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김두우 논설위원] 21일 저녁 TV 뉴스를 본 국민은 경악했다. 대통령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우선 증오와 분노에 찬 목소리, 오만불손하고 품위라곤 찾을 길 없는 제스처로 국민의 넋을 잃게 했다. 때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른 모습으로, 때론 연단을 주먹으로 몇 번씩 내려치면서, 때론 고함과 함께 주먹을 내보이면서. 지켜본 국민의 가슴은 산산이 부서졌다.
대통령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모습은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불고 있어" "한판 붙을 놈 있으면 나와봐" "너희가 뭐라고 떠들든 나는 내 방식대로 간다"고 외치는 듯했다. 이쯤 되면 정말 막가자는 것이다. 조폭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과 다름없다.
역대 대통령도 부끄러운 말과 행동이 없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툭하면 기자들과 만나 "내가 오늘 클린턴과 통화하면서 한 수 지도해 줬다"고 자랑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험담을 하기도 했다. 자신이 '폼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국익에는 나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노벨 평화상을 목표로 외교부와 비선(秘線)조직, 기업들이 움직이는 게 목격됐다. 그러나 YS와 DJ는 유치하고 낯뜨거운 대목은 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처럼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국민을 두려워했다. 적어도 지금처럼 국민과 싸우자고 덤비지는 않았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10% 아래로 떨어졌다. 사상 최악이다. 최근 여러 조사에서 그렇게 나타났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등 돌렸다는 뜻이다. 어떤 정책도 먹히지 않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지지도가 40%, 30%대로 떨어지면 대통령은 힘을 잃는다. 상하원이 견제에 나서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이걸 이해할 수도 없고, 참지도 않겠다고 소리치고 있다. "나를 공격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응분의 보복을 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만난 한 여권 인사는 심각한 이야기를 전했다. "사적으로 만났을 때 대통령이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고, 감정의 진폭도 우려할 만큼 크다"는 것이었다. "억울해 하고, 배신감을 토로하고, 분노를 쉽게 표출하는 바람에 상대방이 위로의 말을 찾기에 바쁠 정도"라고도 했다. 여당의 중진 의원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장관에게 '내가 제대로 준비를 못했으니 점심하면서 공부 좀 시켜 달라'고 했다더라"고 전했다. 믿고 싶지 않은 말들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최근 행적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오게 생겼다. 호주.뉴질랜드 방문과 APEC 참석을 눈앞에 두고 1만 자가 넘는 '당원에게 보내는 편지'에 몰두하고 있는 대통령, 20분짜리 인사를 할 자리에서 1시간10분간 분노를 줄기줄기 내뿜는 대통령이니 말이다. 고건씨를 총리로 기용한 것을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고 하고,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의 장관 기용에 대해서는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자기 편을 기용한 것을 '링컨 대통령과 비슷한 포용 인사'라고 얼토당토않은 억지를 쓰는 것을 보니 말이다.
1년 남짓 남은 임기 동안 노 대통령이 이 나라를 얼마나 더 만신창이로 만들지 걱정스럽다. 얼마나 국민이 참담한 심정을 더 느끼게 만들지 우려된다. 얼마나 더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부끄러워하게 만들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서 다짐해 본다. 노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대통령, 정서 불안정인 대통령, 자신의 '무오류성'에 대한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잘못을 지적당하면 참지 못하고 싸우자고 덤비는 대통령은 뽑지 말아야 한다. 그런 대통령은 국민의 가슴을 찢고, 국민의 자존심을 패대기치고, 국민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잘못은 한 번으로 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