당나라는 발해를 정식으로 인정해 진국이 세워진 지 14년 뒤에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다. 신라 역시 대조영에게 신라 관등의 제5등급에 해당하는 대아찬의 벼슬을 내리는 호의를 베풀고, 문왕(737~793) 때에는 발해를 `북국(北國)’이라 칭하면서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 말기의 대표적 지식인 최치원이 “저 고구려가 오늘의 발해가 되었다”고 한 말은 당대 신라인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신라를 비롯한 주변국 또한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분명한 우리의 역사이므로 더 이상 발해를 무시한 채 신라가 삼국을 아울렀다는 의미의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전기와 구분한 ‘후기신라’ 아니면 백제를 병합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의 상황 변 화만을 인식하는 `양국시대(兩國時代)‘혹은 ’남북국시대‘15라는 용어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가며 찍은 한강 전경

 

(3) 북한의 역사인식  

 

    처음 북한학계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긍정론적인 견해를 보여왔다. 그러나 1962년판 『조선통사』상권에서 매우 새로운 인식틀을 제시하게 되었다. 제 6장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고구려 고지에서의 발해국의 성립'은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취급해야 할 당위성을 인정한 결과로 이해된다. 또한 발해국의 성립문제를 종래의 절의 단위에서 장의 단위로 격상시키는 동시에 그와 상대적 관계에 있는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국토 남부의 통합으로 축소시킴으로써 민족주의 사학계열의 부정론적인 인식과 궤를 같이 하였다. 이 시기의 북한학계는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이 갖는 한계성은 신라가당나라를 동맹자로 여기고 연합함으로써 야기된 역사적 과오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한 반면에 신라가 삼국의 전체를 통일 하려던 동기와 희망만큼은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이로써 60년대에는 발해사가 민족사의 차원 에서 올바르게 자리 매김 될 수 있었으나, 신라의 국토남부 통합이 갖는 역사적 부당성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에는 아직 미흡하였다.

 

그러나 이 과제는 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신라와 발해를 병렬적으로 파악하는 60년대의 인식구도는 77년판『조선통사』상권에 그대로 계승 되었다. 다만 1962년판에서 독립된 단위의 장이었던 '신라에 의한 국토 남부의 통합과 발해의 성립'이 제 4장 '8~9세기 봉건관계의 발전'속의 한 절로 격하되었음이 외견상 눈에 띄는 차이점 이다. 다시말하면 북한학계가 역사해석에서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기본논리의 하나는 대내적인 계급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적인 민족문제이다. 이 두 조건의 모순관계에서 우리나라와 그 인민의 발전이 역사의 올바른 도정이라면, 그와 반대의 경우인 봉건통치배와 다른 나라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타난 역사현상은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에 신라의 봉건통치배가 당나라의 세력을 끌여 들여 같은 겨레의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실은 반민족적 행위의 전형으로 파악될 뿐만 아니라, 봉건 통치배의 반역사성도 역시 통렬하게 비판될 수밖에 없었다.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신라의 역사를 재해석한 북한 역사학계에서의 인식변화는 1979년에 출간된『조선전사』4권에 총화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신라를 전기신라로 규정하고, 여기에 제6장 '당나라 강점군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들의 투쟁'이란 표제의 장을 설정함으로써 역사의 주체인 인민을 비로소 전면에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인식내용을 지양시켰다. 즉 이시기의 북한 역사학계는 신라가 인민대중의 반 침략 투쟁에도 불구하고, 계급적 이해에 얽매인 봉건 통치배의 나약성과 사대굴종 사상으로 말미암아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는 데 그침으로써 후기신라로 전환한 사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압록강 이북의 옛 고구려 땅에서는 그 유민에 의한 지속적인 반 침략 투쟁의 결과로서 발해국이 세워진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구도의 설정은 신라의 국토 남부 통합과 발해의 성립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종래의 인식방법에서 탈피하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전기신라에서 후기신라로의 전환과 고구려 유민에 의한 발해국의 창건을 별개의 사실로 분리함으로써 두 사실의 사이에 개재할 수 있는 내적 연관성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부정은 물론, 국토 남부통합의 의미조차 희석시키는 반면에 발해국 창건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역사해석이 바뀐 것이다.

 

따라서『조선전사』5권은 '발해 및 후기신라사'로 구성함으로써 종래의 서술방법과는 달리 발해를 신라보다 먼저 서술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는 북한학계가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계승을 역사의 정통으로 인식체계를 수립하고, 고려를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하는 인식논리의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북한 정권의 현재성과도 무관하지 않는 역사인식으로 여겨진다.

