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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우리 역사의 재해석 1


    

                                      우리 역사의 재해석 1  


                                                                      호평동 ~ 사능역 사이 자전거길 새벽 여명 전경



새해가 밝았다. 


인간 사회는 여전히 권세와 재물을 더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중국이 달에 착륙하고 미국의 무역압력이 노골화되고 트럼프 대통령의 망언과 압력, 무차별 자국주의 정책은 세계 각국의 반감을 싸고 있다. 주한 주둔군 비용 협상은 어찌되었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우리가 미국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있을까. 중국, 북한과 밀약하고 미국에 '노'라고 말하며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더라고 버틸 재간이 있다면 모르겠다.


남북정상회담은 물론 북미회담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지고 있고 김정은의 속은 아무도 모른다. 만약 통일이 되어 북의 무력과 남의 경제력이 합쳐진다면 우리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잘나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정치권은 여전히 뒷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청와대가 흔들리고 수석 몇 명 바꾼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임금 상승으로 죽어나는 것은 중소기업인데 인건비 부담으로 문을 달아야 할 판이다. 자영업은 말할 것도 없고 간판을 바꾸어다는 가게가 한 둘이 아니다. 잘나가는 대기업도 국제 경쟁에 휘둘리고 고부가 기술이 하루가 멀다하고 유출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국민들의 주머니는 갈수록 빈약해지고 삶은 더욱 고달퍼진다. 그래도 가진자들은 여전히 갑질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극빈층은 이 추운 한겨울에 차가운 방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무역량이 늘어나고 경상주지가 늘어난다고 국민들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가진자들의 축재만 늘어날 뿐이다. 


우리는 드라마에 빠져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고 환상에 빠진다. 연에인들의 가정사와 입담, 시청율을 올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하는 그들이 진정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것은 그들이 돈을 많이 번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사는 것이다. 미투와 빚투에 무너지는 유명인들이 인생의 기회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잊어비리곤 한다. 뉴스에 나오는 각종 범죄를 바라보며 모두가 비난하지만 우리들 또한 그런 처지가 되면 어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힘든 현실을 손흥민의 슛을 보며 즐거워하고 김연경의 스파이크 한방이 성공하는 순간은 모든 시름이 사라진다.



새해 태양은 변함없이 떠 올랐다.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의해 우리 눈에는 새해 아침 태양이 새로운 미래를 밝혀주는 빛으로 느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해 해맞이 여행을 떠나고 산마다 바다마다 구름처럼 몰려들어 각자 새해 소망을 빌었을 것이다. 어둠을 해체고 떠오르는 새해 아침 태양은 무언가 새롭고 신비로움을 주는 듯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새해 태양이라고 하지만 자연의 반복된 현상일뿐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고대부터 사계절이 바뀌고 365일이 지나면 다시 사계절이 반복되는 현상을 연구하여 만든 것이 태양력, 즉 양력 달력이다. 음력 달력은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의 공전과 자전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이다. 서양에서는 양력, 동양에서는 음력이 사용되어 왔다.


테양과 지구, 그리고 달이 서로 움직이는 현상에 따라 지구의 기후는 다양하게 변한다. 그에 따라 정착민에게는 그 지역의 기후가 사람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난하여 농사가 가능한 살기 좋은 지역을 찿아 이동했다. 살기 좋은 곳이란 기후가 온난하거나 사계절이 반복되고 숲과 물이 풍부하고 농사가 가능한 지역인데 그 지역이 대부분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위도 20~50도 어간의 지역으로 기후 변화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그래서 인류는 기후가 온화하고 살기좋은 곳을 찿아 모여들었고 먼저 그 지역을 선점한 민족들이 정착하면서 인류 문명이 크게 발전했다. 그런 곳이 바로 인류 4대 문명 발상지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살기 좋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고 척박한 지역의 민족들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런 지역을 우리는 '인류 문명 발상지'라 부르며 세계적으로 인류 문며 발상지를 4곳이라고 배웠다.



