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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에 부관참시,사관의 길...

 

 

능지처참에 부관참시, 그 사관의 길

[한겨레21 2007-05-01 08:09]    

[한겨레] 훈구파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34살에 죽은 김일손
 

▣ 이덕일 역사평론가

연산군 4년(1498) 7월1일. 윤필상·유자광 등 훈구 공신들이 차비문에 나가서 연산군에게 비사(秘事)를 아뢰겠다고 청하자 도승지 신수근이 안내했다. 사관 이사공(李思恭)이 참석해서 듣기를 요청하자 신수근은 “그대가 참예하여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막았다. 잠시 뒤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갔는데, <연산군일기>는 “바깥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고 전한다. 홍사호와 신극성이 달려간 곳은 경상도 청도군인데, 연산군은 액정서(掖庭署)의 하례(下隸) 중에 말 잘 타는 자를 보내 의금부 도사가 잡아오는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를 보고하게 할 정도로 재촉했다. 그렇게 체포된 인물은 김일손인데, 마침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다. 의금부 경력 홍사호가 나타나자 김일손은 이렇게 말했다.

 

무오사화의 피비린내를 예언하다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연산군일기> 4년 7월12일)

 

그의 예견대로 일어나는 큰 옥사가 바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무오사화는 당초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 기사관(記事官·정6품) 김일손과 직속 상관인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세조 때 전라감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고, 또 정희왕후 상(喪) 때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장흥(長興)의 관기 등을 가까이했다고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이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김일손은 단칼에 거부했다.

 

발단은 두 개인 사이의 갈등이지만 그 배후는 복잡했다. 이극돈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기 때문이다. 구세력인 집권 훈구와 신세력인 신진 사림의 대립이었는데, 양자의 가장 큰 차이는 세조의 즉위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사림파는 세조의 즉위 자체를 부인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이극돈이 유자광을 끌어들이고, 유자광이 다시 노사신·윤필상·한치형·신수근 등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훈구세력들의 세계관이 같았기 때문이다.

 

발단은 이극돈에 대한 사초였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적은 내용이었다. 세조가 며느리를 탐했다는 의혹을 살 소지가 있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세조 10년(1464)생인 김일손은 세조가 사망했던 1468년에 다섯 살에 불과했으므로 세조 때의 궁중 비사를 알 수 없는데도 이를 적은 것은 배후가 있다는 논리였다. 연산군이 김일손에게 ‘세조조의 일을 어디에서 듣고 기록했는지 대라’고 말하자 김일손은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라고 거부했다.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국왕이 볼 수 없었던 사초까지 강제로 본 인물이었다. 거듭된 심문에 김일손은, 귀인(貴人)의 조카 허반(許磐)을 댔을 뿐 나머지는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것은 역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놓았으니, 신은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라고 거부했다.

 

연산군은 훈구공신 윤필상·유자광 등에게 김일손의 국문을 맡겼으니 심문이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초 이 사건은 조선 최초의 사화로까지 번질 일은 아니었다. 유자광이 이를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을 심문할 때,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 절개라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 “소릉(昭陵·단종의 모후의 능)의 재궁(梓宮·시신)을 파서 바닷가에 버렸다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라는 등 세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를 주로 물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세조(수양대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던 날 살해한 인물들이었다. 소릉은 단종의 모후 권씨의 무덤인데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이후 파헤쳐졌다는 무덤이다. 김일손이 충청도 도사(都事) 시절 “예로부터 제왕은 배위 없는 독주(獨主)가 없거늘, 문종만은 배우자 없는 독주이옵니다”라며 소릉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이를 세조 체제를 부인하는 역심으로 몰기 위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소릉 복구를 청하고, 난신들을 절개로 죽었다고 쓴 것은 너의 반심(叛心·반역하려는 마음)을 내포한 것이다”라고 동조했다. 소릉 복위 문제도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조의제문’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무오사화’조는 “유자광은 옥사가 점차 완화되어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했는데,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놓으니 곧 김종직의 문집이었다”라고 전하는데 문집 속에 든 글이 바로 ‘조의제문’이다. 김종직은 성종 23년(1492) 이미 사망한 뒤였다.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

