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910 : 조선은 어떤 사회였는가? 15
3. 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첩만 거느릴 뿐 자식은 나몰라라
-서자들의 잦은 반란-
서얼 차별은 결국 밥그릇 싸움
조선을 통틀어 서자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은 한 둘이 아니다. 또 대부분의 역모사건에는 반드시 서얼의 이름이 들어 있다. 가장 대규모는 임진왜란 도중에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반란사건이다. 그는 같은 서자 출신인 속모관(군량 조달하는 임무) 한현과 더불어 노비, 승려, 농민들을 선동하여 5천의 대군을 모아들였다. 그다음에는 인근 관아를 습격하며 파죽지세로 북진, 한양을 공격하여 왕도 제거할 계획을 세웠지만 진압군을 이끌던 도원수 권율에게 패해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선조 27년에도 서얼인 송유진이 천안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역시 실패하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조선에서 서얼 역모사건 중에는 대표적인 사건이 '계축년 옥사', 혹은 '칠서의 옥', '여강칠우 사건'으로 불리는 '영창대군 역모사건'이 가장 참혹하다. 여주 근처의 한강을 여강이라 불렀r고 이즈음 여기 자주 모이는 일곱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양반집 서자들이었으며 그들 스스로 '여강칠우'라 불렀다.
여강칠우의 꿈은 훗날 언젠가는 자신들의 이상국가를 만들어 보리라 결의하고 그 자금 마련을 위해 나무꾼이나 소금장수 또는 노비를 잡으려 다니는 관헌 등으로 위장하여 화적질에 나서곤 하였는데 강도짓을 하다가 꼬리가 잡혀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처음 문초를 해보니 심지어 금부도사를 사칭하여 부잣집을 털었는가 하면 걸리는 대로 노략질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의 부친들은 대개 이미 죽은 뒤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가난하고 관직에 있어도 수문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런 비참한 역모사건이 이미 드라마나소설로 많이 소개되었다. 그들이 정말 여덟 살짜리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사건을 모의했는지는 당시의 정확한 근거가 없으니 해석은 자유다. 음모의 냄새가 많이 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서자들이 그 시절에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서자들의 꿈은 결국 역모라도 해서 조선 사회를 무너뜨리고 자신 같은 신분의 사람들도 인간답게 한번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고 내왕했던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모조리 끌려와 고문을 받다가 죽고 귀양가고 했는데 그 역시 서자들과 그 가족들이 많았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확고하게 계급 사회를 보존하기 위해 서자들을 그렇게 차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결국 그것은 밥그릇 싸움이었다.
당시 조선은 전국에 대략 360개 정도의 관아가 있었고 중앙 조정에서도 여러 직책이 있었지만, 예를 들어 승정원 같은 곳도 승지가 여섯 자리밖에 안되었고 의금부 도사 자리도 열 명이 고작이었다. 기본적으로 관직이 적어서 명망가문의 정실 자손들도 취업하기가 쉽지 않은 터에 그보다 훨씬 많은 서자들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해 놓으면 그들이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조선에서 과거 급제자 수는 문과만 총14, 420명이었다. 이 숫자를 27대 왕으로 나누면 한 왕 재위 시에 500명 정도다. 500년으로 잡아도 1년에 30명 정도, 3년에 90명 정도이다. 왕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줘야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직이 한번 들어가면 늙어 죽을 때까지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는 것이 관례인지라 공석이 나기 쉽지가 않았다. 결국 자신들의 자리도 마련하기 어려운데 수만 명에 달하는 서자들에게까지 일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정권타도라는 것의 본질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지만 내면에는 자신들의 입신 영달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서자들을 희생시켰다. 그들이 항상 상대 당파를 깡그리 매장시켜버린 것도 결국 이러한 밥그릇 싸움이라고밖에 다른 해석이 불가하다. 결국 서얼도 무시하고 상민들도 무시하고 오직 선택된 한줌의 양반들만을 위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서얼이란?
서얼(庶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이 낳은 자손을 말하는 것으로, 양인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인 첩이 낳은 얼자(孼子)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또한 서얼의 자손도 서얼로 불렸다.
서얼은 양반의 신분에 속했으나 가정에서 천한 대우를 받았으며 상속권(相續權)도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이 혈통이나 결혼으로 인한 인척 관계로 출세가 규정되었다. 서얼에 한해서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고 무과에 한해서 허용하였으며, 이도 또한 대부분이 실직(實職)이 아닌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귀천의식(貴賤意識), 유교의 적서(嫡庶)에 대한 명분론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나 당나라·명나라에서도 없던 제도이다.