인류 문명 발상지

세계 4대 문명에는 B.C. 4000~B.C. 3000년경 큰 강 유역에서 발달한 최초의 인류 문명 발생지들인데 인류의 발생지로 여겨지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나열하면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는 나일 강변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허 유역의 황허 문명을 들 수가 있다. 이들 지역은 큰 강의 유역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며, 공통적으로 청동기, 문자, 도시 국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이집트 문명 발상지 : 나일 강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으로,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베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디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호 제국으로서 관계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정치와 종교를 결합한 신권 정치(파라오 = 신의 아들 자처 왕권 강력), 사후세계(미라, 사자의 서), 태양력, 측량술, 기하학, 의학 등 실용학문 발달, 파피루스 기록, 피라미드, 스핑크스 등이 있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 :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 우르와 라가시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고대 그리스어 'Μεσοποταμία'에서 온 말로서 '메소'는 중간이라는 뜻을, '포타미아'는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적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지리학상 중동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의 주변 지역(현재의 이라크)을 일컫는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개방적인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주위의 문화적 파급과 후세의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세계사적 의의가 크다.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강의 범람이 불규칙적이고 잦아서 치수와 관개 등 대규모 사업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도시 국가가 나타나고, 교역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수메르인, 지구라트(거대신전), 태음력, 60진법, 함무라비 법전, 쐐기문자 등 국가기반 마련. 바빌로니아 왕국 등이다.

 

  • 인더스 문명 발상지 : 인더스 강

인더스 문명 또는 인더스 계곡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은 기원전 약 3300-1700년에 있었으며, 기원전 2600-1900년경에 흥했던 문명으로, 인더스 강과 현재의 파키스탄과 북서쪽 인도에 걸쳐 있는 가가 하크라 강(Ghaggar-Hakra -)사이에 있었다. 처음 발굴된 유적지가 하라파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부흥했던 시기는 하라파 문명이라고도 부른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인더스 강의 범람, 삼림 파괴 등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발굴은 계속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활발히 교류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인장 등 인더스 문명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때로는 인더스 가가 하크라 문명(Indus Ghaggar-Hakra civilization), 인더스 사라스바티 문명(Indus-Sarasvati civiliz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더스 사라스바티 이름은 가가 하크라 강을 리그 베다에 나온 사라바스티 강으로 판정하는 입장에서 부른다. 그러나 언어학적, 지리학적인 관점에서 이 이름이 적당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리아인, 하리파, 모헨조다로, 도시 문명, 도로망, 공중목욕탕, 철기, 카스트 제도, 그림문자 등 사용. 농경 및 목축을 하면서 "바닷길"로 메소포타미아와 무역 등. 


  • 황허 문명 발상지 : 황허

황하 문명(黃河文明)은 중국의 황허 강 중하류 지역에 성립한 옛 문명의 총칭이다. 문명의 성립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청동기.문자의 성립 등이 요소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하 문명의 성립기(成立期)는, 오리엔트나 인도보다 늦은 기원전 2000년 경이라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4대 문명으로 분류되었지만, 현재는 장강 문명 등 다양한 문명이 중국 각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4대 문명에 황하 문명만을 채택하지는 않으며, '황하 및 장강 문명'이라 한다. 

신석기 시대의 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를 거쳐,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 문명으로 발전해 갔다. 조, 수수 재배, 가축, 토기, 갑골문자, 은나라 은허 유적, 신정 정치, 농경 사회 등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러면 우리 역사와 문화는 도대체 어디서 기원되었고 어떻게 와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가장 현실감있게 쓴 책이 있는데 이진아 박사의 '지구위에서 본 우리 역사'란 책이다. 이 박사의 글 몇 편을 읽다가 바로 인터파크를 통해 그 책을 구매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아래에 우선 몇 가지 이야기를 요약하여 올리니 자신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한반도가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


빠르게 흔들려가는 21세기의 지구. 그 위에 자리한 한반도의 우리는 이 가속적인 변화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야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간은 언제나 역사를 되돌아봐왔다. 


