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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생각의 쉼터

강남의 봄 14 : 피곤한 삶의 조각들......

 

 

 

강남의 봄 14 : 피곤한 삶의 조각들......

 

 

                                                                                내방역 근방 짙어가는 6월의 푸르름

 

지난 목요일에는 장지동 큰 동서께서 오랫 동안 모시고 같이 살던 삼촌뻘 되시는 할아버지께서 최근 양로원에 보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연락을 받고 저녁에는 장례식장이 있다는 경찰병원으로 갔다. 돌아가신 삼촌 할아버지는 원래 미혼으로 자식도 없는 무의탁 노인으로 장애도 약간 있는 분인데 모실 사람이 없어서 큰동서께서 지금까지 모셨던 분이다.

 

그래서 조카인 큰 동서가 어렵게 살면서도 40여 년 이상 모시고 같이 살았다. 좁은 집에 아들도 없이 딸만 셋이 키우면서 그 어른을 같이 모시고 살았다는 게 기가막힌다. 친 아버지도 아닌 장애인 삼촌을 그렇게 모신 것은 도저히 나 같은 사람은 가능성이 없는 고행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애비 삼촌을 모실 수밖에 없었던 말 못 할 가족사가 있었겠지만 난 알고 싶지도 않고 또 자세히도 모른다. 큰동서도 그런 사연을 구체적으로 나에게 설명하지도 않았고 신혼 때 가끔 찿아가면 삼촌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내가 인사를 건네곤 했던 기억이 난다.

 

마누라와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3호선을 타고 경찰병원 역에 도착하니 마누라가 마침 지하철에서 내리기에 만나서 같이 장례식장으로 갔다.

 

 

 

                                                                                               강남성모병원 전경

 

딸 부부가 여주 아울렛에서 갔다가 마누라를 통해서 연락이 왔는데 저녁에 장례식장으로 갈 때 집으로 나를 모시러 오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딸에게 언제쯤 올거냐고 물었더니 아직 여주인데 곧 갈꺼란다. 그러나 한참 있다가 다시 물었는데 아직도 여주란다. 그냥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아 너희들은 별도로 오라고 했다. 그러자 어차피 집으로 옷을 갈아 입으려 가니 모시려가겠다고 했지만 난 그냥 먼저 간다고 했다. 그래서 마누라와는 장례식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혼자 집에서 출발하였는데 이유는 딸이 약속을 잘지키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대인관계에서나 직장에서도 결정적인 결함이다. 지금까지 딸애는 자기가 오겠다는 시간에 제대로 온 적이 없었고 항상 늦게 왔다. 밥 먹으로 온다 해도 제 시간 전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다. 내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남편보다 먼저 와서 같이 저녁을 준비하는 경우도 없었다.

 

마누라에게 그런 태도와 자세를 고치도록 이야기를 했지만 딸에게 이젠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 입장이다. 이미 시집간 딸을 이기지도 못하겠지만 훈계를 해도 들을 나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교육의 부족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부모의 평소 언행이나 교육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모두가 내 탓일게다.

 

딸은 온다는 시간도 넘기고 제멋대로 늦게 같이 나타나서는 밥을 먹고 택배 온 것, 마누라가 주는 반찬 등 자기 물건만을 챙기고 사라진다. 얼굴이라도 보고픈 심정에 웃으면서 반갑게 딸과 사위를 맞이하지만 마음은 항상 딸 때문에 편하지 못하다. 저런 생각이 깊지 못한 딸을 아내로 맞아준 사위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딸은 나에게 일종의 어린시절 트라우마가 있다. 목욕을 시키는데 내 손으로 떼를 밀면 좀 아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이후 내가 씻겨주는 것을 싫어했고 마누라와 벌어진 부부싸움을 보았고 그러한 모든 것에 절대적인 거부감이 강하다. 그러나 진작 이런 것이 우리집만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집안에서 자식들이 부모를 우습게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딸은 대학을 휴학을 하면서 5~6년 가까이 다녔던 것으로 생각된다. 학비는 물론 용돈, 그리고 직장을 다닐 적에는 자신의 치장에 낭비가 좀 심한 편이고 절약 정신이 부족하여 돈을 제대로 모으지도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묻지도 않았지만 마누라와 이야기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어떤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결혼 비용도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부모에게 부담을 꽤 준 편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송한 마음은 전혀 없이 지금도 자신 위주로만 생각을 하고 매사에 정확하지가 못하여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 가정교육의 부족함이니 어쩔 것인가! 자신의 삶은 자신이 사는 것이니 스스로 업보를 짊어지고 갈 것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처가집 일가친지들이 거의 모두 먼저 와 있었다.  죄송한 마음에 얼른 조문을 하고 일일이 인사를 했다. 딸 부부는 우리보다 한참 늦게 나타났다. 장례식장에 모인 처가집 인친척들이 별도로 모여 같이 등산이나 여행, 야유회를 간 적도 없지만 이렇게 모이는 것이 유일하게 같이 얼굴을 보는 시간이다. 둘러보니 조문을 오면서 검정 옷을 제대로 입고 온 인간들이 드물다. 최소한의 예의마저 상실한 사람들이다.

