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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죽은 박정희와 산 김대중

 

 

[데스크 칼럼] `죽은 박정희`와 `산 김대중`

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7-06-17 17:41 기사원문보기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물리쳤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일화 한토막이다.

 

촉나라 공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 사마중달과 일전불사의 대치를 하고 있었다. 죽음을 예감한 공명은 자기 모습을 본뜬 좌상을 만들어 수레에 앉히도록 했다. 만일의 경우 자신이 살아서 지휘하는 것처럼 적을 속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공명이 죽고 소문은 사마중달에게도 전해졌다. 사마중달은 즉시 철수하는 촉의 군사를 추격했다. 이런 와중에 촉의 군사들이 수레 위에 공명의 좌상을 세우고 뒤돌아 반격을 감행했다. 이에 사마중달은 공명의 계략에 속은 것으로 판단하고 군사들을 철수토록 했다. 촉의 군사들이 안전하게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후세 사람들은 "탁월한 지략을 갖춘 인재는 죽어서도 그 값을 한다"는 뜻으로 이 일화를 인용하고 있다.

 

최근 한국 정치판의 최대 이슈는 '죽은 박정희'다. 노무현 대통령이 분노와 증오의 말들을 늘어놓는 이면에는 '죽은 박정희'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깔려 있다. 거부감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개발독재 세력의 부활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두려움은 오는 12월 대선에서 이들이 다시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노 대통령의 입장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최근 일각에서 김대중-노무현 집권기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지적하는 데다 자신이 생명처럼 여겨온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도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노무현 대통령의 차별을 원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때 노 대통령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이렇게 볼 때 연말 대선은 '죽은 박정희'를 대신하는 이명박 혹은 박근혜 후보와 '산 김대중'의 지지를 받는 범여권 후보간 대결 양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 후예'들인 이명박 박근혜 간에도 검증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연말 대선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사생결단이 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문제는 '죽은 박정희'나 '산 김대중'이나 역사적인 큰 틀에서 볼 때 모두 우리의 큰 자산이라는 점이다.

얼마 전 필리핀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너럴 팍 같은 사람 7~8명이 나와도 필리핀 문제를 해결하기는 힘들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제너럴 팍'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리킨다. 필리핀의 허약한 정치적 리더십과 관료부패를 지적하는 말이었지만, 이미 죽은 지 30년이 다 돼가는 박정희의 위대함을 그들은 여전히 인식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일본과 더불어 아시아의 선진국이었던 필리핀이 이제는 회생이 불가능한 경제 후진국으로 전락한 것을 감안할 때 박정희로 대변되는 산업화 세력이 한국 사회에 기여한 점은 결코 폄훼돼서는 안된다.

 

'산 김대중'도 도매금으로 평가절하해서는 곤란하다. 수십년 동안 한국의 민주화와 지역갈등 해소에 기여한 공로와 97년 국가부도를 극복해낸 리더십은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대목이다. 특히 남북한 긴장완화를 통한 통일접근 방식인 '햇볕정책' 역시 그 실효성에 대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전쟁 위험을 최소화시킨 평화통일전략이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올 연말 대선을 부패한 산업화 세력대 민주화 세력간 대결구도로 끌고 가겠다는 노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 핵심인사들의 구상은 매우 위험하다. 또 국가적으로도 '너 죽고 나 죽기' 식의 국론 분열을 조장하는 불행한 사태를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

 

냉정하게 평가할 때 대한민국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성공적인 사례다. 정권욕에 사로잡혀 스스로 이룩한 업적을 모두 부정한다면 우리 장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산 김대중'이 나서야 한다. 노 대통령과 자신을 무리하게 연결시켜 '한배'에 몸을 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본인이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잃어버린 10년'은 역사적 사실이 된다. 또 '죽은 박정희'만 실체 이상으로 부각시켜주는 무리수를 범하게 된다. 그 자신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간 화합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결코 이번 대선을 '죽은 박정희'와 '산 김대중' 간 대결구도로 몰고가려는 세력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김대중의 결단에 한국 사회 미래가 있다.

 

[전병준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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