그런데 역사를 보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달랐다. 문자가 없는 시대와 사회에서는 이야기를 통해 예전에 있었던 일을 전해주었다. 고대 그리스나 인도, 동아시아의 신화에서 아직까지 남태평양 원주민 사회에서 살아있는, 옛날이야기에 노랫가락을 붙여 들려주는 풍습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역사는 항상 스토리텔러의 입에서 현재의 버전으로 새로 탄생했다. 문자가 있는 사회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일을 현재라는 렌즈에 비추어봤던 것이라는 점,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서 여러 번 확인했다.


21세기의 역사 보기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요즘 많이 들리는 ‘융합의 역사’라는 키워드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구비전승도 무시하지 말고 기록이라고 다 맹신할 일은 아니라는 반성은 20세기 후반부터 역사학의 새로운 트렌드로 커져왔다. 옛 기록 속에서 기후 등 환경조건을 찾아서 새로운 역사 읽기에 통합하려는 환경역사학도 또 다른 트렌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여기 덧붙여 지난 세기 말부터 문자는 물론 구전에도 담겨져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며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간이 쓴 기록이 아니라 ‘지구가 쓴 기록’, 혹은 ‘지구에 새겨져 남아 있는 기록’을 읽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몇 억 년 전부터 현재까지 있었던 기후변화나 지구자기장 변화의 역사가 선을 보이고 있다.


21세기의 역사는 이렇게 새롭게 확장된 인간 지성의 산물까지도 통합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연재의 기본 전제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도 그 전제에 따라 새롭게 읽혀져야 한다고 본다.

 

비파형동검(춘천 중도유적 청동기시대 주거지유적 출토 유물) © 사진=연합뉴스


 

유물과 유적으로 해석한 문명발상지론

역사학에 있어서 ‘문명발상지론’이라는 게 있다. 인간이 다른 집단사회 생활을 하는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만이 보이는 특성을 갖는 고도의 문명생활을 시작한 것이 언제 어디서였느냐는 것이다. 19세기말 유럽의 박물학자들에 의해 처음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 화두는 이후 새로운 유적지들이 발굴될 때마다 크고 작은 수정을 거치면서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이 키워드로 자료를 찾으면, 상당히 다양한, 때로는 디테일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콘텐츠들이 난무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과거의 어떤 사회가 문명생활을 했느냐 아니냐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양하지만, 대체로 도시 형성, 식량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전문직 종사자의 존재, 계급 분화, 국가 수준의 조직 등이 거론된다. 이런 기준으로 지금까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티그리스 및 유프라테스 강 유역, 이집트 나일 강 유역, 인도 인더스 강 유역, 중국의 황하 유역, 이 4개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문명이 발생했을 것으로 꼽혀왔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 서북부 바깥쪽에 위치한 ‘요하’라는 강 유역에서 고대문명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세계역사학계의 정설들을 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유물들은 요하 유역에서 인간들이 집단을 이루며 고도의 문화생활을 하며 살았던 흔적을 보여주는데, 그 연대가 기원전 70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까지의 것 정도로 추정된다. 

 

세계의 문명 발상지 연대와 요하문명의 연대 비교. Wikipedia ‘Cradle of Civilization’ 게재 연대표를 기초로 재구성. © 사진=이진아 제공

 

그 중 기원전 4500년대에서 300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의 유물들은 당시 이곳 사람들이 국가 규모의 집단과 사회체계를 이루고 살았다고, 즉 지금 학계의 일반적 기준으로 보아 ‘문명단계’에 이르렀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대체로 인정되고 있는 4대문명 발상지 중 가장 빠른 곳보다 1000년 앞서며, 황하문명보다는 2500년이 앞선다. 제5의 문명발상지가 등장해서, 사실상 제1의 문명발상지임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세계사가 다시 쓰여야할만 한 상황이다.

 중국 내에서는 역사가 숨 가쁘게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오랜 세월 중국의 주류 세력이었던 한족은 적어도 문자기록이 있었던 때부터 황하문명을 자신들의 시원으로 삼고, 자기 나라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아 ‘중국(中國)’이라고 불렀다. 만리장성 이남에서 양쯔강까지, 역사시대에 한민족 국가들이 자리했던 곳을 중원(中原), 즉 세계 가운데 있는 터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서 동서남북, 즉 현재 만주와 한반도, 몽골, 위구르 자치구, 중국 남부 및 동남아시아 지역을 모두 오랑캐, 즉 야만족이라고 불렀다. 수천 년 동안 한족 중심의 중국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이 되어 왔던 ‘중화사상’의 핵심이다.

