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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15 : 현충일의 의미 2 (한국전쟁 1)

 

 

 

강남의 봄 15 : 현충일의 의미 2 (한국전쟁 1) 

 

 

                                                                  북악둘레길에서 바라본  서울 성북동 전경

 

 

북한의 김일성이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해방 후 빠른 기간 내에 북한 사회를 통합하였고 강력한 정권을 수립하고 통일을 위해서 전쟁까지 일으켰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던 창업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가 소련군을 등에 업고 통치하던 기간은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자 혼란하기 그지없던 북한 지역에 강력한 일당 독재 정권을 수립하여 북한 정권을 창업한 과정에 있다.

 

그는 친일파는 물론 부농, 지주, 지식인,각종 파벌주의자 등 남한처럼 혼란을 가중시키던 각종 세력을 여지없이 처단하고, 빠른 시간 안에 북한 사회를 공고한 체제로 확립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한의 이승만이 북한의 김일성처럼 강력하게 체제를 확립하였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소련의 위성국 전략과 김일성의 정권 수립 과정에서 소련은 전권을 김일성에게 부여하였던 것이지만, 미국은 이승만에게 전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미국은 이승만을 견제하기도 하였고 반대파를 지원하여 이승만을 길들이려고도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남한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고 남로당 득세, 반란, 폭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정권을 조기에 안정시키기 위해 친일파들을 재등용하였다. 이는 역사적 단죄를 무시하였고 과거사 정리에 소홀함으로써 민중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친일파들에 대한 청산 작업이 사회문제로 남아 있으며 진정한 호국 보훈에 대한 정체성이 혼란을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북한의 김일성이 정권수립 과정에서 주민 통치를 위해서 사용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식량 배급제'였다. 배고픈 자는 말이 없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죽는 신늉까지도 서슴치 않는 것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토지 국유화를 선포한 다음 집단농장을 건설하고 주민들에게 매일 일정량의 식량을 지급하되 말을 잘 듣는 자는 정량을 지급하였으나 말을 잘 듣지 않는 자는 지급량을 줄여 지급하였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별도의 수용소에 가둬서 굶겨 죽였다. 북한 전역에는 정권에 반발하는 자는 재판도 없이 총살형이 사방에서 집행되었고 오호담당제, 신고제, 사상교육, 집단영농 제도를 통해 북한 사회를 강력하게 통치한 결과 한국전쟁까지 발발시킬 정도로 짧은 기간내에 강력한 국가 체제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누가 전쟁을 발발시켰는지, 얼마나 많은 피해가 일어났는지, 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는지? 설문조사를 보면 우리 청소년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우라나라 공교육이 얼마나 잘못되고 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 진행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정부가 내건 보훈정책

 

 

한국전쟁의 역사적 뿌리

 

한국전쟁은 조선의 망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조선이 망하지 않고 일제 식민지배가 없었다면 남북이 분단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무능과 부패로 일제에 나라가 망하고 합병되면서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백성들에게는 조선 오백 년 동안 사대부들에 의한 수탈과 신분제에 의한 차별적인 고통이었다면, 일제의 식민지배 36년 동안의 고통은 사대부 출신을 포함 온 나라 온 백성이 노예처럼 억압과 고통을 받았고, 그리고 수탈을 당하였던 시기였다.

 

일제는 메이지 유신을 기화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급격하게 성장하였고 군국주의로 치달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과 밀약을 맺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제는 조선을 독차지 하게 되었다. 그후 일제는 조선을 실질적으로 식민지배하에 두게 되자 더 큰 야망을 꿈꾸게 된다. 식민지 쟁탈전과 제국주의 열풍이 국제사회에 기조를 이루던 당시, 일제는 중국과 동남아를 지배하여 경제적인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하며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또 필리핀과 동남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국과 일전이 불가피하게 되자,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는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태평양 전쟁이라는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초전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미국이 점차 반격의 기회를 되찿게 되었고, 산호해 해전이 이어 미드웨이 해전 승리를 기점으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제를 압도하기 시작하였고 맥아더에 의한 일제 점령 지역을 회복하면서 일본 반도로 압축해 들어갔다. 일제는 마지막까지 결사항전을 부르짖으며 '카미카제' 공격을 감행하는 등 결전을 시도했으나 두 방의 원폭에 두 도시가 무참하게 파괴되고 살상되는 엄청난 위력에 재빨리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패망한 일제는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독일처럼 연합군에 의해 분할통치되지 않고 국토가 온전하게 남았으나 한반도는 일제의 무장해제를 빌미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과 북으로 두 동강 나고 말았다. 도대체 전쟁일 일으켰던 일제는 온전한데 조선은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아닌데도 독일처럼 분활통치를 받게 되었으니 이 무슨 얄굿은 운명인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후 한반도에서는 통일을 위한 수차례 미소공동회의가 열렸으나 결렬되었고 한국의 통일은 남과 북이 극한적으로 대치한 가운데 38도선이 고착되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남방진출 전략과 미국의 미온적인 태평양 방어 전략에 맞물려 결국 38도 선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북한 지역에는 김일성 단독정권이 구성되면서 남과 북은 서로 체제와 사상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권이 수립하게 되었다.  