서얼은 수가 많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어 선조 때에는 서얼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음관(蔭官)으로 지방의 수령(守令) 등에 승진시키기도 했으나, 영조 때에 다시 서얼에 대한 차별과 관직의 제한을 엄격히 하였다. 이 같은 제한은 《경국대전》의 금고(禁錮) 및 한품서용조(限品敍用條), 《속대전》의 허통금지조(許通禁止條)에 규정되어 있는 바, 1882년까지 계속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서자는 법적으로 양반이었으나, 사회적으로 서자는 양인 또는 중인이었으며, 얼자는 천민 또는 양인의 대우를 받았다. 이는 서자의 어머니는 양인(또는 그보다 높은 신분)이며, 얼자의 어머니는 천민이기에 그에 따라 그 자녀의 신분이 정해졌다. 서자의 어머니가 반가의 여인이거나 중인층의 여인이면 서자의 신분은 중인이고, 그밖에는 양인이었다. 얼자는 그 어머니가 면천하였다면 양인이고, 또한 아버지로부터 인지를 받았을 때(정식으로 족보에 이름이 올랐을 때)에도 양인이었으나, 대부분 천민의 대우를 받았다.
서얼은 고위 관료로의 진출이나 양반 사회로의 진출이 원천적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분야를 개척하게 된다. 중종 때 승문원의 이문학관(吏文學官)이나 정조 때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 등 비교적 낮은 지위는 서얼이 독점하였고, 이들은 사대문서(事大文書)의 제술(製述)이나 《일성록》의 기록 등 중요한 역할을 맡아보았다. 이와 같이 서얼은 신분적 제약으로 정치계의 진출은 변변치 못했으나, 학문·문필(文筆)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어숙권(魚淑權)의 《고사촬요(故事撮要)》,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한편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은 서얼은 각처에서 반란이나 도둑의 주동자가 되었으며 당쟁에 가담하는 자도 많았다.
명분은 정치·사회 안정… 실제는 양반의 권력독점 정당화
조선 사회에서도 권세깨나 부리는 양반은 대개 여러 여자를 거느렸다. 하지만 그 중 한 명만 정식 부인으로 삼고, 나머지는 싸잡아 '첩(妾)'이라 했다. 조선을 명색이 일부일처제 사회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일부일처다첩(一夫一妻多妾)사회였다. 그리고 똑같이 한 남자의 아내일지라도 처와 첩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 신분 또한 엄격히 구별됐다.
첩의 자식을 일컬어 '서얼(庶孼)'이라 한다.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의 수필집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따르면 양첩(良妾), 즉 양가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서(庶)'라 했다. 서(庶)는 '여럿'을 뜻한다. 한마디로 덤이다. 또 천한 신분 출신인 천첩(賤妾)의 자식은 '얼(孼)'이라 했다.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새싹이 바로 얼이다. 첩의 자식이라도 '서' 다르고 '얼' 달랐던 것이다.
비록 양반가의 성씨를 따르더라도 서얼은 차별대우를 받았다. 집안에서는 상속에서 소외됐고, 사회적으로는 관직 진출의 제한을 받았다. 이러한 서얼 차별 정책은 1415(태종15)년, 서선(徐選)의 건의에 따라 '서얼에게는 현직(顯職)을 금한다'는 규제가 최초로 성문화됐고,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확립됐다.
조선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이 법전에 따르면, 아버지가 2품 이상의 최고위층 양반이라 하더라도 양첩 태생은 정3품까지, 천첩 태생은 정5품까지로 벼슬길이 제한됐다. 물론 문과에는 응시조차 할 수 없고 잡과만 허용됐다. 그나마 '경국대전' 편찬 후에는 과거 응시 자체를 막아버렸다. 이처럼 서얼의 관직을 제한한 제도를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라 한다.
하지만 적서(嫡庶)차별에 대한 논란은 조선조 내내 끊이지 않았다. 조정에서도 인재 활용 측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 선두 주자는 중종 때 개혁가 조광조였다. 뒤를 이어 명종 대에는 서얼 출신 문인들이 직접 "양첩의 후손에게 문무과의 응시를 허(許)하라"고 요구했다. 또 선조 즉위년에도 서얼 1600여 명이 비슷한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서얼허통(庶孼許通) 운동은 번번이 유교적 명분론에 막혀버렸다.
그러던 1583(선조 16)년. 여진인 이탕개(尼湯介)와 그 무리가 변방을 침입해왔을 때,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이이(李珥)가 계책을 내놓았다. "자원해 육진(六鎭)에 나가 3년을 근무하는 사람은 서얼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고, 공사(公私)의 천인(賤人)은 양민(良民)으로 면천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인 세력의 반대로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불어 이이는 동인 세력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벗어 던지고 율곡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정은 결국 서얼의 통용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쌀을 징수하거나 직접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게 했다. 역사적 상황이 서얼허통 운동의 작은 성과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조선시대 서얼차별정책은 끊임없는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지만, 결국은 주자학의 '명분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여기에 봉건적 신분제도와 귀천 사상이 뿌리를 내림에 따라 조선시대 서얼은 가문 안이나 사회에서 극심한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 이면에는 고상한 철학적 이념보다는, 권력 독점을 지켜내려는 양반 지배 집단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적 이념보다는 재물과 권력에 대한 이해관계가 앞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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