 

처조카들 결혼식에 다녀보았지만 결혼 후에 우리 집을 찿아와서 인사를 한 조카들은 한 명도 없다. 나이 젊은 이모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마 자신들의 삶에 별 영향력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동과 태도, 자세는 그들 부모들이 소양이 부족하여 제대로 자녀 교육을 시키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정이 갈 것이며 애틋한 사랑이 느껴지겠는가? 그냥 인사하고 웃으면서 지나가는 바람처럼 대할 뿐이다.

 

 

 

                                                                                 방배역 근방 도로 전경

 

 

면목동에 사시던 제일 큰 동서 형님네는 두 분다 이미 돌아가셨는데, 그 형님은 한국전쟁시 1.4 후퇴 때 월남하신 어른이었다. 이곳에서 큰 처형을 만나 결혼하고 억척같이 살았고 자식들은 아들 하나 딸 둘 등 셋을 낳았다.  큰 형님은 살아계실 때 몇 번 찿아가서 뵌 적이지만 술, 담배는 물론이고 찿아간 우리들과도 대화가 별로 없어서 재미가 없었다. 대신 술을 좋아하시던 큰 처형이 나와 같이 술을 마시며 대작을 했는데 무척 기뻐하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부모없는 자기 동생을 데려간 점에 대해서 무척 고맙고 대견스러웠던 모양이다.

 

큰 형님 그 어른은 월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서 남한에서 지독한 구두쇠로 평생을 억척같이 살아오신 분이다. 그래서 자식을 모두 키우고 재산도 어느 정도 모았던 것이며 이북에 두고온 처자식도 있었지만 한번도 이산가족 신청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지금 이 나이에 이북의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면 무엇 할 것이냐며 거부하였다고 했다.

 

술 한잔 한 김에 처조카 부부, 주변 친척, 그리고 딸에게 몇 마디 한 것을 두고 다음날 아침까지 마누라가 구박이다. 술 먹은 상태에서 비위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을 마누라는 아직도 모른다.

 

다음 날은 마누라가 쉬는 날이라 관악산을 가자고 했으나 요즘 진드기 전염병으로 야외 산행을 자제해야 한다고 가지 말자고 했다. 그러면서 손주와 며느리도 볼 겸 대전 아들집에 갔다오라고 했더니 굳이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고속버스를 타고 갈 듯하여 준비하고 있는 데 차를 가지고 가잔다. 그래서 차량으로 가는 김에 강아지 두 마리를 싣고 우리는 대전 아들네 집으로 9시 반쯤 출발했다.

 

자주 운행을 하지 않는 차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대략 점검을 하고 용기를 내서 출발했다. 강아지들은 처음 타는 차라 놀란 표정들이다. 자기들을 어디에 버리려 가는 줄 아는지 가는 내내 불안한 모습이다. 천안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강아지 오줌도 누이고 다시 출발했다.

 

 

 

 

                                                                                      방배역 근방 국민은행 앞

 

대전 아들네 집에 도착하니 아들은 출근했고 며느리를 데리고 지난 번 갔던 왕냉면 전문집으로 갔다. 그늘이 없는 주차장이라 차를 주차하고 식사하다 중간에 나와보니 강아지들이 더운 차안에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창문을 약간 열어 놓았으나 더운 날씨에 차안이 찜통이었다. 갈비를 주어도 먹지도 않고 더운 차안이라 혀를 내밀고 헉헉거린다.