 

남북이 분단된 근본적인 1차적인 원인은 일제에 의해서다. 그것은 패망 직전 일제가 북한 지역을 담당하던 일본 육군 17사단을 대본영 직속에서 관동군으로 예속변경만 하지 않았어도 북한 지역은 미군의 무장해제 지역이 되었을 것이며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이 관동군 무장해제를, 미군은 대본영 직속부대를 대상으로 무장해제를 서로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또 2차적인 원인은 미국에 있다. 당시 미국의 협상 대표자들은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단일 국가였던 조선이라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진정 그들은 몰랐을까? 아니 미군의 고급 장교들이 머리가 아무리 우둔하다고 해도 절대로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한반도 38도선 이북 지역을 소련에게 양보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한반도 배신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은 제네럴 셔만 호가 통상을 핑계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평양 수비군과 민중에 의해 불타고, 강화도를 침범하려다가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약탈만 하고 물러난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그런 미국이 한반도를 독차지하려했으나 소련군이 대일전을 서두르자 일본 본토가 소련과 분활점령을 하지 않고 혼자 독차지할 욕심으로 한반도 38선 이북 북한 지역을 소련에게 양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반도는 유사시 언제라도 포기핳 수 있는 지역이지만 태평양 외딴 섬나라 일본은 아시아 침탈의 발판으로 항공모함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소련은 북한 지역까지 무장해제를 담당하게 되었고 미군은 38도선 이남 쪽만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 영토를 점령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미군은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삼아 일본 반도-필리핀을 연하여 태평양을 방어하는 방어선으로 구상하였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중국의 해양 진출로이며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한 남방 진출로 이기도하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대륙세력의 해양진출을 저지하는 전초기지에 불과하다. 전술 교범상에 기술된 개념에 의하면 전초기지(GP,GOP)는 유사시 언제라도 포기가 가능한 지역으로 그 임무가 적의 침공을 조가에 경고해주고 주방어선의 방어준비에 시간을 벌어주는 역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초기지의 장병은 적의 침공을 후방 본대에 경고해주고 현 지역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철수하지 못하면 후방의 지원도 없이 고립되어 전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반도의 운명이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에 주둔하던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군사력을 급속하게 증강시켰다. 북한 김일성은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파당과 출신을 불구하고 무자비한 숙청으로 반대파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제거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의 사회기강 확립으로 일당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모택동에게 의뢰하여 중국 공산당 출신의 팔로군과 조선인 출신 중공군 등 약 5만 명 이상의 의용군을 건제단위 내지 개별적으로 입북하였다. 소련으로부터는 최신 전차를 비롯하여 무기와 탄약을 제공받고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남한 이승만 정권은 좌우 갈등을 비롯하여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 사건, 대구 폭동 사건 등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정권 수립에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며 군사력은 미군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겨우 치안유지 수준의 소화기 위주의 군사력을 수립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38선 일대에서는 남북이 서로 침투, 살해, 포격 등 소규모 접전이 빈발하였고 이러한 소규모 전투는 전쟁 발발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 사이 북한 군은 소규모 전투에서 대규모 부대 단위 전투까지 훈련을 종료하고 휴전선 일대에 전진배치하게 되었고 김일성의 공격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일성은 남한 내의 정세가 혼란의 도를 더해가고 있는 것을 호기로 판단하고 남로당 박헌영이 북한군의 남한 침공시 대대적인 남한내 봉기 계획을 믿고 지체없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하여 전군에 '소위 남조선 해방 공격 명령'을 하달하게 되었다.