 그 오랑캐의 땅 중 일부인 요하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천 년 이상 빠르고 이미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이는 고도로 정교한 문명의 잔재들이 속속 발굴된 것이다. 수천 년 간 중국인들의 정신적 근간이 되어왔던 중화사상이 뿌리부터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요하 유역과 요하문명권의 유적이 나온 지역 및 유적의 시대별 정리. © 사진=이진아 제공


중국은 발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국가전략으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웠다.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은 예로부터 중화민족이며 그들의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것이다. ‘동북공정’은 이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국가가 주도하는 요하지역 연구 프로젝트다. 그 핵심은 요하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원으로 확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근본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내재해 있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 중 대다수가 중국의 것과는 판연히 다르며, 한반도 국가들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 유물과 유적이 속했던 연대에 이 지역에 있었던 나라를 규명하자면, 동아시아의 모든 기록들을 검토해볼 때 해당되는 국가가 ‘고조선’밖에 없다는 점도 있다.

기원전 6000년, 요하문명에서 가장 먼저 형성되었던 사해·흥륭와 문화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와 옥귀걸이가 출토되었다. 이 옥귀걸이와 꼭 같은 모양의 옥귀걸이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도 출토되었다. 기원전 4500년 홍산문화의 여신묘에서는 곰과 관련된 부장품들이 많이 나와서 홍산인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 토템족이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바로 우리 민족의 기원 신화인 단군신화의 내용이다. 

 

사해·흥륭와 문화 유물인 옥귀걸이와 강원도 고성 문암리에서 출토된 옥귀걸이. © KBS 역사스페셜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화면 캡쳐


홍산문화는 기원전 2000년이 되면 하가점 하층문화로 옮겨간다. 이 시기 유물로 발견되는 돌로 쌓은 성에서는 ‘치’라고 하는, 성 전면에 돌출된 구조물이 눈에 띤다. 성에 접근하는 적들을 활로 막아내기 위해 궁수들을 배치한 탑과 비슷한 것인데, 중국에는 이런 구조물이 있는 성이 없고, 고구려의 성에서만 발견된다. 

이밖에도 요하와 한반도 전역의 연계성을 확실히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자료의 하나가 비파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이란, 칼날 부분이 비파와 비슷한 곡선을 보이고 있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청동의 검을 말한다. 발굴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이것이 제사지내는 의례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주로 의례의 장소에서 많이 나왔고 제작하기 힘들어 보이는 정교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 한반도 여기저기서 많이 출토되면서 좀 더 실용적인 목적, 즉 무기로 사용됐으리라는 추론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한·중 고대 청동검 모양 및 분포지역비교. (자료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비파형 동검이 가리키는 역사

다른 문화권의 검과는 판연히 다른 비주얼을 갖고 있는 이 동검은 한반도에서는 함경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금의 랴오닝 성, 즉 요하유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또 거기서 가까운 북경 인근 하이허(海河) 유역에서 소량 발굴될 뿐이며, 그 남쪽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인이 최근까지 자기 문화의 시원이라고 했던 중원지역에서 출토되는 검들은 위 그림에서 보듯 비파형 동검과는 전혀 다른 일자형 동검이다.) 

비파형 동검 중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기원전 1200년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며, 대부분의 비파형 동검이 기원전 8세기 이전의 것이라고 한다. 즉 비파형 동검은 요하 문명의 가장 마지막 시기인 하가점 상층문화(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까지) 시대에 사용됐던 것이다.

이 동검을 기준으로 본다면 동아시아의 과거 판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7000년부터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이는 요하 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은 서쪽으로는 북경 인근 하이허 유역에서 동남쪽으로는 한반도 대부분을 터전으로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이허 이남의 중국 지역, 즉 불과 얼마 전까지도 중국인들이 ‘중화(中華)’라고 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 된 문명 발상지임을 자부했던 지역의 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선 국가 문명을 이룩했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문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자명한 사실은 현재 왜곡되어서 국제사회에 알려지고 있다. 

