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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마음의 평안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선생...

 

 

 

유일한 선생이 카네기보다 위대한 이유

머니투데이 | 기사입력 2007-10-02 12:02 기사원문보기

[머니투데이 예종석 한양대 경영대학 학장][[쿨머니칼럼]국내 최초 종업원지주제 도입 등 사랑으로 경영]

고(故) 유일한 선생만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선생의 나라사랑과 사회공헌으로 점철된 인생역정 자체가 한없는 감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본받을 만한 사람이 드문 이 시대에 선생의 생애는 우리들에게 한줄기 빛처럼 나아갈 바를 제시해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던 1895년, 평양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국운을 걱정하던 부친 유기연의 권유에 따라 아홉 살에 불과하던 1904년 큰 뜻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 후 선생은 독립운동가 박용만 선생이 설립한 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에서 3년 동안 민족군사교육을 받은 뒤 헤스팅스 고등학교를 거쳐 미시간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에서 면학에 몰두하던 시절에도 선생은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등과 함께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여 독립결의문을 작성, 낭독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은다. 그 후 선생은 연희전문의 교수직을 제안 받게 되나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백성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제약회사를 만드는 일이라 판단하고 193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유한양행은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힘쓰고 우리의 특산품을 미국에 수출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사업으로 성장해 나간다.

 

1938년 재차 도미한 유일한 선생은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조성과 상해임시정부의 후원 및 맹호군으로 알려진 한인국방경위대의 창설 등에 크게 기여한다.

 

1945년, 선생은 50세의 나이에 미 육군전략정보처(OSS)가 수립한 한국침투작전, 냅코 작전(Napko Project)에 핵심요원으로 참여하여 폭파, 통신, 낙하산훈련 등 특수공작훈련을 받고 국내잠입을 기다리던 중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광복 후 귀국한 선생은 유한양행의 경영은 물론, 대한상공회의소의 초대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국가경제발전에 이바지하였고 고려공과기술학교와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육영사업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선생은 자신이 100% 소유하고 있던 유한양행 주식의 52%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사원들에게 양도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선생은 수많은 유혹과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결코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정치자금 제공요구를 철저하게 외면했으며 그로 인한 보복성 세무조사도 수없이 받았으나 오히려 모범적인 납세실적이 드러나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애국애족으로 점철된 삶을 살은 선생은 1971년 남은 재산을 모두 공익재단에 기부하고 회사의 경영권을 혈육이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이양한 뒤 세상을 떠났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며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자신의 기업관을 온몸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의 수단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가치 판단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했고 그 원칙을 전 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지켰다.

 

독립 운동가이자 참기업인이며 사회사업가이기도 했던 선생의 치열한 삶은 위대한 기부자로 알려진 카네기나 록펠러의 일생보다 더욱 교훈적이다. 카네기나 록펠러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는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경쟁자를 수단방법가리지 않고 몰락시키는 등 악명이 높았던 데 반해 선생은 평생을 국가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의 아름다운 행적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관심과 존경은 미국사회가 카네기나 록펠러에 대해서 갖는 애정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유일한 선생을 흠모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가득해질 때 우리는 그분의 뒤를 있는 제2, 제3의 유일한 선생을 갖게 될 것이다.

 

요즘같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실망스러운 행태를 보이고 기업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존경보다는 손가락질 당하는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 선생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뜨겁게 솟구친다.

 

예종석한양대 경영대학 학장