 

물을 먹여주고 갈비를 둔 채 신문지로 유리창을 덮어주고 다시 식사를 마친 후에 나가보니 두 마리 모두 의자밑으로 들어가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차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나무 그늘에 잠시 더위를 식혀주고 물도 먹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밥을 주는 나를 저들 부모처럼 따른다. 강아지들아 미안하다. 그냥 집에 두고 오기에 안쓰러워 데리고 왔는데...... 생고생을 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백석대학교 근방

                                                                                          

 

아들이 3시경에 퇴근하여 집으로 왔다.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우리끼리 갈비와 냉면을 먹고 왔다니까 좀 섭섭한 표정이었다. 아들 얼굴을 보니 좀 피곤해 보이기도 한다. 애비가 되었으니 사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넌 그래도 나보다 행복한줄 알아라' 난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 사이 마누라는 며느리와 같이 시장도 좀 보고 밑반찬도 만들었다. 그런데 아들말에 의하면 오늘이 며느리 생일이라고 했다. 원래 음력이나 양력으로 쉰다고 했다. 그래서 미리 마누라가 용돈도 약간 준비하고 상품권도 준비해서 전달하고 케이크도 사와서 같이 축하해 주었다.

 

며느리는 8월에 둘째를 낳을 예정이라 지금 배가 부르다. 더운 날씨에 애기를 낳을 예정이라 걱정이다. 출산하는 데 지난번에는 제왕절개, 조리원, 애기 준비품 등 추정하건데 대략 500만 원 이상 들었던 것 같다. 여유가 있어 좀 한다는 집은 1,000만 원을 훨씬 넘을 것이다. 물론 부자들의 원정출산에야 비교할 수 없지만......요즘 첯째 손주 지웅이를 어린이 집에 데려다 주면서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작은 방 벽에는 지난번 내가 며느리에게 써준 A4 다섯장 분량의 글을 붙여 두었고 그것을 본 다른 엄마들이 그것을 복사해 달란다고 했다고 한다. 글이 마음에 들었던지 요즘 이런 시아버지가 어디있느냐며 부러워했다나..... 글쎄, 능력이 없으니 글로써 그것을 대신하는 내 마음을 알런지......

 

이제 아들도 둘째를 낳으면 바쁠 것이다 생활비도 그렇고 가계는 더욱 쪼달릴지 모른다. 며느리는 힘든 생활에 마음 고생이 많은 모양이다. 남들처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항상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것이다. 비슷한 엄마들이 만나면 서로 정보도 교환하지만 자식들을 서로 비교하게 되고 더 좋은 옷, 더 좋은 장난감, 더 좋은 환경을 자랑하려 할 것이다. 덩치도 같은 또래에 비해 크고 잘 노는 아들이 며느리는 자랑스러울 것이다.

 

어린 자녀는 커 봐야 안다. 부모와 학교에서 어떻게 인성 교육을 시키고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심어주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던지 최소한 남들처럼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 지혜로운 부모는 형편대로 근검절약하며 사는 것이지 절대로 자식을 풍족하게 키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러나 며느리 얼굴에는 부족함에 찌든 그런 상념이 얼굴에 가득해 보인다. 어쩌면 둘째를 낳으면 더 어려워질 것인데......

 

 

                                                                                        서울성벽 전경

 

저녁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다소 걱정이 되었는데 또 지난번 처럼 도로상에서 펑크가 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속도를 천천히 해서 왔다. 주변을 지나가는 차량들이 총알처럼 지나간다. 그들 머리위에는 저승사자가 같이 달리고 있는 듯하다. 목숨건 고속 주행과 지그재그 운전을 바라보면서 나도 90년대 초 서울 집에서 계룡대까지 월요일 아침에 총알처럼 달리던 기억이 난다.

 

약속대로 며느리 생일 선물로 빙수기를 신청했다. 거금 7만원 가까이 들여 빙수기와 빙수재료를 신청했다. 아마 다음 주 화~수요일 사이에 대전 아들집에 도착할 것이다. 서울로 돌아와서 G마켓에 신청을 하고 아들과 며느리에게 빙수기 신청했다는 내용의 메세지를 보냈다. '시원하고 건강한 여름 잘 보내기 바란다'며......며느리가 '감사하다'고 답장이 왔다.

 

아들아, 며느리야! 어려운 살림에 치솟는 삶의 분노를 시원한 팥빙수를 먹고 마음속으로 식히며 부디 벽에 붙어 있는 내가 쓴 글을 보며 삶이 힘들고 어렵지만 참고 견디며 넓은 마음으로 단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욕심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며 서로 이해하고 부디 행복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