 

  이와 함께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두 기둥인 김유신과 김춘추의 역사적 평가도 흥미롭다. 이들에 대해 북한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봉건통치배'라 규정하고 이에 대한 성토의 도를 높여 가고 있다. 이는 주체사상의 정립과 결부되어 나타난 역사인식으로서 북한 정권을 주체정권으로, 남한 정권을 미제와 결부된 반민족적 정권으로 간주하는 현재적 역사인식이 멀리 7세기사에까지 투영되어 '고구려=주체정권, 신라=반민족 정권'이라는 도식을 성립시킨 것이라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속에서 김유신․김춘추는 '반민족적 범죄행위'에 동참한 신라 '봉건통치배'의 일원으로서 매도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 북한에서 김유신․김춘추는 역사적 '반역아'로 평가받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북한의 역사인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철저하게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를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마도 교과서나 각종 서적의 머리말과 장․절마다 본문에 앞서 김일성 교시라든지 김정일 유시의 영향인지 모르나 분명한 것은 그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경직된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으로 연결되며 그것은 또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역사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역사학이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어느 정도의 현재적 관점이랄까 현실반영은 필요하고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것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예로「조선전사」에서는 발해와 통일신라의 통치 기구 및 군사제도 정비를 인민에 대한 봉건적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설명하고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도' 돈 있고 권세있는 놈들이 인민을 착취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데 써먹은 아편'이라는 논리로 일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문화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배제하고 있다. 즉 편파적 역사서술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피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각은 "인민대중은 사회역사의 주체"이며, "사회 역사적 운동은 인민대중의 창조적 운동"이라는 논점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대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놈의 죽은 노예소유자" "권세있는 놈들" "왕과 지주놈들" "반동적인 양반 지주놈들" "관리놈들"등의 용어를 통해 확인해 볼수 있다. 반면, 일반 서민과 천민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고 관심 깊은 태도를 견재해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데, 예를 들면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의 난, 만적의 난, 임꺽정의 활동 등을 자세히 서술한 것이 그에 해당한다.

 

셋째, 전쟁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외세와의 전쟁(대외투쟁)과 내부세력간의 충돌(계급투쟁)이 모두 포함된다. 그것은 이미 "우리나라의 력사는 우리 인민이 반동통치배들의 억압과 예속을 반대하고 외래 침략자들의 침입을 쳐물리친 투쟁의 력사"임을 천명한데에서 분명히 명시되어져있다. 그리하여 전쟁에 관한 서술이 매우 자세하며,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고구려와 수․당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전쟁, 고려와 몽고사이의 전쟁, 조선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봉건통치배들의 수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인민대중이 결국 봉기하게 된다는 논리를 견지함으로써 피지배층이 다수 참여한 반란․민란을 예외 없이 옹호하고 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료에도 불구하고 천민․노비․농민군의 활동상을 최대한 자세히 다루면서 반봉건적 계급투쟁임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를 평양에 두고 있다는 사실 이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에 주체사상을 강조하게 되면서부터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심지어 3․1운동이 평양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할 정도로 전 시기의 역사해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를 고구려사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평양성 건설과 천도를 중시해 "평양이 세계적인 도시이며, 평양성 건설이 고구려가 강대국가이며 경제 문화가 발전된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입장은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인식 되는 발해라든지, 오늘날의 개성과 평양을 2都체제로 운영했던 고려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Ⅳ. 오늘의 관점에서 본 삼국 통일

 

   ......(전략)내란의 위기를 극복한 주도 세력인 김춘추와 김유신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결국 진골 출신의 김춘추가 국왕으로 즉위하자 정치적인 안정을 통해 내부의 결속을 강화한 다음 대당 외교를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 ......

 

 전통적인 선린 외교를 기본 노선으로 하면서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불사하는 강력한 군사 외교를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성공적인 실리 외교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 ......

 

 백제나 고구려의 왕족에게는 물론 지배층의 유민들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부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들을 신라의 통치체제 속으로 흡수하기 위한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북쪽으로 당(唐)과 국경을 접하게 될 고구려 유민들을 우대하여 남쪽의 백제 유민보다도 3등급이나 높은 제7관등의 일길찬(一吉湌)에 이르는 관직을 부여함으로써 최고 6두품으로 흡수하는 차이를 두기도 하였다. ...... ......