 

 

 

 

                                                                                          내방역 아침 풍경

 

배경

 

남북분단

분할 점령에 의한 남북분단이 한국 전쟁의 배경으로 보는 것인 즉,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여 이념대결을 벌인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는 곧 한국전쟁을 강대국의 대리 전쟁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에는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 소련과 미국이 대리전쟁을 계획하였다면 남북의 군사적 균형이 비슷하거나 근소한 차이로 시작되었을 것이며 소련군의 북한 군사력 증강 규모와 속도를 볼 때 미국의 남한 군사력 증강은 거의 치안 유지 정도의 미미한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대대적인 지원하에 전쟁을 준비하였고 남한은 미군이 철수하고 정정 불안과 사회 불안으로 군사력 증강에 집중하지 못하였다. 중국 공산군 출신의 팔로군과 소련의 신형 T-34전차 등 신형 무기 지원으로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에 비해 월등하게 우수한 수준이 되었고 남한은 미군의 폐기 무기나 겨우 지원받아 군사력을 준비한 수준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군의 일방적인 지원하에 정권 수립을 추진하였고 당시 중국 공산당의 중국 통일에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 대구폭동 등 사회 내부적으로 극도로 혼란이 조성되어 장치적 불안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무기는 커녕 인원수만 채운 부대만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 실정이었다.

 

독일의 경우는 점령군이 상주하면서 서로 대치하였으나 한반도의 경우는 점령군이 물러나고 자체적인 군사력만으로 서로 대치한 상태였다. 소련은 김일성의 남한 공격계획을 승인하지 않고 주저하였으나 잠정적인 묵인하에 전쟁에 임하였다. 그러나 남한의 이승만은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에 말로 북진통일을 외치며 정치적인 슬로건으로 내걸자 내심 불안해 하여  군사적인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김일성의 스탈린 설득

 

북쪽의 김일성1949년 무렵부터 수 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중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그를 설득하였고 스탈린 자신도 일부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전쟁 원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남침계획을 세우면서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 내에 있는 좌파들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이는 1949년 남조선로동당 등의 대한민국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대한민국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

 

조선로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기업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 주석과는 달리, 대한민국이승만 대통령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허황된 북진통일론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일본 공산당

 

1950년 5월 코민포름일본공산당의 온건노선을 비판하자, 일본공산당 도구사 서기장은 노동절을 기하여 일본공산당은 1950년 테제인 다가오는 혁명에 있어서 일본공산당의 기본임무를 채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전투적 공산당으로 변모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월 30일 궁성앞 인민광장에서 2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공산당 방위, 평화옹호, 요구관철, 조선통일전선 인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조총련의 행동대, 학생, 조직노조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집회 후 도심지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여 미군 헌병과 충돌하였다.

 

 

 

기타

 

이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소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38도선 분쟁도 한국전쟁의 배경이라는 시각도 있다.

 

 

  

                                                                                    내방역 근방

 

 

한국전쟁 직전 남북 군사상황

 

한반도 내 일본군무장해제 점령군 철수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1948년 각각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움과 동시에 남, 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소련을 방문하여 비밀 협상을 하여 련의 무기들이 대다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로 입수되었고 중국 인민해방군 중 조선인으로 편성된 팔로군 등을 북조선에 입국시켜 역시 전쟁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미 군부의 전략

 

미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 군부 수뇌부의 사고관에서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의문으로 대한민국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한반도 남쪽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얄류산 열도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한국전쟁 이후 냉전시대를 거쳐 소련이 붕괴된 후 아시아에 대한 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포위전략으로 대변된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떠오르는 중국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특히 인도와 중국이라는 두 대국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 전략의 일환으로 베트남전에 뛰어든 미국이 비참하게 참패하게 되자 자존심이 상하였일본의 방어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중요성이 지정학적 및 전략적으로 부각되었 그래서 미군을 한국에 주둔하면서 북한의 침공을 견제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적 성장은 미국의 우려를 자아냈으나 일본 경제도 대부분 해외에서 도입하는 에너지에 의지하기 때문에 언제던지 일본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국의 통제가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은 지리적 위치가 중국을 견제하기에는 더 이상 좋은 지역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것은 중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달된 중국 동부 해안 상해 등 인구 밀집지역과 수도 북경이 2000Km 정도로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기에 군사전략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데는 한국만큼 더 이상 좋은 지역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북한보다 우위의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한편 미국의 폐기처분 내지 노후 무기판매국으로 한국을 이용하면서 각종 대규모 군사훈련이 가능하고, 경제적으로는 금융, 석유, 자동차, 통신, 농수산, 각종 문화 상품, 지적재산권, 사치품 등과 관련된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자국의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면서 찢어진 핵우산을 제공하면서 한국의 목줄을 쥐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불평등 조약인 한미행정협정이나 미사일 사거리 통제, 핵 및 원자력 협정 등을 통해서 한국의 대량무기 개발을 적극적으로 통제 및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방역에서 이수역 방향 풍경

 

한국전쟁 호칭 

 

