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식 사랑은 유별났다. 동물적 자식 사랑이 지나쳐 부작용을 낳은 예가 수도 없이 많았다. 우리 사회 고질 중 하나인 교육 문제도 유난스러운 자식 사랑에 그 원인이 있고 공직자들이 비리로 망신을 당한 사건들도 대부분은 자식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은연중 작용했을 것이다. 요즘 나라를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조폭놀음’도 지나친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 빚어진 사건이다. 김 회장이 더욱 비판 받는 것은 그가 10위권 재벌을 이끄는 총수로서 갖춰야 할 절제의 덕목을 잃었다는 점이다.
김 회장의 저급한 행동을 보면서 지난번 미국 버지니아공대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장례식장에서 보여 준 절제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부모가 돌아가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우리 속담처럼 그런 상황에서 참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는 숱하게 보아 왔다. 물론 서해교전에서 산화한 고 윤영하 소령의 부모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희생된 고 윤장호 하사의 부모처럼 속으로 슬픔을 삭이며 겉으로 의연했던 특별한 분들도 있지만 슬픔을 못 이겨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울부짖다가 실신하는 것이 우리네 부모들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분한 마음에 분향소 차리기를 거부한 채 자식 시체를 메고 행정당국이나 가해자를 찾아가 몇 날 며칠씩 농성을 벌이는 부모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어렵지 않게 보아온 터다.
자식 잃은 부모도 참았는데
그러나 버지니아공대 희생자 부모들은 장례식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대신 행사장에서 가족끼리 조용히 포옹한 채 어깨만 들썩이며 슬픔을 삼켰다. 그들은 ‘범인을 찾아내 맞은 만큼 패주는 식’의 무절제한 보복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서는 살아있는 자들의 최대 특권”이라며 그 상황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관용의 모습까지 보여 줬다. 미국인들은 과거 뉴욕에서 있었던 9·11테러 희생자 영결식 때도 그랬고 오클라호마 주청사 건물 폭파사건 희생자 추모식 때도 그랬다. 그들의 절제력은 보는 이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그런 사례들은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의 힘은 월스트리트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초대형 항공모함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극기하고 절제하는 그들의 청교도 정신이 미국 사회의 힘인 것이다. 억제된 감정은 감춰진 부분이 더 많은 빙산과도 같아서 그 속을 쉽게 엿볼 수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의 경우 과거 민주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절, 국민이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수단은 격정적인 투쟁이었다. 그래서 절제를 벗어난 행동이 어느 정도는 용납되고 심지어 지지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민주화된 지금까지 그런 구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원로 철학자 윤태림 교수는 한국인의 성격을 설명하면서 지나친 감수성을 우리의 약점 중 하나로 들었는데 최근의 여러 사회적 현상을 보면 정확한 지적이다. 감수성이 너무 예민하면 절제와 극기보다는 격앙과 감정의 발산이 더 쉽게 나타난다. 또 경박한 감상주의에 빠지기도 잘하고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에 의해 어떤 일의 방향이 결정되는 개인적, 사회적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이성보다 감정이 사회를 지배하면 결국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인들이 득세하고 국가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노사분규 현장에서, 또 분별없는 반미시위 현장에서 참가자들이 감정을 억제 못해 극단으로 치달았던 결과가 어떤지를 우리는 자주 보아 왔다. 이런 것들이 극복되지 않으면 아무리 반도체 산업에서 첨단을 달리고 자동차를 잘 만들어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 한들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절제와 관용이 지배하는 사회를…
모범 국가, 일류 국가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얼마만큼 정신적으로 균형 잡힌 지혜가 사회를 이끌고 있는가, 또 어느 정도 원숙하고 절제된 정서가 사회를 지배하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법이다. 미국 버지니아공대 사태는 바로 그런 차원에서 그들의 강점과 아름다운 점들을 보여 주는 교훈 그 자체다. 그 가운데 우리가 배워야 할 첫째 덕목은 절제의 정신이다. 절제는 미래를 위한 건설적 에너지로 승화되지만 격앙은 사회를 파괴하는 에너지로 작용할 뿐이다.
이규민 大記者 kyumlee@dong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