<연산군일기>는 “유자광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구절마다 풀이해 아뢰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은유법으로 쓰였기에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조의제문’은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나는 밀양에서 경산(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라고 시작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글이다. 문제는 이 글의 정축년 10월이 단종이 세조에게 살해당한 세조 3년 10월을 뜻한다는 점이다.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항우를 세조에 비유해 단종을 죽인 인물이 수양임을 암시한 것이다. 의제의 시신이 ‘빈강에 잠겼다’라는 내용도 ‘노산이 해를 당한 후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는 <아성잡설>(鵝城雜說) 등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자광은 은유로 가득 찬 ‘조의제문’의 내용을 연산군에게 상세히 해석해주었는데, 예를 들면 ‘어찌 잡아다가 제부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라는 문장은 ‘김종서와 노산군(단종)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쓴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유자광의 설명을 듣고 연산군은 흥분했다. 그 역시 훈구파처럼 항상 반대하기 좋아하는 사림파를 제거할 호기로 생각한 것이다.


연산군의 부친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것은 사림의 성향을 몰라서가 아니라 왕권을 능가하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등장한 사림은 훈구파의 비정과 비리를 강하게 공격했고, 훈구파는 몇 차례 역습하려 했으나 성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림파의 존재 자체가 왕권을 강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런 대국적 흐름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는 사림파의 쓴소리 자체가 듣기 싫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높이 평한 ‘죄’

연산군이 유자광이 가르쳐준 대로 어전회의에서 ‘조의제문’을 풀이하자 자리에 참여한 신하들은 입을 모아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 심리를 미루어보면 병자년(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난 해)에 난역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라고 외쳤다. ‘난역을 꾀한 신하들’이란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켰던 인물들을 뜻한다. 이런 ‘조의제문’에 대해 김일손은 거꾸로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정의했다. 충성스런 분노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조의제문’을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다’는 훈구파와 ‘충분이 깃들어 있다’는 사림파가 한 하늘 아래 살기는 어려웠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행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목을 베는 판국에 산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일손·권오복·권경유 세 사신(史臣)은 대역죄로 몰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는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사화(史禍)라고도 불린다. 김일손이 사형당하는 날 연산군은 ‘백관(百官)이 모두 가 보게 하라’고 명하고 “근일 경상도와 제천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무리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옛사람은 지진이 임금의 실덕에서 온다 하였으나, 금번의 변괴는 이 무리의 소치가 아닌가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나아가 연산군은 그해 7월27일, 김일손 등을 벤 것을 종묘사직에 고유하고, 백관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령(赦令)을 반포했다.

 

죽을 때 김일손의 나이 만 34살에 불과했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정여창처럼 개인 수양인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한 계열과 좀더 적극적 사회 참여인 ‘치인’(治人)을 강조하는 한 계열이 있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치인 계열의 대표이다. <월정만필>은 김일손이 정광필과 양남어사(兩南御史)가 되어 용인의 객관에 같이 묵었을 때 ‘시사를 논하는데 강개하여 과격한 말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그럴 정도로 김일손은 뜨거운 피를 갖고 있었다. <패관잡기>는 “계운(季雲·김일손의 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으나, 불행한 시대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다”고 애석해 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은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라고 연산군을 비판하고 있다.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하다

반면 김종직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평가가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사림의 종주(宗主)로 떠받들지만 허균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짓고 ‘주술시’를 기술했던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이미 벼슬을 했다면 이분이 우리 임금이건만, 온 힘을 기울여 그를 꾸짖었으니 그의 죄는 더욱 무겁다”면서 “그의 명성만 숭상하여 지금까지 대유(大儒)로 치켜올리는 것을 안타까워한다”(김종직론, <성소부부고>)라고 평했다.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 ‘김일손 만시(挽詩)’에서 “김종직은 하나의 문사(文士)일 뿐이다. 세조조에 급제하여, 후에 벼슬이 육경(六卿·판서)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조의제문’을 보면 분명히 우의(寓意)한 작품이었으니 이 무슨 도리란 말인가?”라고 비판 대열에 가담했다.

 

김일손은 정5품 정도의 벼슬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관을 펼쳤다. 그의 호 탁영자(濯纓子)는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 따온 것이다. 창랑의 물이 흐린데 갓끈을 씻으려 한 김일손. 그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그만큼 세상을 사랑한 것이리라.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사후에도 가혹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의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이미 사망한 김일손의 부친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의 첩자(妾子)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까지도 목을 베어 죽였다.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임금이 될 수 없었던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던 무리수는 이렇게 먼 훗날까지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중종반정 뒤 김일손은 복관되고 문민공(文愍公)이란 시호도 내려졌지만 중종 때 다시 김일손과 같은 사림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처럼 역사의 어두움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