한국전쟁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사변(六二五事變)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밖에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으로도 일컬으며, 약칭으로 육이오라고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 또는 조선전쟁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초기부터 80년대까지 "6·25사변"이라는 말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했으나, 진보적 지식인 계층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직역한 "한국 전쟁"으로 번역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각종 학계와 언론 및 출판계에서 즐겨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조건 "한국 전쟁"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 전쟁을 마치 타국에서 벌어진 전쟁처럼 보이게 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다른 국가들은 조선 전쟁(일본어: 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 항미원조전쟁( 抗美援朝戰爭, 중국) 등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 등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방역 사거리 풍경

 

 

전쟁 발발 원인

김일성의 남침

 

 

한국 전쟁 당시 입대하는 장정을 마중나온 여성 (대구)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하였으며, 구 소련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대한민국의 북침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

 

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남침은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그리고 CIA는 한국 전쟁 발발 엿새전의 보고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근거로 했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를 전쟁 발발후 며칠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수장을 교체했다.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덜레스 장관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사건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먼저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비교적 폐쇄적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이 대규모의 대한민국 침입을 계획하고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미국의 사회학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벗나무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이 과거에 있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도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미국 등의 국가에서 과거에 제기되었던 한국 전쟁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들이다.

 

 

스탈린 주도설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은 소련의 지배 아래 있던 부라야트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현 부라야트 공화국)의 기갑부대 군사 1,500여 명을 파견했으며, 전쟁 초 서울에 나타난 조선인민군 탱크는 모두 이들이 조종했다는 설도 소련의 주도를 뒷받침하고 있다.

 

스탈린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50여 회 가량을 한국 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하였고, 스탈린은 이를 거절하였지만, 결국은 이후에 전쟁을 승인하게 되었다.

 

 

한미 공모설

이승만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

 

 

내란 확전설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1.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2.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3.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부대가 참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4.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국제연합군(UN군)도 진격시작, 평양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듦.
  5. 고착 전쟁(1951년 6월 ~ ): 중국 인민해방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에 공산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위주이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벗나무

 

 

전쟁준비

 

조·소 비밀회담

 

소련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하였고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회의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뇌부는 방문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 의용군 입북

 

한국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의 요청과 모택동의 지시에 의해 팔로군(八路軍) 중 한인 출신들로 ‘조선의용군’을 만들어 입북 시켰다. 이중 팔로군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4 사단은 만주지역에 주둔해 있는 한인들로만 구성된 단일부대로 1949년 7월 20일 입북하여 조선인민군 제 5사단으로 개편 되었다. 입북한 사단 인원은 10,821명이다.

 

제 4 야전군 휘하 제 55군단 166사단은 국민당군을 쫓아 대만해협까지 진격한 역전의 사단이며 한중 혼성 부대이다. 원래는 166사단 중 1개 연대만 한인이며 조선의용군으로 개편과정에서 중국인들을 한인으로 교체하여 1949년 7월 20일 입북 시켜 조선 인민군 제 6사단으로 개편 시켰다. 사단 병력은 10,320명으로 한국전쟁 당시 걸어다니는 공수부대라고 불리며 미 24사단을 괴멸시키고 한국군 사단 대부분을 격파한 최강의 부대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의 요청으로 팔로군 제 156사단을 중심으로 139, 140, 141사단의 한인들을 모아 1950년 4월경 입북하여 약 1만 4천 병력으로 조선인민군 제 7사단을 만든다.(이후 제 12사단으로 명칭 변경)

 

그외 중국인민해방군에 부대단위가 아닌 개인적으로 복무 중인 한인들을 모아 1개 연대를 만들어 입북시키는데 이들은 오토바이 연대가 된다. 이렇게 하여 모택동이 보내준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 출신 조선의용군은 3개사단 5만명이다.(대안교과서 등 일부자료는 2개사단 3만명으로 나오는데 12사단과 오토바이연대를 누락 시킨 것이다.)

 

 

준비 과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전쟁은 김일성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유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을 준비함에 앞서 대한민국의 정보를 상당부분 알고 있었다. 특히 평양에서 발견된 조선인민군 정보문건에 의하면 대한민국 각 행정 소재지의 군(郡) 단위까지 1950년도의 쌀, 보리 등의 모든 농작물 예상 수확량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확보할 수 있는 식량의 규모, 즉 공출량을 계산한 상태였다. 특히 모든 종류의 주식은 물론이며 주식이 아닌 깨까지 군 단위별로 예상 수확량과 공출량을 매겨 놓았다.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대한민국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아주 허술하게 대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