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학수] 지난달 28일은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 46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은 이순신(1545~1598)을 성웅으로 숭배한다. 이순신은 우리가 경배하고 추모하고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위대한 분이다. 실제로 이순신의 삶을 돌아보면 탁월한 해군 전략가이자, 엄격한 선비였으며, 탁월한 장수였고, 공정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위인이었다. 때로는 너무 단호하고 비장하기까지 해 평범한 사람들은 충무공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기에 부담을 느낄 정도다. 이런 충무공이 4월 28일 하루만 경배하고 추모하는 인물이 되고 있다. 한산도의 제승당 참배나 진해 군항제, 아산 현충사의 기념식이나 축제에서나 잠시 기억되다가 바로 잊히고 말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1805년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한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1758~1805)을 인간미 넘치는 친구처럼 대하고, 평일에도 그의 동상 앞을 지나가다가 좌대 밑에 꽃을 갖다 놓는다. 넬슨의 동상 장소는 연인들의 포옹 장소가 되기도 한다. 넬슨은 인간적으로 허점투성이였고 바람둥이였으며, 눈 하나를 실명하기도 했다.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전사했다.
충무공과 넬슨 제독의 다른 점은 넬슨 제독이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영웅인 데 비해 충무공은 우리들로부터 너무나 멀리 있다는 사실이다. 넬슨 제독은 영국인들, 특히 어린이들의 가슴 속에 친근하게 살아서 숨 쉬고 있지만 충무공은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고 너무 위대한 영웅이다.
세계 4대 해전의 하나인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지휘했던 기함 빅토리함을 영국인들은 아직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충무공이 승선해 지휘했던 전투 지휘함 판옥선은 지금 한 척도 남아있지 않다. 한때 40여 척이나 되던 거북선도 모두 사라지고 현재 전시 중인 것은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리의 주역이었던 판옥선을 복원해야 하지만 예산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다. 충무공에 비하면 넬슨은 얼마나 행운아인가.
충무공 동상을 세종로와 같이 위험한 차로 가운데 두지 말고, 사람들이 쉽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할 방법은 없을까. 한때 권위주의 정권들이 충무공을 경배하면서 동시에 충무공을 이용한 적이 있다. 이순신이 무능한 선조대왕의 부당한 조치에 복종하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했음을 강조한 것은 자신들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국민에게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칼의 노래'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소설은 충무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어 우리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특히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충무공의 청년시절을 탁월한 상상력으로 재구성해 내기도 했다. 일부 사람이 충무공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충무공의 삶을 현대에 맞게 재구성하고 그의 전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충무공이 국민 속에 살아있는 친숙한 위인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충무공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어떻게 행동하고 판단했을까를 생각하면서 그분의 구국정신과 리더십을 되살려내야 한다. 죽은 영웅을 살아있는 영웅으로, 박제된 영웅을 움직이는 영웅으로 만들 때, 그리고 영웅이 국민과 함께할 때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학수 해군사관학교 교수박물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