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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미래사회

연극은 끝났으니 '탈'을 벗자...

 

 

[다산칼럼] 연극은 끝났으니 '탈'을 벗자

한국경제 | 기사입력 2007-09-17 18:32 기사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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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孝鍾 < 서울대 교수·정치학 >

 


우리는 지금 사정없이 벌거벗고 있는 한국 사회의 심연(深淵)을 들여다보고 있다.

가짜 박사들이 부끄러운 나신(裸身)을 드러낸 것이 엊그제 일인데,이제는 '벌거벗은 권력'이 등장할 참이다.

"깜도 안되는,소설 같다"는 이야기가 실제의 이야기로 드러나자 노무현 대통령이 "할 말이 없다"고 실토한 것이다.

4년 내내 누구보다도 깨끗하다고 입만 열면 자랑해 왔던 권력이 하루아침에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 것인가.

그동안 학력문제로 문화계가 벌거벗었고 종교계도 벌거벗었다.
급기야 부패 문제로 청와대와 정치권까지 벌거벗고 있는데,벌거벗은 여체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고 해서 왜 그리 놀라는가.

앞으로도 민망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때마침 자연의 흐름으로 보아도 벌거벗는 계절이다.
여름의 풍요를 자랑했던 나무들이 그 나뭇잎들을 떨어뜨리며 벌거벗고 있다.

하지만 의문이 있다. 자연의 나무들이 벌거벗는 모습은 비감함을 넘어서서 아름답기조차 한데,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한국사회의 알몸은 왜 이다지도 추하게 느껴지는가.허세와 위선 덩어리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일까.

탈은 광대만 쓰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개의 가면과 탈을 쓴다. 자녀 앞에서는 자신의 원래 성질을 죽이고 위엄과 체면을 갖춘 아버지 노릇도 해야 하고 직장인이 되면 나이 어린 상사 앞에 억지로라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유권자 앞에서 내키지 않는 상머슴 노릇도 해야 한다.이처럼 사람들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탈을 쓸 수밖에 없지만,탈을 쓸 때는 무리해서는 안 된다.늑대라면 '늑대의 탈'을 써야지 '양의 탈'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정 부득이하면 '이리의 탈'을 쓸지언정 육식동물인 늑대가 초식동물인 양의 탈을 쓰는 것은 위선을 넘어 죄악이다.

양만이 '양의 탈'을 써야 하는 법이다.

우리 정치권에는 엉뚱한 탈을 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걸핏하면 성형수술이나 경력 세탁을 일삼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때가 묻었는데도 깨끗한 척해온 정부나 '아마추어'인데도 '프로'처럼 행동해온 국정(國政) 주도 인사들은 무슨 탈을 쓴 것인가.

또 '취재 후진화 방안'을 '취재 선진화 방안'이라고 우기는 국정홍보처나 '5년 정부'인데도 '50년 정부'인 것처럼 장기계획을 세우는 강심장의 소유자들은 제대로 된 탈을 쓴 것인가.열린우리당에 시민단체가 찔끔 들어왔다고 하여 통합신당이라고 하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다.이들 사례는 '왕자의 탈'을 쓴 거지나 '백조의 탈'을 쓴 오리새끼와 다를 바 없다.지금 통합신당이 대선후보를 뽑기 위한 순회경선을 하고 있는 중인데,흥행이 안 된다고 울상들이다.

'신정아 스캔들' 때문일까.

위선의 탈을 쓰고 있으니 국민들이 외면하는 것이다.'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계승하는 대통령이 되거나 '민주평화세력'이 되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보다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먼저 고백해 보라.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다.

부도덕했는데도 도덕적이었다고 오만스럽게 행동한 점을 깊이 반성하며 석고대죄(席藁待罪)한다고 소리 높여 외쳐 보라.열린우리당을 바꾸겠다고 뛰쳐나와 '김삿갓'처럼 이집 저집을 기웃거리며 방랑했지만,결국 '도로 열린우리당'이 된 것이라고 고백해 보라.감동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삶을 고단하게 한 죄가 너무 커서 이번에는 정권 재창출에 나서지 않고 그 다음을 기약하겠노라고 선언해 보라.감동 그 자체의 '쓰나미'가 밀려오지 않을까.

엉뚱한 탈을 썼는데도 스스로 그 탈을 벗으려 하지 않으니 남들이 한사코 그 위선과 가식(假飾)의 옷을 벗기려 드는 것이다.

스스로 벌거벗는다는 것이 별건가.

늑대가 그동안 양처럼 처신해 왔고 오리새끼인데 백조처럼 성형수술을 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그래서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면,다른 분야는 몰라도 권력과 정치권에는 정화의 힘이 흘러넘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