 

 신라가 통일 전쟁의 연장선에서 당과의 전쟁을 계속해 나가자 특히 고구려 유민들은 나당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여 신라와 공동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신라군의 전력을 크게 보완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군과의 동료 의식을 더한층 심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전투로 인하여 신라와 고구려 유민의 관계는 오히려 크게 개선되어 상호간에 동질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

 

 백제와 고구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나당 전쟁의 승리로 당의 군사력까지 몰아내고 난 후로 삼국의 문화를 체계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이른바 통일신라의 문화를 꽃피우게 된 것이다. ...... ......

 

 그러나 비록 신라의 통일이 고구려 고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불완전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정치․경제․문화․언어 등에 있어서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용광로의 역할을 한 최초의 민족 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후략)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의지와 능력의 부재. 그리고 당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로 인한 주체성 상실 등을 근거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아님을 알게되었다. 그렇다면 신라의 삼국 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의 타당성을 위해 왜곡 된 후 지금껏 패자의 역사로 치부되어 온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도 다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백제의 멸망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삼천궁녀로 대변되는 의자왕의 향락과 실정(失政). 둘째는 6c말부터 빈번한 전쟁을 무리하게 펼침으로 인한 국력소모. 셋째로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할 병력과 기동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한번 살펴보자. 태자궁을 새로 짓고, 몇몇 후궁을 두는 일  쯤은 당시 다른 왕들에게도 흔히 있던 일이다. 왕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그것 때문에 나라가 멸망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 아닐까. 또한 의자왕 초기는 왕권이 귀족권에 비해 상당히 약했던 시기이다. 40살이 되어서야 왕으로 추대되어 -그것도 다른 왕족에 비해 지지기반이 없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초기에는 귀족들의 기대에 부흥하며 그들과 공존했으나 점차로 집권귀족과 대항하며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변을 단행하고, 아들 등 자신의 측근을 임명한 좌평직도 40여 개로 늘리며 왕권의 기반을 잡아갔다. 너무 급하고 빈번하게 지배세력을 교체한 결과, 나라가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660년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온 긴박한 상황에서도 성충, 흥수 등의 간언을 곧바로 수용하지 않다가 결국은 나라의 멸망까지 간 것- 왕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실정(失政) 운운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정말 왕이 궁녀들과 노느라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만을 일삼았다면, 백제 멸망 직후 전개된 부흥운동도 그리 활발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한반도의 7c는 전쟁이 한쪽 지방에서만 소규모로 일어나는 국지전의 시기가 아니라, 하나의 전쟁에 승리가 아니면 멸망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달린 전면전의 시기였다. 이런 정황에서 적이 침략해 오는데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고,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도 말고 국력을 비축해 둬야한다? 이런 논리를 펴는 그들이 옹호하는 신라 또한 백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660년 6월 21일. 태자 법민 등은 덕물도로 나아가 당군을 맞아들이는 동시에 백제정벌의 구체적 전략을 논의하였다. 법민이 소정방과 논의하고 돌아오자 왕은 법민, 대장군 김유신, 장군 품일 등에게 정병 5만을 주었으며, 7월 9일 유신이 거느린 신라군 5만은 황산(黃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5만의 신라가 백제의 5천을 격파하는 것은 예상과 달리 그리 쉽지 않았다. 반굴이 전사하고, 품일이 내보낸 관창이 전사함으로써 겨우 전세를 잡은 신라군은 애초에 당군과 약속한 7월 10일을 어기고 다음날인 11일에야 기벌포에 도착하여 당군과 합류하였다.

 

 나라가 멸망할 정도로 군사력이 약했던 백제라면 신라군은 위와 같은 힘겨운 승리가 아니라 백제를 한 순간에 격파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당군이 참여한 전쟁에서만 쉽게 이겼을 뿐 신라군은 다른 전쟁에서는 그리 쉽게 이기지 못한다. 이것은 백제가 신라에 비해 군사력이 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아니, 백제의 군사력은 신라보다 강했다. 예를 들면, 602년(무왕3)부터 655년(의자왕15)까지 일어난 백제와 신라간 총 25회의 전쟁 중, 신라의 선제공격은 단 5회에 그친데 반해, 백제는 20회에 달했다. 이 것은 백제는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침략전의 성격을, 신라는 이를 막기 위한 방어전의 성격을 띠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642년(의자왕2) 대야성 일대의 40여개 성을, 655년(의자왕15) 고구려와 동맹하여 신라의 33개성을 빼앗았다. 신라와 크기가 비슷했던 백제가 후에 웅진도독부 설치 시 5部 37郡 200城 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보면 당시 신라의 피해가 얼마가 큰 것이었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필요 없는 것이지만 만약 신라가 백제와 일대일로 전쟁을 치렀다면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물론, 백제의 멸망원인 -외교상의 문제와 같은- 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려고 이상한 징조가 보인다는 등 백제와 고구려는 깍아 내리고, 신라를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역사의 왜곡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감정적인 왜곡 대신에 타당한 근거가 뒷받침 된 새로운 원인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Ⅲ.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통설로 여겨진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해 “통일” 여부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신라의 의지 여부에 두고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우선 간략하게 신라의 통일 과정을 알아보고 “통일 신라”라는 용어상의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신라가 승리를 거둔 후, 당대인을 시작으로 고려시대에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 그리고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이르기까지 충(忠)과 사대(事大)의 논리에 따라 천 여년에 걸쳐 일관되게 신라를 예찬해온 우리 조상이었지만 “삼국 통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용어가 등장한 배경은 일제시대 일본 사학자들로부터였으며 그들은 만주를 우리의 역사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만선사관‘의 논리 하에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지역은 더 이상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라 자처하며 ’천손사상‘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의식체계를 계승한 발해인과, 외교문서 등을 통해 그들을 고구려의 후예로 인정한 주변국을 무시한 논리이다.