 “요하문명은 중국인의 선조가 구축했던 문명으로 중국의 문화적 유산이다. 그것이 나중에 한반도 전체로 확산됐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 주최 국제학술회를 거치면서 다듬어져 영어와 중국어로 온라인 공간을 도배하고 있다.


요하문명에 관련된 세 가지 의문이 있었다. 첫째, 과연 요하지방을 포함한 한반도 일대에서 세계 최초의 문명이 있었을까? 둘째, 있었다면 그 문명의 주역은 지금 중국인의 조상일까 한국인의 조상일까? 셋째, 만일 한국인의 조상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고도의 문명을 건설했다면, 왜 그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까지의 글에서 충분히 나왔다고 본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단연 ‘YES’다. 앞서 보았듯이 여러 가지 생태학적 특성을 고려해볼 때 한반도는 1만2000년쯤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후 세계 중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춘 곳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발달된 문명을 이루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두 번째 질문, 요하문명의 주역이 지금 누구의 조상이었을까? 최근 속속 발굴되는 고고학적 유물·유적들로 인해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과거 인간들의 교류가 훨씬 활발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요하문명에서 홍산문화 직전에 있었던 조보구 문화 유적지에서 벌써 채색토기가 발굴되는 등 중국 문화의 영향이 뚜렷하다. 따라서 지금 중국인과 한국인들도 DNA의 상당부분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요하문명이 지금 어떤 국가 국민의 조상이었다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게 선을 긋는 일이다.

 


하지만 요하문명의 주역이 지금 중국인의 조상이냐 아니면 한국인의 조상이냐, 이렇게 이분법적인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나만 택하라면,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선택은 더 잘 먹고 잘 사는 방향으로 간다. 요하문명 당시 그 지역 주민들이 남쪽에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올라간 사람들이든, 아니면 더욱 북서쪽 내륙으로부터 내려온 사람들이든, 아니면 그 두 계열의 혼합집단이든, 이들은 자신의 거주지를 확대할 때 중국 동해안보다는 살기 좋았던 한반도 서해안을 택했으리라는 건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요하에서부터 한반도 남단, 그리고 빙하기 직후에는 한반도 남부에 거의 붙어있었던 일본 규슈지역까지 하나의 문화권으로서 특징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서해안의 생산성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세 번째 질문, 우리가 왜 그 사실을 잘 몰랐을까? 이 답은 이 연재를 통해서도 여러 번 나왔기 때문에 아주 쉽다. 역사왜곡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보다 열세에 있었던 과거 10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그리고 짧지만 최근 경험이어서 우리의 집단적 기억에 선명한 일제강점기 동안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왜곡은 주도면밀하고 끈질기게 지속되어 왔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못 보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부정하는 행동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깨어있는 정신을 가진 독자라면 여기서 질문을 멈추지 않고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우리 조상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고 중국은 후진지역이었다면 왜 중국이 더 강국이 되어 역사를 왜곡시켜 왔을까? 

이 질문에 대해 아주 포괄적으로 답한다면,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우주와 지구의 환경요인이 이 지구상에서 삶의 조건을 규정해왔고, 그에 대응해서 인간의 대응전략이 바뀌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연재에서는 그 중에서도 요하문명과 한반도 문명 사이의 그 오랜 단절에 기여했던 두 가지 큰 사건을 조명하려 한다. 하나는 철기제작 유목민에 의한 요하문명의 붕괴, 또 하나는 백두산 폭발로 인한 동아시아 판세의 역전이다.

먼저 요하문명의 붕괴.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된 바가 없다. 요하문명이란 키워드 자체가 세계의 학계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고, 현재까지 중국에 의해 자료가 독점되어 요하문명을 포함한 중국역사 만들기에 급급한 상황이다. 요하문명의 종말을 논할 분위기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정보로도 요하유역의 유적이 기원전 11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급격히 끝나버렸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이후엔 이 지역에 고도의 문명생활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일단 한 번의 단절이 생겨난다.