 

따라서 엄연히 우리의 역사인 발해사를 무시한 “삼국 통일”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해서는 안 되며 전기와 구분하는 ’후기신라‘ 혹은, 전․후 상황 변화만을 인식하는 ’양국시대‘라는 용어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통일을 바라보는 북한의 인식을 알아보고 북한이 신라에 대한 국토의 남북 통일에 대한 한계성을 나당연합에 의한 역사적 과오로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은 미진하고 신라의 남북통일에 대한 부당성을 해석하기에 미흡함을 이야기했다.

 

둘째로 신라의 통일 의지 여부에 대해 알아보았다. 계속되는 백제의 공격으로 사위와 딸과 함께 40여 개의 성을 잃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마저 위험해진 상황에 처한 김춘추는 642년 겨울, 고구려를 단신으로 찾아가 연개소문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고구려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김춘추는 이제 당에게 손을 뻗는다. 당시는 각 국의 국민성은 있었을지라도 삼국을 아우르는 동족의식이 거의 전무했던 상황이었으므로 신라에게는 고구려나 당이나 외국이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고구려를 없애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질서 구축을 염원하는 당 태종과 김춘추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두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 종결 후 신라의 영토 문제이다. 735년(성덕왕 34)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당으로부터 공인 받아 헌덕왕 대(809~825)에 이르러 대동강으로부터 원산만에 이르는 국경을 설정하였으나 그 때까지도 대동강 이북에 위치한 평양은 신라의 영토에서 제외되었다. 통일이라면, 아니 적어도 신라에게 조금의 통일 의지라도 있었다면 결코 고구려의 상징인 평양을 그대로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에 앞서, 애초부터 백제 공격을 도와달라고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라는 단지 백제의 공격으로부터 자국의 생존을 위해 각국으로 청병외교를 다닌 것이고,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그 후의 고구려 영토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신라는 당에 대해 저자세를 취한다. 김춘추가 당을 방문하고 돌아 올 때 아들 법민을 볼모로 두고 온 것으로부터 뿌리 깊은 사대주의는 시작된다. 한 나라의 독립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연호를 당의 그것으로 바꾸어 사용하였고, 그 전까지는 의례적으로 행해 오던 당과의 책봉체제에 지나치게 충실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후대의 윤색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금석문(金石文)에서 신라를 당의 번국(藩國)이라 자처하였으며, 일반 백성들은 자국의 것은 폄하하며 당물(唐物)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당시에 당의 군사적․정치적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행한 실리외교의 측면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 신라 하대로 갈수록 당의 문화에 경도 됨으로써 자국의 문화를 멸시하는 풍조가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났고 이것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뿌리깊은 존화주의, 사대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 신라는 내항한 백제인을 받아들이는 듯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부터는 여제 유민에 대해 극단적인 차별정책을 실시하는데 백제인은 10등급까지, 고구려인은 7등급까지가 관직의 한계였던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신라는 처음부터 통일에의 의지는 없었다. 7c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당나라와 연합한 것이고, 그들의 힘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엎드렸고, 위협적인 존재였던 백제가 멸망하자 내항한 유민에 대해 차별정책을 실시하는 등 철처히 정복자의 면모를 보이는 것으로 그들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다. 단순히 자국의 생존을 위해 취한 행동을 놓고 “통일”이라는 거창한 용어로 포장하는 일은 이제 그만둬야 할 것이다.

또한 승자의 입장에서 패자의 역사는 의도적으로 왜곡․축소시키고 승자는 과대포장하는 일 또한 이제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