이 단절에는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 보아왔듯이, 급격한 기후변화가 상당히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 나왔던 요하문명의 기후변화 그래프를 다시 보자. 소하연 문화를 끝으로 요하문명이 끝난 시점인 기원전 1000년 전후 무렵의 기후변화에 주목하자. 

 

© 사진=이진아 제공

이 시기는 ‘철기 시대 한랭화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시기로서, 온난기의 정점에서 갑자기 기온이 곤두박질쳤던 시기다. 세계적으로 볼 때는 이 기온 급강하 경향이 거의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250년까지 지속되지만, 요하유역을 비롯해서, 태평양으로부터 난류를 지원받는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기온은 금방 온난화 단계를 회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보다 내륙 쪽으로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빠르게 추워지는 날씨로 인해 무엇보다 심각한 식량부족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결과 좀 더 기온이 따뜻하고 식량생산성이 높은 곳, 즉 요하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물결이 생겨났을 것이다.

요하유역은 북아시아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꿈의 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기원전 7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까지 6000년 동안, 그렇게 넘보는 이방인들을 잘 제어해서 든든하게 고도의 문명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던 요하인들이 기원전 1000년에 와서 무너지면서 요하문명이 끝나버렸을까? 

여기에는 기후변화 뿐 아니라 이에 대응하는 인간전략이라는 차원이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서쪽으로 철기를 제작할 줄 아는 유목민족의 한 흐름이 요하지방을 공격해서, 흑요석과 청동의 무기를 병용하던 요하문명의 맥을 끊은 것이라고 말이다.

 

청동기 사용 인간과 철기 사용 인간의 충돌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소재가 되곤 한다. 그림은 기원전 8세기 경 철기 사용인 스키타이족이 동쪽으로 확산되어가면서 슬라브족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에 대한 상상도다. © 사진=Ancient Origins 제공


본격적인 철기 문명은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즉 이란 및 이라크 일대에서 기원전 200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광석은 지구상 어디서나 쉽게 발견되지만 문제는 이를 제련하는 데 필요한 나무다. 앞서 길가메시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아나톨리아 지방은 지구상에서 가장 목재가 풍부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빨리 소진되고 회복되기 쉽지 않았다. 철기 무기를 확보해야 할 필요에 쫓긴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동서로 확산되어가면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철기문명은 기원전 3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하지만 한반도 철기 문명에 관해서는 최근 점점 더 새로운 면이 드러나고 있다. 두만강 유역 동북부 일대, 즉 ‘부여’라고 불리던 곳에서는 기원전 1000년 무렵, 함경북도 무산과 강원도 홍천에서는 기원전 600년 무렵부터 철기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적어도 기원전 1100년 무렵에는 철기를 제작하는 인간 집단이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얘기다.

아직 이 철기제작인들과 요하문명의 관계는 학문적으로 연구된 바 없다. 이 모든 것이 아직 너무 새로운 자료이며, 더욱 새로운 자료들이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추정은 할 수 있다.

비옥한 땅을 기초로 성립한 농경·해양 복합 문명이었던 요하문명의 주역이 식량을 가진 자와 흑요석이라는 무기 소재를 가진 자와의 연합으로 오랫동안 막강한 문명으로 군림해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소외되었던 인간집단, 예를 들면 아무르 강을 따라 연해주까지 이어지면서 형성된 부족연합들은 그 문명과 적대적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이들이 서쪽으로부터 아무르 강 연안을 따라 철기 문명을 가져온 유목민 집단을 받아들여 요하문명의 주역들을 공격해서 쓰러뜨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한랭기가 되어 살기 힘들어지고, 문화수준은 낮아도 더 강력한 철제 무기로 무장한 이민족에 의해 터전을 빼앗긴 요하문명의 주역들은 남쪽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고조선 같은 국가를 키우는 데 크게 기여했을지 모른다. 또 요하문명 특유의 문물을 한반도 전체에 전파하는 데도 기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